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여섯 번째)
(보령무창포→홍성남당항→서산부석사까지, 7.12∼13)
瓦也 정유순
‘지초’뿌리로 섞어 만든 ‘진도홍주’와 ‘홍어무침’ 덕분으로 밤새 가쁜 잠을 자고 조반 전에 보령시 성주면에 있는 ‘성주사지’로 답사를 간다.
이 절은 백제법왕 때 처음 창건된 사찰로 오합사라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천여 명의 스님들이 생활했던 가람의 터로 발굴된 이곳은 면적만 약6만6천㎡(약2만여평)의 넓은 부지인데 ‘개망초’가 흰 꽃으로 꽉 차 있고 풀 섶의 이슬은 발목을 적신다.
<성주사지>
성주사는 그 당시 괄시를 받던 민중들의 새로운 시대와 사상을 꿈꾸게 했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주위의 아름다운 산수와 어울려 웅장했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하는데, 뒤뜰에 보수를 하고 있는 불상은 그때 민중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곳에는 석등과 오층석탑 그리고 삼층석탑 세 개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최치원의 유명한 사산비(四山碑)의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가 ‘남포 오석(烏石)’에 오천여자의 글씨로 새겨져 이곳의 웅비했던 모습을 말해 주고 있다.
<성주사지석불입상>
<5층석탑과 3층석탑>
<최치원의 낭혜화상 비문>
무창포해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보령남포읍성과 현청을 둘러본다. 남포읍성은 고려 말 왜구들의 침략으로 ‘천수만’입구를 지키는 중요한 요지였다고 한다. 현청은 읍성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고 중앙의 객사는 초등학교로 되어 있으며 내삼문(동헌출입문)과 문루인 진서루(鎭西樓)가 남아 있다. 오백여 년 전 이곳 현감을 지낸 나의 직계 할아버지께서 근무하셨던 곳을 보니 감개무량하다.
<남포읍성 가는길>
<남포현 관아>
<진서루>
6월 기행 마지막 지점인 ‘무창포해안’으로 간다. 무창포 바다는 썰물과 함께 ‘석대도’로 가는 갯벌 길이 열려 있고, 가까이 있는 ‘닭벼슬섬’에는 나리꽃이 만발하였다. 무창포어항을 거쳐 ‘용두리해안’ 쪽으로 걷는다. 해변의 경찰관서와 소방관서 그리고 주변의 숙박시설과 횟집들은 이곳을 찾아올 손님맞이에 바쁘다. 몇 개의 바위언덕과 솔밭 길을 넘고 걸으며 남포방조제를 건너뛰니 바로 대천해수욕장이다.
<석대도로 가는 무창포해변>
<용두리 해변>
<무창항 등대>
남과 북으로 길게 늘어선 대천해수욕장은 양쪽 끝에 언덕이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모래도 참 곱다. 그러나 그 많던 소나무는 듬성듬성 서 있고 그 자리에는 건물들이 들어섰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편하게 지내다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들어선 건물들이 바람 길을 막으면 해안은 어떻게 변할까 걱정도 해 볼 필요가 있다. ‘머드축제’를 겸한 손님맞이에 이곳도 바쁘긴 매 한가지다. 한(大)내(川)를 따라 시내에 들어와서 점심으로 오전을 마무리 한다.
<대천해수욕장>
<대천항>
“전쟁과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해체되어 가는 농촌사회의 세태를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고향을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고향의 의미와 따뜻한 인간애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이문구의 소설 <관촌수필> 무대인 ‘보령 관촌마을’로 간다. 마을은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지만 생가는 사람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게 적막하다. 울타리에 기대어 피어 있는 ‘능소화’는 모기에 쫓겨 쓸쓸하게 돌아가는 나그네의 심정도 모르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관촌마을 송림>
대천방조제를 뒤로하고 주교면에 있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의 묘(墓)를 찾아간다. 묘는 잘 정돈된 가족묘역에 자리하고 있고 안내판에는 토정의 이력과 가계도가 보기 쉽게 그려져 있다.
<토정이지함 유상>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조선 중기의 학자와 문신 또는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고, 또 일반적으로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근거는 없다고 한다.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 해박하였으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개발론’과 ‘해외통상론’을 주장했던 것으로 보면 실학적 사상을 가진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인물 같다.
<토정 이지함 묘>
토정비결로 잘못 알려져 혹시 묘(墓)자리가 명당인줄 알고 전국에서 풍수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이 찾아온다고도 하는데 자고로 ‘명당(明堂)이란 후손이 자주 많이 찾아오면 명당이고, 찾아오지 아니하면 흉당(凶堂)이다’라고 감히 주장한다. 누구든 열심히 조상의 묘를 찾아간다면 보잘 것 없는 묘(墓)자리도 명당이 될 수 있다.
<토정 이지함가의 묘역>
묘역을 나와 오천면 오포리를 지나 영보리로 향한다. ‘갈매못’이란 천주교 성지 안내판이 눈에 보인다. 해안가에 있는 ‘갈매못순교성지’는 1866년 3월 30일 병인박해 때 체포된 프랑스선교사인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등이 이곳에서 참수되었는데, 유해는 현재 명동 성당 지하실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다음 달에 방한하게 될 ‘프란치스코’교황의 방문 준비에 여념이 없다.
