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오리 이원익의 유적을 따라

와야 정유순 2021. 8. 26. 21:06

오리 이원익의 유적을 따라

(2021 8 19)

瓦也 정유순

  1597(정유년) 2월 이순신(李舜臣)은 원균의 모함으로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 선조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국문장(鞠問場)이 열리게 되는데 200명의 문무백관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한다.”며 조아리고, 선조(宣祖)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라고 압박했으며, 심지어 이순신을 발탁하여 파격 진급을 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유성룡(柳成龍)까지도  ,  라고 하며 이순신의 사형에 반대를 못했다

<오리서원 이정표>

 

  그런데 왜?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의 형의 집행을 못하고 있었는가? 당시전시상황을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지금의 계엄총사령관)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이 전시상태에서 아무리 임금과 문무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라고 외쳐도 도체찰사인 이원익의 승낙 없이는 선조(宣祖)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명으로 임진왜란의 전시 상태에서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현역사공원>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 전하께서 전시 중에 신()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 중에 삼도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 못하옵니다.”라는 이 말 한마디에 선조도 체념을 하고, 드디어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문장에서 문무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 없는가 보구나!”라며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여 백의종군하게 된다

<오리서원 입간판>

 

  이원익은 1547(명종 2) 10 24일 서울 유동(楡洞) 천달방(泉達坊, 지금의 종로구 동숭동 일대)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종실의 일원이다. 그의 고조는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고 증조는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 조부는 청기수(靑杞守) 이표(李彪), 아버지는 함천정(咸川正) 이억재(李億載). 어머니는 사헌부 감찰 정치(鄭錙)의 딸이다. 이원익의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1634 8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오리서원 안내판>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을 구명해줘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구하게 만들었던 오리 이원익선생의 발자취를 엿보기 위해 경기도 광명시 오리로 287(소하동 1055-3)에 있는 오리서원(梧里書院)을 먼저 찾아갔으나 코로나19 영향으로 문이 잠겨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 서원은 2001년 조선시대 청백리로 추앙받았던 <오리 이원익 기념관>으로 설립되었다가 2013 <오리서원>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디지털 전시관에서는 오리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만화와 디지털 화하여 소개한다고 한다

<오리서원>

 

  이원익선생의 묘지와 신도비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서원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발길을 돌린다. 묘 입구는 아직 벌초 전이라 풀들이 무성했다. 봉분은 쌍분(雙墳)이며, 부인 영일정씨(迎日鄭氏)와의 합장묘다. 쌍분의 중앙 앞에는 대리석으로 된 묘비와 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있다. 상석의 전방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었으며, 주변에 가족묘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원익의 묘>

 

  묘비(墓碑)의 규모는 높이 190, 너비 67, 두께 17이며, 앞면에는 증시문충 권정량효절협책호 성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완평부원군이공지묘(贈諡文忠 勸貞亮效節協策扈 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完平府院君李公之墓)’라는 명문이 대리석에 새겨 있

<이원익 묘비>

 

  신도비(神道碑)는 묘역과 오리서원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비각 속에 있으며, 이수(螭首비신(碑身기대(基臺)로 구성되었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고, 기대에는 안상문(眼象紋)과 연꽃잎 모양이 장식되었다. 신도비는 총 높이 335, 높이 185,  90, 두께 28. 이준(李埈)이 글을 짓고 손자사위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글씨를 썼다고 하는데,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이원익 신도비각>

 

<신도비 탁본>

 

  묘와 신도비를 보고 오리로(梧里路)를 따라 북으로 조금 올라오면 충현박물관이 있다. 충현박물관은 조선 중기 문신인 이원익의 종가(宗家) 박물관으로 13대 종손인 이승규(李升圭)와 종부인 함금자(咸金子) 부부가 종가의 생활 모습을 통하여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조선시대의 충효(忠孝)와 청백리(淸白吏)정신 등의 정신문화를 보급하고자 설립한 국내 유일의 조선시대 종가박물관이다

