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사와 불갑사의 상사화는 피었는데
(2017년 9월 20일)
瓦也 정유순
그리움에 지치다 잎은 지고 꽃대만 올라와 꽃을 피우는 상사화를 보러 가기 위해 새벽길 나와 버스에 몸을 싣고 가는데, 평일이라 교통체증이 없이 버스는 먼저 영광 법성포에 당도한다. 꽃무릇을 보러 가기 전에 법성포에 있는 숲쟁이꽃동산과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를 먼저 둘러보기 위해서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통해 올라간 ‘숲쟁이꽃동산’에서 바라보이는 법성포시내와 백수해안의 주변경관은 순간 예기치 못한 뜻밖의 선물이다. 그러나 찾아오는 발길이 아주 뜸해서 그런지 길에 풀이 무성하다.
<숲쟁이꽃동산>
<영광대교와 백수해안>
쥐부터 돼지까지 12지신석상을 차례로 세워놓은 길을 따라 내려오면 백제불교 최초도래지가 나온다. 384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법성포에 처음 발을 디디면서 백제에 불교가 전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부용루, 탑원, 간다라유물전시관, 4면대불상을 건립하였으며, 부용루 벽면에는 석가모니의 출생과 고행의 모든 과정을 간다라 기법으로 조각해놓았다.
<12지신석상>
<탑원>
<부용루>
<4면대불상>
한국의 전통 사찰과는 달리 인도의 간다라 미술 양식과 유물을 볼 수 있어 이채롭다. 4면대불상은 공사 중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먼발치로 눈인사만 나눈다.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가리킨다.
다시 ‘숲쟁이꽃동산’으로 넘어 법성포 시내로 들어와 굴비정식으로 풍성한 오찬을 즐긴다. 남도 음식이야 어디를 가든 입에 쩍쩍 들어붙는 맛이 있는 음식이지만 법성포의 굴비정식은 간간한 입맛에 밥을 두 공기 이상 먹게 하는 밥도둑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게 많이 배불리 먹었지만 돌아서면 배가 고픈 것 같다.
<굴비정식>
포만감(飽滿感)은 버스에 올라가자마자 졸음을 불러온다. 함평군 해보면 모악산(339m)자락에 들어선 용천사 입구로 가는 동안 졸음 때문에 차창을 통해 바깥구경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꽃무릇은 분위기를 압도한다. 해보면 광암리 ‘꽃무릇공원’은 용천사를 중심으로 30여만 평의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란다. 호젓한 도로변도 온통 빨간 꽃무릇이고, 논두렁과 광암리마을 지나 저수지 둑을 빨갛게 물들이고 물속까지 꽃무릇이 넘실댄다.
<꽃무릇공원>
<꽃무릇 군락>
<광암리저수지>
꽃무릇은 석산(石蒜)으로도 불리며 상사화와 같은 속이지만 다른 식물이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상사화라고 불리는 점은 같으나 엄연히 다른 식물이고 꽃이 피는 시기도 상사화는 8∼9월, 꽃무릇은 9∼10월이다. 꽃무릇은 보통 9월 중순 정도부터 피기 시작하여 10월 초순 정도까지 꽃을 피운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꽃이 떨어진 다음 짙은 녹색의 잎이 나오며 다음해 봄에 시든다. 특히 꽃무릇은 그 뿌리를 가루로 말려 단청이나 불교탱화의 방부제로 사용하여 사찰 근처에 많이 심어져 있다.
<꽃무릇(석산)>
인도에서는 코끼리 사냥을 할 때 독화살에 발라 사용할 정도로 독성이 강한 꽃무릇도 애절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스님을 짝사랑하던 여인이 상사병에 걸려 죽은 후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절집을 찾은 아리따운 처녀에 반한 젊은 스님이 짝사랑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여튼 꽃말처럼 애틋한 그리움만 쌓이고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이다. 그래서 더 독한가?
<꽃무릇(석산)>
<꽃무릇(석산) 출렁다리>
모악산자락을 따라 용천사로 가는 길목도 여기저기 꽃무릇 천지다. 나무 숲 그늘 아래도 꽃무릇만 보인다. 나지막한 돌담 아래 살포시 내민 꽃무릇의 모습도 정겹고, 돌담 너머 숲 자락에 무리지어 피어난 풍경도 마냥 예쁘다. 용천사 꽃무릇 군락지 중 절집 뒤편, 대숲 산책로. 푸른 왕대밭 아래에 융단처럼 깔린 꽃무릇 군락이 이색적이다. 공원 안에는 꽃무릇과 함께 벌개미취, 쑥부쟁이 등 다른 야생화도 더불어 피어나 구색을 맞추려고 하나 꽃무릇에 치어 전혀 생색을 내지 못한다.