<갈매못순교성지>
성지를 나와 ‘오천항’ 쪽으로 행보를 계속한다. 항구에는 출어를 끝낸 어선들이 닻을 내리고 서로 이마를 맞대며 하루를 정리하는 것 같다. 항구 위쪽으로 나지막한 석성인 ‘충청수영성’이 보인다.
<충청수영성>
‘보령오천성’으로도 불리는 이 성은 1509년에 수군절도사 이장생(李長生)이 서해를 통해 침입해 들어오는 적을 감시하고 물리치기 위하여 돌로 성을 쌓았다고 한다. 축성 당시에는 사방에 4대 성문이 있었고, 동헌을 포함해 영보정(永保亭) 대섭루(待燮樓) 관덕정(觀德亭) 능허각(凌虛閣) 등의 많은 건물이 사라졌고 서문인 망화문(望華門)을 비롯해 진휼청(賑恤廳)과 장교청(將校廳)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망화문은 화강암으로 만든 ‘홍예문’인데 누각은 간데없고 가운데 돌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진휼청>
특히 천하 명승으로 알려진 영보정(永保亭) 만이라도 고증을 바탕으로 잘 복원했으면 좋으련만 관심과 예산이 없는지 잡초만 무성하게 옛터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성곽 가운데로 도로가 나는 바람에 ‘수영성’이 둘로 나누어져 있어서 무척 아쉬움이 남는다.
<충청수영성 안내도>
밤새 내리던 비는 새벽에 그친다. 감긴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만수산무량사(萬壽山無量寺)로 식전 탐방을 한다. 천왕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석등과 오층탑 그리고 한가운데 듬직하게 앉은 2층 전각인 ‘극락전’이 옅은 운무와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무량’(無量)이란 셀 수 없다는 말 같다.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곳이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지향하는 곳이 바로 이곳 무량사인 것 같다.
<무량사 극락전과 5층석탑>
그리고 이곳은 매월당김시습이 말년에 몸을 의탁한 곳으로 포근함이 어머니 품속 같다. 시대를 잘못 만난 수재 매월당의 초상화는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세상을 미워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냉소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때 맞춰 오층석탑 아래엔 떡두꺼비가 반갑게 맞이한다. 오솔길 철조망 넘어 ‘매월당 부도비’ 뒤에는 세월의 풍상을 몸으로 때운 소나무가 택견을 하는 모습으로 부도를 지켜준다.
<김시습초상화>
<두꺼비>
해안으로 가는 길목인 주포면 마강2리 구수동마을에서는 연꽃이 환하게 손짓하며 발목을 잡는다. 불교에서 연꽃이 피는 것은 ‘깨달음이 모두 이루어지는 경지’라고 하는데 심청전에서 심청이 인당수에 빠진 후 연꽃으로 환생하는 것은 이러한 경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한다.
<주포면구수동마을 연못>
어제 마지막지점인 오천면 소성리 ‘보령방조제’를 지나 청북면 학성리 해변부터 길이 아닌 길을 재촉한다. 마을 어느 할머니는 길이 없다고 가지 마라는 것을 뿌리치고 해안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간다. 해안까지 가는 마을길옆에는 무화과나무가 도열해 있고 산에서나 볼 수 있는 다래가 주렁주렁 열려 가을을 기다린다.
<학성리 마을>
물 빠진 해안 갯길을 훔치듯 날카로운 자갈을 밟는다. 발이 빠지는 모래밭은 발걸음을 머무르게 한다. 보령시 북단에는 ‘천북항’이 있고 ‘천북면 굴 단지’가 나온다. 또 바다와 민물을 가르는 ‘홍성방조제’가 나타나고, 홍성군을 알리는 입간판이 서 있다. 홍성 서부면 남당항을 지나쳐 어사리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때운다. 식당 뒤 짓다 만 건물에서 잠깐 오수를 즐긴다. 오후에는 밀물이 들어와 뚝 밑으로 갈 수 없어 아무리 좁은 길이라도 한사람이라도 갈 수 있으면 길을 만들어 간다.
<보령 천북면 굴마을>
<홍성방조제>
해안이 활처럼 휘어졌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궁리항을 지나 ‘서산어리굴젓’으로 유명한 간월도로 간다. ‘간월암’은 바닷물이 들어와 건너가지 못하고 우리는 길을 재촉하여 영주부석사와 창건설화가 똑 같은 ‘서산부석사’로 향한다. 도 문화재(제195호)로 지정된 ‘서산부석사’는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며, 677년(문무왕17)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세우고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극락전 안양루(安養樓) 심검당 무량수각 등의 건물이 있다.
<궁리항>
<간월암>
<도비산부석사>
아담한 체격의 ‘임실치즈’님은 ‘서해안 여섯 번째 걷기’를 마무리하면서 “왔노라! 보았노라! 해 냈노라!”를 외치며 ‘치∼이∼즈’를 길게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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