<충현박물관 배치도>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구름산 서쪽 자락에 있는 충현박물관은 2003 5월 재단법인 충현문화재단 설립 후, 2003 10 24일 충현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후 2004 8월 경기도 테마 박물관으로 지정되었다. 박물관 안에는 이원익과 직계 후손들의 유적 및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박물관 일대는 오리선생이 말년에 여생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충현박물관 입구>

 

  박물관 입구인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충현관(忠賢館) 올라가는 계단 양옆으로는 다듬이돌이 놓여있다. 이 돌들은 이원익선생의 종부(宗婦)께서 우리나라 각지의 다듬이돌을 모아 놓는 것이라고 한다. 계단 옆으로 들어가는 1층의 전시실에는 이보다 더 귀한 다듬이돌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당시 사용했던 버들고리, 놋화로. 신선로 등 각종 생활용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충현관 입구>

 

  조선 명종 때 태어난 오리선생은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이르기까지 60여 년에 걸쳐 공직에 몸담았다. 권력과 부에 집착하지 않고 원칙과 소신으로 국난을 헤쳐나간 명재상이자 청백리, 그리고 백성을 사랑했던 정치가였다. 선조부터 인조 대까지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이라는 두 차례 국난을 겪었고, 당쟁으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분란의 시대였으나, 이 혼란의 시대를 거치며 다섯 차례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올랐다

<오리 이원익선생 영정>

 

  선생의 애민사상은 백성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살아생전에 생사당(生祠堂)을 세울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 안주목사로 부임하여 백성을 위해 양곡을 조정에 요청해 종자로 보급하여 풍작을 이루었고, 양잠도 장려하여 사람들은 그를 이공상(李公桑)’이라고도 불렀다. 백성들이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을 세운 것도 이때 일이다. 평안도는 평양(平壤)과 안주(安州)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평안도(平安道)라 불린 만큼 안주는 변방이지만 무척 중요한 지역이었다

<오리선생 유필 목판>

 

  특히 군정도 개혁하여 병사들이 1년에 4번 들어가 근무하던 것을 6번으로 고쳐 근무 기간을 석 달에서 두 달로 줄였는데, 이 제도는 그 뒤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에 실시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안내할 수 있었던 것도 안주목사 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은 결과다. 인조 때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당시에도 임금을 모시고 충남 공주와 강화도로 각각 호종했다. 당시 그의 나이 78, 81세에 이르는 노구의 몸이었다

<오리선생 유필 목판 인쇄본>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를 반대하다 홍천(洪川)으로 유배되기도 했고, 인조 즉위 후 광해군(光海君)을 죽이려 하자 몸소 막았으며,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고 소신을 펼치는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공직에 몸담은 기간 동안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거치며 망가질 대로 망가진 조선을 위해 헌신했다

<충현관 전시관 내부>

 

  전시관은 충현관(忠賢館)과 야외 전시장, 기획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충현관에는 <이원익 선생 영정>, 친필, 교서, 문집 등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목가구·제기·집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주요 유물로는 <이원익 초상>, 관감당, 종택을 비롯하여 경기도 유형문화재 10, 경기도 기념물 2, 경기도 문화재자료 5건 등 총 18건의 지정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고, 이 외에 고문서 및 민속품, 석조물 등 1,7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오리 영정>

 

  충현관을 나오면 바로 앞이 종택(宗宅)이다. 종택은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자형 안채와 자형 문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옛 집터에 1916년 병자호란 때 허물어진 사랑채인 관감당을 새로 짓고, 이듬해에는 안채를 들이고, 1940년에는 문간채를 새로 지었다고 한다. 현대식으로 고친 부분도 있으나, 안채는 13칸 반 규모로 20세기에 세운 경기지역 살림집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관감당과 함께 경기도 문화재자료( 90)로 지정되었다

<오리선생 종택 안채>

 

