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해파랑 길은 해피한 길(여덟 번째)

와야 정유순 2017. 9. 27. 09:31

해파랑 길은 해피한 길(여덟 번째)

<삼척노곡항동해추암, 2017. 9. 2324>

瓦也 정유순

   삼척시 원덕읍 노곡1리에 있는 노곡항의 아침은 말 그대로 고요이다. 어촌정주어항으로 조그만 한 어항이지만 아침 햇살이 비치는 모습은 찬란하다. 깨끗이 손질하여 바닷바람에 말리는 우럭도 하늘을 나는 연() 같다. 석류나무에는 주먹만 한 석류(石榴)가 스스로 벌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폴 발레리(18711945)는 시 석류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 빛나는 파열은/내 옛날의 영혼으로 하여금/자신의 비밀스런 구조를 꿈에 보게 한다.”라고 읊었는지도 모르겠다.

<노곡항>

<우럭>

<석류>


   마을 뒷산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가는 길마다 길이 끊기거나 군부대로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두세 번 나갈 길을 찾아보다가 뒤로 돌아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길로 나온다. 계절이 가을이라고는 하나 아침나절부터 복사열로 달군다. 그러나 맑고 티 없는 하늘은 미세먼지로 흐렸던 여름날보다는 더 상큼하다. 화살표로 표시된 해파랑 길을 따랐더라면 새 길을 찾으려고 헤매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임원항 경계로 들어선다.

<아스팔트 길>

<임원항 이정표>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에 있는 임원항(臨院港)은 당초에는 시멘트 적출이 주 기능이었으나, 지금은 국가어항으로 더 중요하다. 어시장 남쪽으로 진입하여 수조에서 팔딱거리는 생선들을 구경한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여행하다 들려 대게를 배불리 먹었던 가게가 지금도 있다. 이곳은 비교적 싼값에 활어 회를 즐길 수 있는 곳이고, 다른 건어물도 싸고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임원항>

<임원항 어시장>


   임원항 뒤편 남화산 정상에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부인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수로부인헌화공원과 남화산해맞이공원이 있는데, 유료승강기를 만들어 놓고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입구를 막아버렸기 때문에 그냥 지나친다. 임원마을을 가로지르는 임원천을 건너 도로로 나와 다시 지루한 아스팔트길을 계속 걷는다. ‘해신당공원어촌민속전시관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해신당공원이 있는 신남항이 가까이 온 것 같다.

<유료 승강장>

<입구가 폐쇄된 남화산 해맞이공원>


   신남항 쪽으로 하여 위로 올라가면 해신당공원이다. 해신당공원은 동해안 유일의 남근숭배민속(男根崇拜民俗)이 전해 내려오는 곳으로 어촌민의 생활을 느낄 수 있는 어촌민속전시관과 해학적인 웃음을 자아내는 남근조각공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해학적인 남근조각들이 공원 요소요소에 진열돼 있어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또한 신남리 앞바다의 푸른 물결은 애바위전설의 애절한 사연과 어우러져 동해안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해신당공원 입구>

<해학적인 남근상>

<남근상>


   애바위전설은 결혼을 약속한 처녀 총각이 해초작업을 위해 배로 해변 바위에 처녀를 내려놓고 돌아왔는데 갑자기 강풍으로 거센 파도가 밀어닥쳐 처녀는 물에 빠져 죽는다. 이후 이 처녀의 원혼 때문에 고기가 잡히지 않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한 어부가 바다를 향해 오줌을 갈겼더니 풍어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이면 나무로 실물모양의 남근을 깎아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매년 정월대보름과 음력 10월 첫 오일(午日)에 남근을 깎아 매달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해신당>

<처녀동상>

<남근 장승>

<남근석 공원>


   해신당공원의 자연생태공원에는 밤송이가 익어 알밤이 떨어진다. 붉은 열매 피라칸타도 농염을 주체하지 못한다. 해신당공원을 나와 다시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막으로 올라가면 어촌정주어항인 길남항이 보인다. 해신당에 대한 정성어린 제사 덕분인지 바라보이는 동해바다가 맑고 푸른 물결을 일렁이며 평화로움이 끝없이 펼쳐진다. 바람이 만들고 물결이 다듬은 바위들도 평화롭다. 길남항 앞의 월미도는 일출이 일품이라고 하는데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피라칸타>

<길남항>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장호항은 삼척에서 남쪽으로 25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용화해변과 함께 백사장을 자랑한다. 흰모래사장과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깨끗한 바닷물은 내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명경지수(明鏡止水)로다. 2017926일 개장 예정인 삼척해상케이블카는 시험운행을 하는지 가끔씩 줄에 매달려 해안을 가로질러 하늘을 난다. 용화해변에서 용화역궁촌역까지 운행하는 삼척해양레일바이크를 타고 발품을 줄일까 해보았으나 이미 표가 매진되어 고개를 하나 넘어 초곡해변으로 간다.

