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 - 융·건릉과 용주사(2)
(2021년 5월 13일)
瓦也 정유순
조선 왕조에서 가장 효성스러운 왕을 꼽으라면 단연 정조(正祖)다. 정조(1752년~1800년, 재위 1776∼1800)의 이름은 이산(李祘)이고,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며,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다.
<정조어진-화성행궁>
1775년부터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수원화성의 용연과 방화수류정>
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등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해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승정원·춘추관·종부시(宗簿寺)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창덕궁 규장각>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강고하게 세력을 구축하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수원화성의 용연수문>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그는 즉위 초부터 문풍이 세상에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인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세도(勢道)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치’는데 주력하였다. 이는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로 이해된다.
<융건릉의 불두화>
그는 학문적으로도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했을 뿐 아니라 예론(禮論)에 있어서도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해 왕권 우위의 보수적 사고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창하면서 신권(臣權)을 주장하는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 북학파(北學派)들과도 학자적 관심을 기울였다.
<건릉 숲길>
그리하여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경학(經學)에 밝은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해 그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검서관들의 신분은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해 ‘서얼통청운동(庶蘖通淸運動)’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수원화성 장안문>
정조는 이와 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 있게 장려해 문운(文運)을 진작시켜나갔다.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해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도 적극 지원하였다. 위항문학(委巷文學)은 조선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중인ㆍ서얼ㆍ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양식으로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도 한다.
<수원화성 화홍문>
정조대의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문예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조선중화의식(朝鮮中華意識)이 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北伐論)의 대의명분 아래 조선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치(禮治)의 실현이라는 당면과제를 국민상하가 일치단결해 수행해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자긍심과 조선 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
<정조의 어정주서백선-네이버캡쳐>
이러한 조선의 고유문화현상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문화의 제반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그림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국화풍(國畫風)’, 글씨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국서풍(國書風)’이 그것이다. 이는 조선성리학의 고유(固有)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도미적성관(掉尾的盛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단원 김홍도의 규장각-네이버캡쳐>
정조가 추진한 개혁은 아마도 화성의 건설로 모아지지 않을까 한다. 화성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이장을 계기로 조성된 성곽이다. 정조는 화성을 무대로 자신이 개혁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시험하는 무대로 삼고자 하였다. 일단 축성 과정에 당시로써는 가장 선진적인 축성 기술을 도입하였고, 정약용(丁若鏞)등 측근세력을 대거 투입하여 주도하게 하였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수원화성 전도>
또한,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국영 농장인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경작을 위한 물의 확보를 위해 축만제(祝萬堤, 일명 서호) 등 몇 개의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선진적인 농법 및 농업 경영 방식을 시험적으로 추진하였다. 통공정책을 통해서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해져 수원 일대 상인들 유치가 쉬워졌다. 화성은 개혁의 시험 무대이자 개혁의 결과물로 응축된 그야말로 정조시대 개혁의 총아였다.
<수원화성 팔달문 앞 지동시장>
<축만제(수원서호)>
그러나 이런 개혁의 산물은 만개하기도 전에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다. 그의 사후에 장용영(壯勇營)이 혁파되고, 정조가 육성했던 세력들이 대거 축출되는 불운을 겪었다. 노론을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의 벌열(閥閱) 세력에 의한 정치, 사회, 경제적 독점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렇다면 정조가 꿈꾸었던 목표나 이상은 무엇일까? 정조는 스스로 군사(君師)로 자처하였다.
<정조 능행길-네이버캡쳐>
정조는 비명에 간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에도 고심하였다.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해 사면해야 하는 갈등을 겪었다. 또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 아래로 이장해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하였으며, 용주사(龍珠寺)를 세워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도를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화성행궁의 혜경궁홍씨 회갑연>
정조의 효심이 담긴 융·건릉은 여주 영릉만큼 크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크기로 비교할 수 없는 기품과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다른 왕릉처럼 엄청난 규모의 석수나 석인상이 없어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묘한 끌림이 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정조는 살아서는 생부 사도세자의 신원(伸寃)과 한을 풀어드리고, 죽어서는 자신도 부모 묘소 부근에 나란히 묻히는 천복을 누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조의 갸륵한 효심에 숙연해진다.
<건릉>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오른쪽에는 월근문(月覲門)이 있다. 정조는 초하룻날마다 이 문을 통해 경모궁(敬慕宮)을 참배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경모궁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헌경왕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창경궁 맞은편 동산인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에 터가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정조가 “이 문을 거쳐 한 달에 한 번씩 전배하러 다니며,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내 슬픔을 풀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창경궁월근문>
<경모궁 석단>
그리고 정조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弘齋全書)>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탁월한 학문적 능력으로 군사의 위상을 확보하여 문화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개혁과 대통합을 통해 백성들의 질서가 잡힌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다.
<홍제전서-네이버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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