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세 번째)
(영광 홍농읍 → 고창 흥덕까지, 2014. 4. 26.∼27)
瓦也 정유순
서해안 걷기 두 번째 마지막지점 영광 홍농으로 가기 전에 고창 ‘무장읍성’과 ‘동학농민혁명발상지’를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전봉준 안내판>
사적 제346호로 지정된 ‘무장읍성(茂長邑城)’은 조선조 태종 때 무송(茂松)과 장사(長沙)의 두 고을을 합하여 성과 관아를 새로 만들어 효과적인 왜구방비를 했다고 한다. 읍성은 입구와 남쪽 전면만 석축성곽으로 되어 있고 주변은 토성으로 이루어 졌다.
<무장읍성 전경>
<무장읍성 진무루>
<무장읍성 토성>
성에는 남문인 진무루(鎭茂樓)가 있으며, 성안에는 옛 고을의 풍모를 알 수 있는 객사와 동헌이 보존되어 있다. 객사 옆에는 공덕비 등이 무리 지어 있고 옆의 팽나무는 이곳의 온갖 풍상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무장읍성 객사(송사지관)>
<무장읍성 팽나무와 공덕비>
이어서 공음면에 있는 ‘동학농민혁명발상지’로 향한다. “하늘이 곧 사람이다(人乃天)” 기치 아래 갑오년(1984년)에 조선 천지를 진동 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과 청의 개입으로 비록 미완의 혁명이었지만 이 땅에 근대화로 가는 불씨를 당긴 것은 사실이다.
<동학군 입성 설명>
2014년 4월 26일 영광 계마항에서부터 세 번째 걷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도로변에서 해안으로 가는 길이 없다. 겨우 어느 집 문을 열고 마당과 정원을 가로 질러 내려가는데 그마저도 경사가 급해 쉽지 않다. 아침 고요한 바닷가는 출항을 앞둔 어부들의 그물 손질이 바쁘다. 제철이 아니어서 한가하기만 한 ‘가마미해수욕장’은 마을 언덕으로 삐죽 나온 바위 언덕을 돌아 넘으니 바로 나온다. 게들이 토해 놓은 모래구슬을 밟으며 해안 길을 따라간다. 해안 길가에는 노란유채꽃이 만발하여 환하게 하고 갯바위에는 태공들의 세월 낚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다.
<개마미해변 바윗길>
<개마미항 출어준비>
가마미해수욕장 멀리 돔 모형의 구조물이 보이는데 ‘영광원자력발전소’이다. 고압송전선이 그곳에 입을 대고 있다. 발전소 옆을 지날 때에는 전기울음소리가 윙윙거린다. 만약에 저소리가 멎는다면 우리는 매우 불안할 것만 같다. 그것은 십중팔구 핵사고가 일어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영광원자력발전소>
<고압선>
드디어 전남도계를 넘어 전북 고창군 상하면 구시포 해변으로 발을 내 딛는다. 조개껍질 가루가 모래와 섞여 명사십리가 펼쳐지고 해안의 노송은 펜션 등 숙박시설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바다 건너 ‘위도’가 보인다. 20여 년 전에 선박 침몰로 아까운 생명을 앗아간 그 바다가 혀를 내민다. 휴가 다녀오다 수장된 지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 진도 앞바다의 ‘세월호’ 침몰로 온 나라가 혼수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그때를 생각하는 것은 무슨 심사인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영령들의 명복을 빌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이 먹은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구시포백사장>
구시포를 지나 동오리 해변으로 가는 길은 그리 순탄한 길이 아니다. 큰 언덕이 길을 막고 있어 그 위로 올라가니 지키는 이 없는 군인 초소가 설치되어 있고 녹슨 철조망이 가는 길을 자꾸 가로 막는다. 뻥 뚫린 산길을 쫓아가면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다. 몇 번을 가다 돌아서는 반복 속에 겨우 어렵사리 출구를 찾아내어 철조망을 넘고 가시넝쿨을 해쳐 비좁게 통과한다.
해안의 바위를 몇 구비 돌아 넘으니 이내 평탄한 해변의 실크 같은 백사장이 길게 펼쳐진다. 이곳이 바로 동호리해수욕장의 명사십리다. 백사장 뒤쪽으로는 수백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한여름에도 시원한 휴식처가 될 것 같다. 오르락내리락 하며 지친 다리도 이제 한숨을 놓는다.
<동호해변>
<동호해변 송림>
동호리백사장을 지나니 곰소만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바로 심원면이 시작된다. “호미 한 자루면 바지락 캐서 자식들 다 키우고 대학까지 보낸다”던 아낙은 보이지 않고 갯벌 쪽에 둑을 쌓아 만든 축제식양어장들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풍천장어’의 고장답게 ‘풍천장어 판매’ 간판도 자주 눈에 띤다. 옛날 염전자리는 골프장이 들어 선 것 같다. ‘만돌갯벌체험학습장’부터 태양열을 이용하는 ‘햇빛발전소’, 국제적으로 보호 받고 있는 ‘람사르갯벌습지’를 거쳐 ‘심원면 월산리’까지 걷는다. 갯내음이 바람타고 코끝을 간지럽히는데 철 이른 해당화 한그루는 꽃을 활짝 피어 향을 내 뿜는다. 간장게장정식으로 오늘을 마무리 한다.