<장호해변>

<장호항과 삼척해상케이블카 타워>

<용화해수욕장과 장호항>


   초곡항을 가는 길목에는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공원이 있다. 황영조(黃永祚, 19703)는 삼척시 근덕면 초곡리 출신으로 1992년 하계올림픽 바르셀로나마라톤 경기에서 급경사로 난코스인 몬주익언덕에서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경쟁선수들을 큰 차이로 벌리고 1위로 골인한 뒤 쓰러져 몬주익의 영웅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 이후 56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마라톤 사상 첫 금메달이다. 이곳도 밖에서만 구경하고 레일바이크 철로 위를 걸어본다.

<황영조 기념공원>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레일바이크>


   해변의 인어상이 있는 초곡휴게소에는 레일바이크를 타고 가던 손님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북적거린다. 지난여름에 피서객으로 붐볐을 초곡해변과 원평해변을 지나 궁촌리에 들어선다. 궁촌리는 고려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과 그의 아들 왕석과 왕우 3부자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일명 궁촌왕릉(宮村王陵)으로 불리며, 공양왕이 옮겨왔다 하여 마을 이름이 궁촌리가 되었다.

<초곡휴게소의 인어상>


   공양왕은 고려시대 최후의 임금(재위 13891392)으로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 의해 창왕(昌王) 다음으로 실권이 없는 왕위에 오른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에는 덕이 없고 어리석다라는 이유로 폐위당하면서, 고려는 34475년 만에 망한다. 공양왕은 폐위된 뒤 원주(原州)로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뒤에 삼척에서 살해되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경기도 고양시에도 공양왕릉이 있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고증이 어려운 것으로 추정되며, 이 능에서는 근덕면 봉찬회에서 매년 3월에 날짜를 택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공양왕릉>


   근덕면 부남리로 이동하여 해변 길로 접어들었으나 군사용 철조망에 막혀 되돌아온다. 그래도 철조망 사이로 부남 제2 해금강이라는 바위가 있어 마음을 달랜다. 올라오는 길에는 강남의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南橘北枳 : 남귤북지)”가 되었다는 탱자가 노랗게 익어간다. 신맛이 강해 보기만 해도 침이 절로 나오는 탱자는 나무의 뾰족한 가시가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고 믿어 남부 지방에서는 울타리로 많이 심기도 했다.

<부남리 해금강>

<탱자>


   부남해변에서 덕산항으로 이동하니 해가 많이 기운다. 오늘이 추분(秋分)으로 낯과 밤의 시간이 거의 같다는 절기이다. 덕산항에서도 부남해변으로 가는 해변길이 철조망으로 막혀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누구의 말대로 우리나라의 전망 좋은 곳은 군대 초소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덕산항은 1971년부터 국가어항으로 관리해 오다가 최근에는 어획량도 줄고 어선 수가 줄어 지정해제 위기에 빠졌다고 한다. 좌우에 설치된 부두를 돌아보고 나오니 덕산항 바다 위로 석양이 붉게 물들어 온다.

<출입을 막은 철조망>

<닫혀버린 해변길>

<덕산항의 저녁노을>

   오늘의 출발지인 덕산·맹방해변으로 이동하는데 차량진입을 막는다. ‘6회 이사부장군배 삼척 전국 철인3종 경기대회가 덕산해수욕장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덕봉대교를 건너 마읍천 하류를 따라 덕산해변으로 가는 도중에도 수영을 마친 선수들이 사이클의 페달을 밟으며 빠르게 달린다. 덕산해수욕장에서는 철인3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의 수영경기가 한창이다.

<제6회 이사부장군배 삼척 철인3종 대회>


   영어의 트라이애슬론(triathlon)철인3종경기는 수영, 사이클, 마라톤의 세 종목을 휴식 없이 연이어 실시하는 경기로 극한의 인내심과 체력을 요구하는 경기이다. 이 경기의 타이틀이 된 이사부(異斯夫)는 내물왕 4대손으로 신라 지증왕 13(512)에 지금의 독도인 우산국을 정복하여 신라 영토에 편입시킨 장군으로, 독도와 관련하여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수영경기>


   평소에 구경할 수 없는 귀한 철인3종 경기를 보고 덕봉산(德峰山, 54) 아래로 마읍천 하구를 건널 수 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맹방해변으로 가려고 했으나 흔적만 남아 있어 그냥 뒤돌아와 다시 덕봉대교를 건너 맹방해변으로 간다. 맹방해수욕장은 30여 년 전 여름 가족과 함께 피서 왔던 곳이라 새삼 반갑다. 그 때에는 마읍천 하구에는 아침마다 고깃배들이 들어와 선상 어시장이 열렸는데, 지금은 그런 흔적들이 보이질 않는다.