<돌 담장 밑의 꽃무릇(석산)>
<숲속의 꽃무릇(석산)>
<닥풀꽃>
용천사는 백양사의 말사이다. 600년(백제 무왕 1) 행은(幸恩)이 창건하였으며, 절 이름은 대웅전 층계 아래에 있는 용천(龍泉)이라는 샘에서 유래한다. 이 샘은 서해(西海)로 통하며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645년(의자왕 5) 각진(覺眞)이 중수하고, 1275년(고려 충렬왕 1) 국사 각적(覺積)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세조와 명종 때 중수하여 큰 절로 성장하였다.
<용천사 대웅보전>
<용천사대웅전현판단청기>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1600년(선조33)에 중창하였으며, 그 후 1638년(인조16)과 1705년(숙종31)에 중수를 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던 것을 보광전(普光殿) 자리에 대웅전을 새로 세우고, 1996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유물로는 용천사석등과 해시계 등이 전한다. 18세기 때 조성된 후불탱화는 2000년 5월에 아쉽게도 도난당했다고 한다.
<용천사 사천왕문>
용천사지역의 꽃무릇공원은 ‘대한민국 자연보호 100경 중 48경’으로 선정된 지역으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꽃무릇 꽃길이면서 6∙25한국전쟁 당시 격전지로 용천사가 소실되었고 바위에 새겨진 총탄 자국이 그날의 비극을 말해준다. 용천사에서 불갑사까지 이어지는 4km 남짓의 등산로는 꽃무릇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코스라고 하여 길을 나선다.
<한국전쟁 격전지)>
<불갑사로 가는 길목 꽃무릇(석산)>
조릿대가 우거진 숲 사이로도 꽃무릇이 고개를 내밀어 여린 것 같으면서도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유격훈련장 같은 체력단련시설이 설치된 모악산 정상아래 고개 마루를 지나 불갑산 연실봉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구수재에서 불갑사로 내려간다. 오솔길 같은 빨간 꽃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이루어 질 수 없는 그리움이 즐거움으로 변하는 묘한 기분을 느낀다. 남의 슬픈 사연을 은근히 즐기는 악마의 속마음은 아닌지…?
<조릿대 속의 꽃무릇(석산)>
내려오는 내내 꽃무릇은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은 자생력과 번식력이 강하다는 증거이다. 촘촘히 박힌 조릿대 뿌리사이를 뚫고 올라온 꽃무릇은 이미 불갑산의 강자이다. 불갑사 위에 있는 저수지 호안에도 이미 뿌리를 뻗어 잠식해 나간다. 저수지에 비춰지는 하늘의 뭉게구름도 꽃무릇의 붉은 빛에 물드는 것 같다.
<불갑사 위 저수지>
<저수지 주변 꽃무릇(석산)>
<꽃무릇(석산)>
불갑산(516m)은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원래 모악산으로 불리었으나, 백제시대에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 지은 사찰이 불갑사이며 이후 불갑사가 있는 모악산을 불갑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 정상에는 커다란 암괴(巖塊)로 이루어졌는데 마치 연꽃 열매를 닮았다 하여 이름이 연실봉이라고 한단다. 불갑산은 참식나무 북방한계선 군락지(천연기념물 제112호)이며 멸종위기식물인 ‘대홍난’ 등이 서식하여 생태계변화관찰지역으로 지정되어 관리되는 지역이다.
<불갑산의 하늘>
<불갑산 가는 길목>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384년)때 인도스님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제일 처음 지은 불법도량이라는 점을 반영하여 절 이름을 부처 불, 첫째 갑, 불갑사라 하였다고 한다. 온통 도배해 버린 것 같은 꽃무릇에 취해 불갑사 대웅전의 아름다운 문살무늬도 외면하고 한껏 취해본다.
<불갑사 일주문>
<불갑사 대웅전>
<꽃구경 온 차량들>
평일인데도 꽃구경을 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한참을 걸어 나온 일주문 밖에서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길목에는 꽃무릇 축제가 이어지고 나들이 나온 차량들도 거북이걸음이다. 오늘 아침 친구로부터 SNS를 타고 전해온 <오늘아침 가을바람에(작자미상)>라는 시 구절이 따뜻하게 가슴으로 다가온다.
오늘아침 가을바람에
(작자미상)
꽃잎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차창 바람 서늘해
가을인가 했더니
그리움이더라…
그리움 이녀석
와락 안았더니
눈물이더라…
세월 안고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더니
아~빛나던 사랑이더라…
<꽃무릇(석산)>
<꽃무릇(석산)>
<꽃무릇(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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