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 - 독산성과 세마대

와야 정유순 2021. 8. 21. 07:44

가깝고도 먼 길 - 독산성과 세마대

(2021 8 7)

瓦也 정유순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5, 이곳에는 독산성과 세마대(洗馬臺)라는 곳이 있다. 경부선(지하철 1호선) 세마역(洗馬驛)에서 내려 약 3 남짓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세마(洗馬)>라는 이름은 이 세마대에서 유래되었고, 이 역은 세교신도시 입주민들을 위해 지은 역이다. 역사(驛舍)는 세마대가 있는 독산성(禿山城)을 모티브 한 듯 견고한 성곽 같다

<세마역>

 

  세마역이 있는 곳은 세교동(細橋洞)으로 작은 다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잔다리로도 불린다. 옛 지명인 큰말·건너말[越村오리골 세 마을이 합쳐져 지금의 세교동이 되었다. 잔다리아파트 단지를 따라 남북으로 조성된 은빛개울공원은 도시의 생태계를 연결해 주는 비오톱(Bio-top)을 형성한다

<세교동 은빛개울공원>

 

  세마교차로를 지나 지곶중앙로를 따라 삼복염천의 무더위와 함께 독산성으로 향한다. 넓고 곧게 뚫린 신작로는 새로운 시가지를 형성하면서 옛 정취를 앗아 간 것 같다. 가끔 쌩쌩 달리는 자동차가 아찔하다. 옛 것이 그리운 건가? 독산성 음식문화의 거리 입구로 가는 옛길이 이렇게 반가울 수 가 없다. 새롭게 변신하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세상이 변해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정표>

 

  독산성 입구에는 산사(山寺)의 일주문 같은 <독산성세마대산문>이 기다린다. 산문(山門)을 들어서니 푸른 나뭇가지들이 터널을 이루고 나뭇잎 흔들며 바람소리 소소하다. 발걸음 옮길 때마다 땀방울 옷깃을 적시지만 흐르는 땀방울만큼 그 푸르름은 짙어만 가고 젊은 날의 객기가 아련히 떠오른다. 잘 정리된 도로를 따라 가다가 옆의 샛길로 접어들어 독산성 남문으로 간다

<독산성세마대산문>

 

  남문(南門)은 독산성의 정문으로 진남루(鎭南樓)라는 문루(門樓)가 있었다고 한다. 문루의 규모는 6칸이었으며, 영조·정조·순조 때 고쳐지었다. 이 문으로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다. 지금의 모습은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79년에 정비하여 복원한 것이며, 바닥에 성문을 여닫을 때 문짝을 고정시켰던 문확석 두 개가 남아 있다

<독산성 남문>

 

  남문에서 비탈진 길과 계단을 따라 독산(禿山)의 정상에 오르면 세마대가 나온다. 세마대(洗馬臺)는 독산성의 지휘소로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장군이 폈던 진묘(眞妙)한 병법 전략에 연유해 지금은세마산또는세마대라고도 부른다. 독산성은 군사기지로서의 주요 위치에 놓여있긴 하지만, 샘물의 부족이 흠이었다. 이 때문에 1593(선조26) 전라도 순변사이던 권율 장군이 명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수복하고자 2만 명의 군사로 이곳에 진을 치고 대군과 대치한 독산성 전투는 너무나 유명하다

<남문에서 세마대 가는 길>

 

  그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왜군은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탐정군에게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냈다. 그러나 권율 장군은 왜군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백마를 산 위에 끌어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말을 씻는 시늉을 하게 하였다. 이것을 본 왜군은 성내에 물이 많은 것으로 알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샘물의 부족한 단점을 권율 장군이 슬기롭게 극복한 세마대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세마대>

 

  권율 장군은 전라도 금산 이치전투에서 승리한 군대를 끌고 오산의 독산성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왜군이 대규모 군대를 편제해서 독산성을 공격했으나, 독산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후퇴하는 왜군들을 쫓아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침으로써 한양과 호남지역의 교통로를 잇는 중요한 요지를 확보한 것이다. 또한, 조도어사(調度御使) 변이중(邊以中)으로 하여금 화포를 발명·제작케 하여 행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둔다

<독산성 숲길>

 