<덕봉산>

<덕산과 맹방해변을 이어주던 외나무다리>

<덕봉대교>


   맹방해수욕장은 시원하게 뻗은 명사십리(明沙十里)이다. 상맹방 쪽에는 삼척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서울 성북구수련원이 있어 성북구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한다고 한다. 백사장과 솔밭사이로 난 보도를 따라 가다가 맹방해변 삼림욕장으로 들어간다. 하맹방을 지나 상맹방길의 마을 어느 집 울타리 옆의 사과와 석류에 눈이 팔려 한참을 걸어가다가 또 길이 막혀 되돌아선다. 어느 집에는 꽈베기처럼 꼬아 만든 향나무가 애처롭게 서있다.

<맹방해수욕장 입구>

<마읍천 하구>

<맹망해수욕장 명사십리>

<맴방해변산림욕장>

<향나무>


   별수 없이 버스에 올라 맹방에서 삼척으로 올라오는 고개까지 이동한다. 남으로는 걸어왔던 명사십리 맹방해변이 펼쳐지고, 북으로는 삼척의 오십천 하구가 보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삼척을 향하여 다시 걸음을 뗀다. 경관 좋은 해변 골짜기마다 편의시설이 들어선다. 삼척시 오분해변은 실직주(悉直州, 삼척 옛 지명) 군주로 임명된 이사부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첫 출항한 지역이라고 하는데 지명만 확인하고 지나친다.

<남쪽의 맹방해변>

<북쪽의 삼척항>


   오분교차로를 지나 시멘트공장에서 시멘트를 운송하는 컨베이어시스템벨트가 공중으로 오십천을 가로질러 삼척항으로 연결되어 있다. 삼척오십천은 삼척시와 태백시 경계인 백병산(白屛山, 1,259m)에서 발원하여 동해안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하천의 곡류가 매우 심하여 이 하천의 하류에서 상류까지 가려면 물을 오십 번 정도 건너야 한다는 데서 오십천으로 붙여졌다고 한다. 오십천 유역은 일제강점기 이후 탄광의 갱목으로 쓰기 위해 아름드리나무를 남벌하고 탄광의 폐수가 흘러들어 황폐화되었으나, 지금은 원래대로 많이 복구된 것으로 보인다.

<삼척의 시멘트공장>

<삼척 오십천>


   사자상이 서있는 삼척교를 건너 육향산으로 향한다. 육향산(六香山, 25)은 삼척시의 동쪽 정상동에 있는 산으로 죽관도(竹串島)의 육향대(六香臺)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 산은 본래 정라진 앞바다에 있는 죽관도라는 섬이었는데, 삼척항을 만들면서 육지와 연결되고 이름이 육향산으로 바뀌었다. 조선 때에는 동해안의 해상방위를 총괄했던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이 있었으며, 정상에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육향정(六香亭) 등이 있다.

<삼척교>

<육향정>


   척주동해비는 1661(현종2)삼척부사 허목(許穆)이 동해의 풍랑으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많아 이를 막고자 동해를 칭송하는 글인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篆書體)로 비문을 새겨 바닷가에 세워서 풍랑을 진정시킨 비석으로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한다. 그 뒤 비석이 유실된 것을 1710(숙종 36)에 삼척부사 박내정(朴來貞)이 유실한 비석의 탁본으로 옛 비석과 같은 비석을 다시 만들어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

<척주동해비각>


   대한평수토찬비 역시 현종 때 삼척부사로 와 있던 허목이 동해비와 같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중국 형산(衡山)의 우제(禹帝)가 썼다는 전자비(篆子碑)에서 48자를 선택하여 목판에 새기어 군청에 보관해 오던 것을 고종 광무 8(1904)에 비석에 새겨 세운 것이다.

<우전각-대한평수토찬비각>


   오후에는 먼저 삼척시 성내동에 있는 죽서루로 향한다. 죽서루(竹西樓)는 누각으로 보물 213호로 지정되었으며, 관동팔경 중의 하나이다. 다른 관동팔경의 누()와 정()이 바다를 끼고 있는 것과는 달리 죽서루만이 유일하게 강(오십천)을 끼고 있다. 죽서루의 건립 시기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고려 원종 7)에 이승휴가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그 뒤 조선 태종 3(1403)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죽서루>


   누()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7·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작지붕이다. 이곳의 특징은 기둥을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춰 직접 세운 점이 특이하다.