<곰소만 갯벌>
<조개채취 가는 모습>
<양식장>
<태양열발전소>
오늘(4.27)은 새벽부터 부산하다. 식전에 선운사 도솔암에 가기 때문이다. 암자를 지나 옆으로 조금 올라가니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크다는 마애미륵불이 있다. 우뚝한 코, 두툼한 입술 그리고 세상을 굽어보며 중생들의 모든 고뇌를 보듬는 듯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도솔암마애미륵불>
조금 내려와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선운사도솔암내원궁’이 있다. 천인암이라는 기암절벽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사이에 자리한 내원궁은 중생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신 곳으로 ‘상도솔암’이라고도 부른다. 이 불상은 고려후기의 불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고 한다.
<도솔천 내원궁>
조금 더 밑으로 내려오니 수령600년 정도로 추정 되는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높이23m의 이 나무는 3개의 줄기로 그 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채 살처럼 퍼져 있는데 이곳의 옛 지명을 따 ‘장사송(長沙松)’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진흥굴이 있어 일명 ‘진흥송’이라고도 한다.
<장사송>
아침 식전 마지막으로 선운사에 들른다. 대웅보전 뒤에 있는 동백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제184호)는 우리나라 북방한계선으로 봄에 핀다하여 춘백이라고도 한다. 미당 서정주는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서 “선운사 고랑으로/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은 아직 일러/피지 않았고/막걸리 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라며 활짝핀 동백꽃을 보지 못함을 달랬다. 그리고 늦여름에 꽃 잔치를 벌이는 선홍빛 꽃무릇(일명 상사화)과 가을의 붉은 단풍으로도 유명하다.
<선운사 동백숲>
시인 최영미도 “선운사에서”라는 시에서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그대가 처음/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 가는 그대여//꽃이/지는 건 쉬워도/잊는 건 한참이더군/영영 한참이더군”하며 ‘꽃을 통해 깨닫게 되는 만남과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다. 그리고 함께한 도반이 이시를 낭송하며 오늘의 시작을 알린다.
<선운사 전경>
조반을 한 후 다시 ‘하전리 갯벌로 나간다. 어제 밤부터 간간히 떨어지던 빗방울은 지금도 반복한다. 곰소만의 갯벌은 우리에게 풍요를 약속하는 것 같다. 저 멀리 우리가 지나가야할 변산반도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하전마을 갯벌>
검단선사의 전설과 소금전시관이 있는 ‘염정마을’을 지나 ‘좌치나루’까지 걷는다. ‘좌치나루’는 고창군 심원면과 부안면을 연결하던 조선시대의 나루터로 꿩이 앉아 있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언덕을 올라와 아래를 내려보니 ‘기수역(汽水域)’이 잘 발달된 ‘인천강’이 보인다. ‘기수역’이란 강물이 바닷물과 서로 섞이는 곳이다. 경제적 생태적 가치는 경작지 환경의 250배에 달하며,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하여 가장 보호 받아야할 자연환경이다. 또한 해수와 담수의 여과장치로서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래서 ‘인천강’은 풍천장어의 산지였다. 지금은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실뱀장어 채취를 위해 그물을 쳐 놓았다.
<인천강 기수역>
<실뱀장어 채취망>
<기수역설명문>
인천강 건너 ‘미당문학관’으로 발을 옮긴다. 입구에는 “나의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미당 서정주의 “자화상”이 눈길을 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시어로 써진 미당의 시는 수백 번 읽어도 언어의 마술사답게 아름답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친일행각과 양지만을 지향하는 행위는 지금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는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 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라고 평 했는지도 모른다.
<미당문학관 입구>
<미당시비-자화상>
<미당생가>
문학관 옆의 미당의 생가를 둘러보고 ‘손화중이 체포된 곳’으로 가는 길옆의 동산은 ‘무서리 내리는 날 노란 국화꽃’을 피워 향기가 진동하던 가을날을 생각하게 한다. 전봉준 김계남과 함께 동학의 장군이었던 손화중장군은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씨 재실로 추정되는 이곳에 숨어 있다가 재실지기의 고발로 체포되어 36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처형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용고개(용현마을)를 지나 상포마을까지 빗속을 걷고 점심을 먹는다.
<손화중 피체지>
비가 더 내리는 오후 길은 질퍽하다. 젖은 길은 온통 진흙 밭이다. 한걸음 내딛기가 힘들다. 부안면을 지나 흥덕면에 있는 국창 ‘만정 김소희(晩汀 金素姬)선생의 생가를 찾는다. 평생을 국악 진흥에 매진했던 분이다. 같이 동행하신 도반 한분께서 흥겨운 우리가락으로 흥을 돋운다.
<김소희 생가>
시간이 가고 오래 걸으니 집이 가까이 오는 것 같다. 걸을 때마다 한걸음 내밀기가 천근이다. 그러나 어쩌랴. 길이 없어도 가야 하는 게 인생이거늘. 길이 없으면 뚫어서 가고, 길이 끊겨도 넘어서 가야한다. 가고 있는 이 길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대충 방향을 잡고 매진하니 흥덕면 목우마을에 당도한다.
우리네 사는 것이 다 그렇지만 매 순간순간이 운명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 된다.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속옷이 젖으면 더 젖을 것이 없거늘 무엇이 두려우랴.
<비 오는 날의 고행>
<목우마을 회관>
그러면서 나의 추억을 만들자. 추억이 없는 여행은 낭비다.
아름다운 추억을 더 많이…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여섯 번째) (0) | 2014.07.24 |
---|---|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다섯 번째) (0) | 2014.07.24 |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네 번째) (0) | 2014.07.24 |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두 번째) (0) | 2014.07.24 |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다(첫 번째) (0) | 2014.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