  독산은 지금처럼 숲이 우거진 산이 아니라 본래 대머리산 또는 민둥산이어서 독산(禿山)으로 불리어진 것 같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쌀로 말을 세척하는 장면을 산 아래 멀리서 볼 수 있었던 것도 민둥산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한 때는 석대산, 향로봉이라고 불려왔고 조선시대에는 독산성이라 불려왔었다. 세마대가 있는 정상은 나무 그늘이 안식을 만들어 주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독산성 느티나무>

 

  사적(140)으로 지정된 독산성(禿山城)은 본성의 총 연장은 1,100m이며 내성은 350m이 달하는 아담한 산성이다. 독산성의 축조연대는 불분명하지만 독산성의 위치적 특성이 용인, 양지 간에 있는 고성(古城)과 남한산성이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왕도의 문호를 굳게 한다는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다. ‘임란 후 조정에서 독산성에 세마대를 장엄하게 세우고 병기창을 두어 무예연습을 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국문화유적총람(1977 간행) 참조>

<세마대(洗馬臺)>

 

  1594(선조 27) 백성들이 산성을 쌓았고, 임진왜란이 끝난 1602(선조 35)에 변응성(邊應星)이 다시 보수하고, 그 후 1792(정조 16) 1796(정조 20)에도 다시 공사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세마대는 1957년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세마대 중건위원회>가 그 해 8 15일 옛 터 자리에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복원했다. 세마대(洗馬臺) 편액은 남북으로 걸려 있는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이 직접 쓴 洗馬坮(세마대)’편액은 건물 남향에 걸려 있다

<세마대(洗馬坮)>

 

  독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시야는 북()으로 화성의 융·건릉이 있는 화산과 수원이 지척이고, ()으로는 동탄의 마천루(摩天樓)가 분기탱천(奮起撐天) 한다. ()으로는 오산뿐만 아니라 평택의 너른 들이 넓게 펼쳐지며, (西)로는 화성시의 송산면과 장안면, 우정읍에서 울려 퍼진 기미년(1919)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독산성에서 본 수원방향>

 

<독산성에서 본 동탄방향>

 

  북쪽 계단을 내려와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동문이 나온다. 동문(東門)은 평거식 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이 각각 두 개씩 남아있다. <화성지>의 기록에 의하면 문루와 이름이 없고, 동문은 사람만 다니는 문으로 성문 안쪽에 <보적사(寶積寺)>라는 절이 있다. 지금의 동문은 1982년에 정비하였다

<독산성 동문>

 

  동문 안에 있는 보적사는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백제 아신왕(阿莘王) 10(401)에 전승(戰勝)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고쳐지었고 용주사를 세울 당시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과 요사(寮舍) 3동이 지어졌다고 한다. 보적사는 21칸 반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1902년 약사전을 허물고 새로 지었으며, 1987년에 고쳐 지으면서 대웅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와 약사여래, 지장보살을 모셨고, 요사 2동과 3층 석탑이 있다

<보적사>

 

  <보적사>라는 이름에는 재미난 유래가 전해지는데 옛날 삶이 궁핍한 노부부가 쌀 두되만 남게 되자 구차하게 굶어 죽느니 부처님께 공양하기로 마음먹고 공양 후 집에 돌아오니 곡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이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978년 세마사(洗馬寺)로 명칭을 바꿨다가 1996년 보적사로 다시 환원하였다

<보적사 대웅전 삼존불>

 

  동문에서 북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그쪽은 공사 중으로 길이 끊어져 다시 세마대 정상으로 올라와 서남 방향으로 내려오니 암문이 나온다. 이 암문(暗門)도 동문과 마찬가지로 평거식 성문으로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이 문은 1804(순조 4)에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서문을 폐쇄하는 대신 새로 지은 성문이다. 1985년에 정비하여 복원하였고, 2010년에 성문을 개거식에서 평거식으로 복원하였다

<독산성 암문>

 

  독산성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성이다.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하였다가 환궁하던 중 장마 때문에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백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그로부터 30년 뒤 풍수지리 문제로 독산성 철거문제가 야기되지만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히려 성을 더 고쳐 쌓도록 명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독산성이 갖춰졌다고 한다

<독산성 북문(외곽)>

 

 

  암문에서 남문을 거쳐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서 산문으로 내려온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은 쌀로 말을 씻겨 물이 충분한 것처럼 장면을 연출하여 왜병의 공격을 방어했지만, 그 보다도 그 위기를 모면한 것은 천운(天運)이 따른 것 같다. 다시는 전쟁이 발발해서도 안 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유비무환(有備無患)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물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소홀할 수 없다

<독산성 사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