<죽서루 주춧돌과 기둥>

<죽서루 처마>


   죽서루 좌측에는 선사시대 암각화와 용문바위가 있다. 암각화는 바위나 절벽 또는 동굴 내의 벽면에 물상(物象), 기호(記號), 성혈(性穴) 등을 그리거나 새겨 놓은 것을 말하는데, 죽서루 선사 암각화는 바위 위에 여성생식기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은 성혈암각이다. 성혈은 풍요·생산·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칠월칠석날 자정에 성혈 터를 찾아가서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아놓고 치성을 드린 다음 그 좁쌀을 한지(韓紙)에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암각화>

   용문바위는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 사후에 호국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다가 어느 날 삼척의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의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용문바위이다. 그 후 용문바위는 아름다움과 장수, 다복의 기원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용문을 드나들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용문바위>


   죽서루를 둘러보고 삼척항으로 이동한다. 옛날에는 정라항으로 불렀던 삼척항은 오십천의 맑은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끝자락에 있다. 한때는 동해의 최대 항구 중 하나로 수많은 어선들이 모여들었고,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군사기지로 중요한 곳으로 삼척항의 화려했던 모습들을 옛 영화로 간직한 채 강원 산간지방에서 생산하는 시멘트를 하역하는 항구로 기능하고 있다. 하역시설로는 시멘트 선적기가 제123부두에 설치되어 있다.

<삼척항>


   항구 부두를 따라 마지막 지점에서 동네 골목길을 빠져나와 이사부광장을 지나 새천년해안도로로 접어든다. 바다 멀리에는 어업 양식을 하는지 가두리 두 개가 원을 그리며 떠있다. 한 낯의 해안 길은 주말을 이용해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한가한 편이다. 해안가 바위 위에는 초소 같은 하얀 구조물이 동해를 응시한다. 팔레스호텔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언덕 마루에는 소망의 탑이 기다린다.

<동해의 가두리양식장>

<북으로 올라가는 해파랑 길>


   소망의 탑은 동해의 이른 햇살에 깨어난 우리는 희망을 품고 근심걱정을 불태우고 용서와 사랑으로 마주보고 소리쳐 웃어 보세라는 삼척시민들의 염원이 담긴 탑으로 옆면은 미끈하고 아름다운 돌로 채워져 있고, 그 앞은 소망의 종이 매달려 있다. 200111일에 세워진 이탑은 누구나 소망의 종을 세 번 치면 소망하는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나도 세 번 타종해 본다.

<소망의 탑과 종>


   새천년해안도로를 따라 다시 북으로 걸으면 비치조각공원이 나온다. 여름철은 물론 4계절 가리지 않고 관광객이 찾아와 조각 작품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인기를 더한다. 정자에서는 구성지고 활력이 넘치는 어느 70대 청춘 노래공연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흥을 돋운다. 또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도로변에는 두꺼비바위가 앞의 초소를 향해 왕방울 눈을 굴린다.

<비치조각공원>

<70대 청춘의 노래>

<두꺼비 바위>


   삼척시 경계를 지나면 동해시 추암이 나온다. 추암(湫岩)한국의 가 볼만한 곳 10으로 선정된 해돋이 명소이고,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화면으로 나오며, 영화 겨울연가로 유명해진 곳이다. 1463(세조 9)에 한명회(韓明澮)가 강원도체찰사로 있으면서 이곳 경승에 취해 능파대라 하였으며, 그 아름다움은 동해 남부의 해금강(海金江)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추암 입구>

<기암괴석>


   능파대(凌波臺) 앞에는 어림짐작으로 높이가 약10쯤 되는 바위가 솟아오른 촛대바위가 오늘을 압권 한다. “옛날에 추암 해안에 한 남자가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소실을 얻게 되어 본처와 소실 간에 투기가 빚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두 여자의 시샘이 급기야 하늘을 노하게 하여 벼락으로 징벌을 가해 남자만 남겨 놓았는데, 지금의 홀로 남은 촛대바위가 그 남자의 형상이라고 한다.

<촛대바위>


   촛대바위에서 바위 사이로 돌아 나오는데 해암정이 나온다. 해암정(海巖亭)1361(고려 공민왕 10) 삼척 심 씨의 시조인 심동로(沈東老)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한 정자라고 한다. 동로(東老)라는 이름은 왕이 낙향을 만류하다가 동쪽으로 간 노인이라는 뜻으로 하사한 이름이란다. 해암정은 강원도 유형문화재(63, 19795)로 지정되었으며 삼척 심 씨(三陟 沈 氏)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해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