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융·건릉과 용주사(3)
(2021년 5월 13일)
瓦也 정유순
원시효자 백행지본(元是孝子 百行之本)! 원래 효도란 것은 백가지 행함의 근본인데, 수원·화성 일대가 온통 효심의 고장이 된 데는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해 오면서 부터지만, 사실은 그 언저리엔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일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역적으로 남아 있는 한 정조 자신은 반역자의 아들이었다. 그것은 곧 자신이 반역자의 대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도세자를 비운의 왕자로 만든 당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화성 천도를 꿈꾸었던 것이다.
<수원화성관광안내도>
정조는 한 해에 몇 차례씩 아버지의 능참 길에 오르는데, 때때로 눈물짓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죽어서는 끝내 아버지 곁에 묻혔다. 갸륵한 효성이란 어느 시대 누구에게 들어도 훈훈한 미담이지만 정조의 효성은 깊은 슬픔을 동반한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융·건릉의 능역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그 길로 얼마 안 가 두 갈래 길을 만난다. 오른쪽으로 가면 융릉이고, 왼쪽으로 가면 건릉이다.
<정조대왕능행반차도-화성행궁>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융·건릉은 장조(莊祖)와 경의왕후(敬懿王后)를 합장해 모신 융릉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합장릉인 건릉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입구를 지나 오른쪽으로 향하면 우선 재실(齋室)을 만난다. 재실은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준비하는 곳이다.
<융릉 재실>
재실을 둘러보고 나오면 천연기념물(제504호)로 지정된 ‘개비자나무’가 있다. 생김새가 비자나무와 닮아서 ‘개비자’란 이름이 붙었다. 남해안의 따뜻한 곳에서만 자라는 비자나무와 달리 훨씬 추운 중부지방까지 올라와 서식하는 키 작은 바늘잎나무다. 여러 포기가 한꺼번에 모여 자라기를 좋아하며, 잎이 ‘非’자 형 머리 빗 모양으로 뻗고 주홍빛 열매가 아름다워 정원수로 심는다고 한다.
<개비자나무>
재실에서 나와 우측 숲길을 따라 융릉으로 향한다. 입구인 홍살문으로 들어서기 전인 좌측으로 여의주 모양으로 둥그렇게 파 놓은 독특한 모습의 아름다운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다. 풍수지리 적으로 융릉의 형국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 정조는 융릉이 천장(遷葬) 된 1790년에 능에서 내려다 보이는 용머리 부분에 여의주 모양을 한 연못을 파게 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다른 능에서는 보기 드물다고 한다.
<곤신지(坤申池)>
합장묘인 융릉의 봉분 아랫부분은 12지 신상 대신 목단과 연꽃 문양이 양각된 12면의 병풍석이 감싸고 있다. 난간 석은 없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나지막한 담[곡장(曲墻)]이 둘러져 있다. 석물로는 상석 1좌, 망주석 1쌍,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1쌍, 문인석 1쌍, 팔각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배치되었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정자각·비각·홍살문·재실이 있다. 그리고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參道)가 있고, 길 좌우 양측에 박석(薄石)을 깔아 놓은 것이 특이하다.
<융릉전경>
정조 자신의 무덤은 아버지 능 옆에 마련하고 건릉(健陵)이라 이름 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군왕이 된 후 헌신적인 노력으로 살아 있는 동안 다하지 못했던 효심을 눈물겹도록 펼쳤다. 수원 화성(華城)은 정조의 이상향인 신도시 건설로 새로운 세상을 펼친 곳이요, 아울러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심이 어린 영원한 사부곡의 무대이다. 한마디로 수원은 정조의 지극정성을 영원히 빛나게 승화시킨 곳이다.
<융건릉종합안내도>
그래서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아버지 곁에 묻히고자 했던 뜻에 따라 융릉 근처 동쪽 자락에 건릉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821년 효의왕후가 돌아가시자 건릉에 합장하려고 할 때 능자리가 길지가 아니므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수원향교 옛터에 두 분을 합장하여 모시게 된 것이 지금의 건릉이다. 정조가 처음 묻힌 곳은 알려지지 않다가 2011년과 2012년에 왕릉 규모의 봉분 구역과 유물이 발굴되면서 정조의 초장지로 알려졌다.