  사랑채인 관감당(觀感堂) 1631(인조 9)에 인조가 하사한 집이다. 인조는 이원익이 벼슬에서 물러나 85세가 되던 해에 초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에 새 집을 하사하고 <관감당>이라고 명명하였다. ‘관감당은 신하와 백성 모두가 이원익의 청렴한 삶을 보고 느끼게 한다.’라는 뜻이다. 현재의 관감당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뒤쪽 칸에는 책 등을 보관하던 창고와 벽장을 두었다. 병자호란 때 소실된 것을 사후 60년을 기념하여 1694년 후손들이 오리영우와 관감당을 중건 했다

<관감당>

 

 관감당 앞에는 문비대(文備臺)와 탄금암(彈琴岩)이 있다. 문비대는 학문과 교육에 대한 준비라는 뜻으로 이 표석은 충현서원 터에서 찾았다고 한다. 탄금암은 오리선생이 거문고를 손수 연주하던 바위다. 이원익의 문집인<오리집(梧里集)>에는 지금의 서울 동숭동에 살 때 낙산(駱山)에 올라 거문고를 즐겼고’, 5대손 이인복(李仁復)의 문집에도 <문충공유금내력전말기(文忠公遺琴來歷顚末記)>라는 글이 있어 거문고를 좋아했음을 알려준다

<문비대>

 

<탄금암>

 

  관감당 뒤에는 <오리영우(梧里影宇)>가 있다. 영우는 초상화를 모신 사당(祠堂)이다. 이원익은 1569(선조 2)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 등 주요 관직으로 군병의 모집과 왜군 토벌의 책임을 다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피폐해진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광해군(光海君)에게 대동법(大同法)을 건의하여 지역특산물로 세금을 내던 것을 토지면적에 비례해서 쌀로 납부케 하여 경기지역부터 실시하였다

<오리영우>

 

  오리영우 뒤로 가면 충현서원 터가 나온다. 충현서원(忠賢書院) 1658(효종 9) 지방 유림의 공의로 강감찬(姜邯贊서견(徐甄이원익(李元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6(숙종 2) 충현(忠賢)’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충현박물관의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 같다

<충현서원 터>

 

  충현박물관 부지 안에는 삼상대와 풍욕대가 있다. 삼상대(三相臺)라는 표석만 남은 채 사라졌던 정자를 이원익의 후손들이 1993년 충현서원(忠賢書院) 터에 풍욕대와 함께 복원하였다. <삼상>이란 우의정·좌의정·영의정, 즉 삼정승(三政丞)을 일컫는 말인데, 오리선생이 이 직분을 다 지냈다

<삼상대-네이버캡쳐>

 

  풍욕대(風浴坮) 바람으로 목욕한다.’는 뜻을 지닌 정자다. 풍욕은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일화에서 비롯된 말로, 공자가 제자 증점에게 원하는 것을 물으니 증점이 ‘<기수>라는 강에서 목욕하고, 기우제를 지내는 <무우>라는 곳에서 바람을 쐬고 싶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이다

<풍욕대-네이버캡쳐>

 

  오리선생은 88세로 생을 마감하시면서 자식들을 불러 놓고 나를 위해 부고도 알리지 말고 사후에 어떠한 사당이나 칭송된 일은 하지 말며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문장에 뛰어났으며, 남인에 속했으나 성격이 원만하여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샀다. 인조의 묘정(廟庭)과 여주 기천서원(沂川書院) 등 여러 곳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오리문집(梧里文集)>·<속오리집(續梧里集)>·<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다

<오리문집-네이버캡쳐>

 

  그리고 충현서원 터 후원에는 오리선생의 부모인 함천군 부부 묘와 형인 이원보의 묘가 있고, 숙부인 이억령의 묘가 함께 있다. 종갓집으로 오랫동안 사용하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어떻게 보면 공간이 협소하게 보일 것도 같은데, 오래된 수목들이 함께 어우러져 가볍게 산책하면서 옛 것을 아끼고 오늘을 바라보며 온고지신(溫故知新) 할 수 있는 곳이 충현박물관 같다

<이원익 부모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