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해변 길을 걸으며(샛별길)
(꽃지해변∼황포, 2017년 9월 21일)
瓦也 정유순
방포항 사이에 있는 할애비·할미바위를 노을 진 아름다운 석양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침나절에 맑고 높은 가을하늘을 지붕 삼아 약5㎞길이 펼쳐지는 꽃지해변으로 들어선다. 예부터 백사장을 따라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나 ‘꽃지’라는 예쁜 이름을 얻었다. 여름 내내 향내 피우던 해당화도 가는 여름이 못내 아쉬웠던지 한 송이 꽃은 아침햇살에 얼굴을 붉힌다.
<태안해변길-샛별길 입구>
<꽃지해변의 철늦은 해당화>
마주보며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은 할애비·할미바위는 제철인 코스모스 하늘거림 속에 묻어둔다. 그 곱디고운 꽃지의 모래는 국제꽃박람회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대형주차장과 해안도로 등 해안공원을 만든다고 바람 길을 막아버려 모래밭 위에 거친 자갈들이 시나브로 쌓여 거칠게만 보인다. 꽃지해변 남단에는 대형 모래 채취선에서는 모래를 퍼 나르느라 트럭들이 분주하게 들락거리고, 솔밭 숲속에는 대형 리조트시설이 스카이라인을 가린다.
<코스모스와 할애비 할미바위>
<꽃지해변 도로와 축대>
<꽃지해변>
<모래채취선>
<꽃지해변의 대형리조트>
바람에 허리가 잘린 소나무는 몸을 낮추라고 솔선수범한다. 솔숲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서쪽으로 자라목처럼 길게 뻗은 구릉(丘陵)을 넘으면 잡초가 우거진 묵은 밭을 지나면 조수가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만(灣) 특유의 지형인 병술만이 속살을 들어내놓고 기다린다. 넓게 펼쳐진 갯벌에는 아침나절 늦잠을 자는지 뭇 생명들의 흔적은 눈에 띄질 않고 바닷물 진입을 막은 둑 안으로 큰 민물고기들이 줄을 잇고, 부지런한 강태공은 짜릿한 손맛 보기에 바쁘다.
<숲속해변 길>
<병술만 갯벌>
<병술만 제방 안쪽-민물>
‘병술만’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주둔했던 군사요충지였지만 흔적은 없다. 삼별초(三別抄)는 고려 때 최 씨 무신 정권이 고용한 군인으로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사병이었으나, 몽골이 침입하자 유격전술로 몽골병들을 괴롭혔으며,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몽골과 강화(講和)하고 개경으로 돌아가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며 대몽항쟁을 강화도에서 안면도로, 진도로, 제주도로 주둔지를 옮겨가며 계속하다가 제주도에서 완패 당했다. 그러나 삼별초의 저항은 고려인의 자주 정신을 보여 주었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병술만의 가을>
<병술만의 가을>
뭉게구름은 가을하늘을 보고 살랑거리는 억새에 둥실 떠있고, 갯벌 샛강은 물길을 S자를 그린다. 병술만 갯벌에 그려진 모양들은 자연이 만든 예술이다. 곡선을 그리며 숲 그늘과 어우러진 모래밭은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명암(明暗)이다. 꽃지해변에서 넘어왔던 고개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막아주는 병술만의 병풍이로다. 쭉쭉 뻗은 소나무 사이를 숨바꼭질 하듯 비집고 지나가면 ‘줄밭머리’가 나온다.
<병술만 샛강>
<병술만 어촌체험장. 캠핑장 입구>
<병술만 해변>
<꽃지해변에서 넘어온 고개>
줄밭머리는 신석기시대의 돌도끼와 돌칼 등의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마을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조약돌이 많이 쌓인 돌자갈산이었는데, 간척 등 농지를 개간하면서 야생 줄(부추의 충청도 사투리)이 많이 돋아나서 돌밭에 줄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으며, ‘줄밭이 좋은 바닷가 머리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마을이름이 ‘줄밭머리’라고 한다. 그러나 옛 마을은 형체가 없어지고 외형이 닮은 펜션 두 채만 터를 지킨다.