<정조 초장지>
<정조 초장지 숲길>
정조는 생전에 선친의 묘 곁에 자신의 묘를 써 달라 유언을 남겼고, 그에 따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옆에 정조의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융릉은 화산의 서남쪽, 건릉은 서북쪽 기슭으로 융릉과 건릉은 모습이 거의 같다. 건릉 입구에 홍살문이 서있고 신도 어도와 정자각이 있다.
<건릉>
<건릉 예감>
건릉은 높은 언덕에 모셔져 있다. 능에는 상석과 망주석,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으며 융릉에는 병풍석이 있고 난간석이 없는 대신 건릉에는 난간석이 있으나 병풍석이 없다. 혼유석에는 면마다 둥근 원을 그리고 매난국(梅蘭菊) 무늬를 새겼다. 모두 서향이라 해질 녘의 능 분위기가 그윽하고, 눈이 오면 또 다른 별천지를 보여주니 눈 내린 경치를 ‘융건백설(隆健白雪)’이라 하여 화성팔경 중 제1경으로 꼽는다.
<건릉신도비>
<융건백설(隆健白雪)-네이버캡쳐>
용주사(龍珠寺)는 융릉과 이어진 화산 남쪽 기슭에 있다. 이곳은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광종 21년(970년)에는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호란(胡亂)으로 소실된 채 숲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을 1790년에 정조가 왕실 이하 팔도에서 시주한 8만 7천 냥을 들여 현륭원의 원찰(願刹)로 지은 절이다.
<용주사 홍살문>
조선 왕조 능침사찰(陵寢寺刹)로는 선조의 아들이며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의 장릉(章陵) 원찰로 1632년 지은 봉릉사(奉陵寺) 이래 158년 만에 지어진 마지막 능침사찰이다. 성리학이 주도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사찰로, 건립 배경에는 부친에 대한 정조의 각별한 효심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용주사 효행박물관>
용주사를 재건할 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불화를 제작할 화원으로 김홍도(金弘道)와 이명기(李命基)를 내정했고, 그해 11월 동지사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직접 견문을 넓히도록 하였다. 1790년 김홍도는 돌아오자마자 2월부터 9월까지 꼬박 216일 동안 용주사 대웅보전의 ‘삼세여래체탱(三世如來體幀)’과 칠성각의 ‘칠성여래사방칠성탱(七星如來四方七星幀)’의 제작을 완성했다. 이 불화의 회화 기법은 당시로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기법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이채로운 결과물을 낳게 한 배경은 무엇보다도 이 화역(畵役)을 지시한 정조의 전진적인 회화관이 결정적 요인이다.
<용주사대웅보전>
용주사는 일반 사찰의 건축 구조와는 사뭇 다른 궁궐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우선 사찰 진입로에 보이는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없다. 일주문 대신 사대부가의 솟을대문 같은 삼문을 두고 사찰 영역을 구획했다. 일주문격인 삼문을 들어서면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천보루(天寶樓)’가 먼저 보이고, 천보루 앞에 작은 5층 석탑 한 기가 가람의 중심을 잡고 있다.
<용주사 천보루>
천보루는 사찰의 전각이라기 보다는 궁궐의 한 건물 같은 웅장한 규모다. 평면에서 보면 천보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자형 요사를 연이어 건축했다. 정면에서 보면 건물의 구조가 한 몸체로 보여 그 규모가 마치 창덕궁 어느 전각을 보는 듯하다. 따라서 용주사의 가람 배치라든가 건축물의 세부 처리 곳곳에서 국가가 경영한 사찰다운 면모가 잘 보인다. 이는 용주사가 융릉의 원찰인 데다 정조의 지휘 감독 하에 지어진 건물이어서 궁궐 규모로 사찰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용주사 천불전>
천보루 아래를 지나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면 화산의 아늑한 봉우리를 배경으로 삼아 단정하지만 당당하게 자리한 대웅보전을 마주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 대웅보전은 정조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 단원 김홍도가 그린 후불탱화가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고색창연하다. 천장에는 화려한 닫집에 용과 봉황 그리고 여의주 장식과 화려한 연등천장이 장엄하다. 석가모니를 모신 삼존불의 조각 솜씨도 작지만 아름답다. 대웅보전은 조선 후기 문화의 작은 보물창고다.(完)
<대웅보전 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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