오리 이원익의 유적을 따라 (2021년 8월 19일) 瓦也 정유순 1597년(정유년) 2월 이순신(李舜臣)은 원균의 모함으로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 선조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국문장(鞠問場)이 열리게 되는데 200명의 문무백관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한다.”며 조아리고, 선조(宣祖)도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라고 압박했으며, 심지어 이순신을 발탁하여 파격 진급을 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유성룡(柳成龍)까지도 ‘公은 公, 私는 私’라고 하며 이순신의 사형에 반대를 못했다. 그런데 왜?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의 형의 집행을 못하고 있었는가? 당시전시상황을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지금의 계엄총사령관)인 이 전시상태에서 아무리 임금과 문무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