<코스모스>
<줄밭머리 마을 펜션>
코스모스가 더 아름다운 병술만을 뒤로하고 줄밭머리 마을 끝자락을 돌아서면 샛별해변으로 가기 전에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에 갯골 사이로 연못이 한 개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서리 때만 물이 들어오고 조금 때는 물이 들어오지 않아 자연으로 연못이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그 연못에 연꽃이 많이 피어 방죽을 쌓게 되었는데 그것이 기원이 되어 마을 이름이 ‘연방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방죽은 보이지 않은 채 표지판만 서있고, 그 자리에는 열매가 다닥다닥 붙은 떼죽나무만 자리를 지킨다.
<연방죽 안내판>
푸른 열매를 돌로 빻아서 물에 풀어 놓으면 물고기들이 ‘떼로 기절을 하여 물 위로 떠올라’ 이름이 떼죽나무는 익은 열매로 기름을 짜서 머릿기름이나 등잔불의 기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이 기름의 등잔불은 끄름이 나오지 않아 갓 결혼한 부부의 신방에 사용했다는 이야기 있다. 이와 비슷한 쪽동백도 떼죽나무과에 속하는 것으로 용도가 비슷하다.
<떼죽나무>
파도의 해식(海蝕)작용으로 형성된 암석과 바다 건너에 있는 ‘섬(장고도) 밖의 외딴 섬’이라는 외도(外島)와 눈 맞춤을 하며 스친다. 길옆의 붉은 참싸리 꽃의 도열을 받으며 샛별해안으로 들어선다. 샛별해안은 일직선으로 뻗은 단조로운 편이다. 백사장은 모래와 자갈이 반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샛별’은 자연간척지로 ‘샛벌’로 불리다가 ‘샛별’이 되었다고도 하고, 자염(煮鹽) 생산지로 ‘새벗’이라고 불리다가 “샛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태안해변길 6구간이 ‘샛별길’로 명명된 것도 이곳에서 연유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외도>
<참싸리 꽃>
<샛별해변>
샛별해안을 지나 다시 숲길고개로 접어든다. 고개에는 어느 골짜기이든 잘 자란다고 하여 ‘등골나물’에 ‘골’자를 붙여서 이름이 된 ‘골등골나물’이 마지막 꽃을 피운다. 국사봉(107m)자락 고갯마루 삼거리에서 ‘쌀 썩은 여(礖)’ 푯말을 지나칠 뻔 했다. 혼자 찾아간 전망대는 찾아오는 사람 없어 외로웠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전망대에 올라 하늘색과 바다색이 비슷한 바다가 보이고 그 가운데에 섬 망재가 바다에서 하늘로 가는 고개처럼 외롭게 떠있다.
<골등골나물>
<망재>
이곳의 이름인 ‘쌀 썩은 여(礖)’여의 여(礖)는 썰물 때는 바닷물 위에 드러나고 밀물 때는 바다에 잠기는 바위를 말하는데, 세곡미(稅穀米)를 나르던 배들이 하도 많이 침몰하여 쌀 썩는 냄새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쌀 썩는 여(礖)’이다. 그때 쌀 썩는 냄새는 바람에 다 날려 갔나보다. 고을 수령들이 국고미를 착복하기 위해 선장과 짜고 사고로 위장 보고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일부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는 나라의 운명을 가른다.
<쌀 썩은 여 전망대>
국사봉 자락을 넘으면 황포해변이 보인다. 황포(黃浦)는 홍수로 인해 갯벌(개)에 누런 황토물이 흘러 ‘누런개’로 불리다가 ‘황개’로, 다시 ‘황포’로 바뀌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해안을 따라 설치된 방조제로 인해 민물의 유입이 적어 황토물의 흐름을 볼 수 없다고 한다. 물 빠진 황포항에는 어선들이 발 묶여 있고, 어느 집 담벼락에는 수세미가 영글어 간다. 안면도의 대하(大蝦)축제에 대비한 새우양식장도 바쁘게 돌아가고, 들녘의 벼들도 황금벌판을 만든다.
<황포해변>
<수세미>
<황포항>
<새우양식장>
<황금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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