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 - 융·건릉과 용주사(1)

와야 정유순 2021. 6. 5. 03:57

가깝고도 먼 길 - ·건릉과 용주사(1)

(2021 5 13)

瓦也 정유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嗚呼, 寡人思悼之子也)!” 이 말은 1776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22대 왕으로 등극하면서 정조(正祖, 17521800)가 천명한 말이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폐서인이 되어 영조의 큰 아들로 10세에 병사한 효장(孝章)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이어 받은 왕위였다. 당시 상황으로는 노론 일색의 신하들에게 내리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정조대왕 불취무귀(不醉無歸)>

 

  정조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고 양주군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방치되어 있던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승격했고, 1789년 수원화성으로 이장하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꿨다. 현륭원이란 이름은 낳아주고 길러주신 아버지에게 융숭하게 대접한다.’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다

<배봉산지도>

 

  융·건릉이 있는 이곳은 화산(花山 또는 華山) 아래에 있던 수원 읍치(邑治)였다. 정조는 당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을 이장하면서 새로운 성을 구축하고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수원읍과 민가들을 북쪽으로 약 8 이상 떨어진 팔달산 아래 지금의 수원으로 상응한 보상과 함께 옮겨 계획도시를 건설하고 읍명을 화성(華城)이라 했다

<융건릉 지도>

 

  그러다가 1899(광무 3)에는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황제가 된 고종이 양고조부(高祖父)가 되는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했다가 다시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하어 능호를 융릉(隆陵)으로 올렸다. 따라서 부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존호도 왕후에서 경의의황후(敬懿懿皇后)로 올랐다. 사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저승에서 알까마는 사도세자는 폐서인이 되었다가 사후에 왕()이 되고 황제(皇帝)까지 올라간 유일한 존재다

<전남 무안군 운남면에 있는 장조황제 동암묘(東巖廟)>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영조(英祖)의 둘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 첫 아들 효장세자(17191728)가 영조 4년에 어린 나이로 요절하고,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는 7년 뒤인 1735(영조 11)에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때 영조 나이는 42세였다. 영조는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朝)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영조 어진-네이버캡쳐>

 

  영조(英祖)는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장수(82)한 왕으로 52년 간 재위했으며, 정성(貞聖)왕후(16921757)와 정순(貞純)왕후(17451805)  2명의 왕비와 정빈(靖嬪) 이씨(16941721), 영빈(暎嬪) 이씨(16961764), 귀인 조씨, 후궁 문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 12녀를 두었다

<영잉군 시절의 영조-네이버캡쳐>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인 정성왕후의 양자로 입적하고 원자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 원자 정호(定號)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라고 한다. 국왕의 사랑과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순조롭게 성장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세자는 매우 총명했고, 부왕의 기쁨은 그만큼 더 컸다고 한다. 그런데 어렵고 늦게 얻은 아들이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과 영조는 왜 틈이 생겼을까

<사도세자 영정-네이버캡쳐>

 

  사도세자가 영유아기를 지나 소년으로 성장하면서 과식으로 인한 비만과 건강악화에 대한 걱정이 늘어났고, 처음에는 사랑하는 걱정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흉을 보거나 나무라는 모습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0세 즈음부터 세자는 경전 공부에는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무예나 잡학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영조가 세자에게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하니, 세자는 망설이다가 싫을 때가 많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융건릉 안내도>

 

  <어제장헌대왕지문(御製莊獻大王誌文)>에는 세자는 어릴 때부터 놀이를 할 때 군대놀이를 많이 하였다. 병서(兵書)를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공법을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였다. 한가한 날이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했는데, 힘깨나 쓰는 무예들도 움직이지 못하는 청룡도(靑龍刀)와 커다란 쇠몽둥이를 1516세부터 자유자재로 사용했다고 기록한다

<융건릉역사문화관>

 

  아들이 글을 열심히 읽어 똑똑한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 영조는 어릴 때부터 식탐이 강하고 체격이 좋으며 무인 기질이 강한 세자를 볼 때마다 사랑이 점점 미움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무() 보다는 문()에 관심 가지기를 바라고, 아들은 그 반대로 가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원대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아들의 재능을 애써 꺾었고, 부자 간의 갈등은 점점 시나브로 깊어 만 간다

<융릉가는 길>

 

  영조는 세자 나이 15세부터 정무능력을 키우기 위해 대리청정을 시킨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정무능력과 수신(修身)에 더욱 불만을 갖게 되고, 결국은 3번의 양위(讓位)파동으로 이어진다. 어린 세자는 이 때마다 긴장하여 석고대죄 하였고,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짓찧은 것이었다. 이런 사건들은 그 간에 누적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이 집약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후 세자는 20세 무렵부터 부왕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신질환이 나타난다

<재실 앞 백송>

 

  정신적 질환은 아버지와 대면을 꺼리는 것으로 까지 악화된다. 영조 31(1755) 약방 도제조 이천보(李天輔) 동궁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된다.”고 아뢴다(4 28).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원인을 의대증(衣帶症)이라고 지적했다. 그 증상은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 옷을 입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재실 앞 앵두나무>

 

  1862(영조 38) 임오년 윤5월의 당시 기록에서도 정축년(1757, 영조 33)무인년(1758) 뒤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발작할 때는 궁중의 계집종과 내시(內侍)를 죽였고, 죽인 뒤에는 바로 후회하곤 했다고 한다. 임금이 그때마다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융릉 향나무>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불행이 되는 결정적인 일은 1775(영조 31)에 발생한 나주 벽서 사건이다. 나주 객사에 내걸린 벽서에는 영조의 치세 전체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소론 강경파 윤지(尹志)가 범인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노론은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모는 계기로 삼았고, 영조가 이를 추인했다. 영조는 자신의 세제시절 목숨의 은인이었던 소론 온건파 조태구, 유봉휘 등 죽은 대신들마저도 역적으로 규정하고 만다

<융건릉 육묘장>

 

  그러나 세자의 정치적 입장은 영조와는 달리 소론에 동정적이었다. 소론을 엄벌해야 한다는 노론의 주장은 물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문묘배향 등의 주요한 요청을 모두 거부한다. 따라서 사도세자는 노론의 정적(政敵)이 되기에 이른다. 사도세자에게는 변변한 자기 사람 하나 없는 형편이었고, 비극을 더하는 것은 아내인 혜경궁 홍씨까지 노론의 영수였던 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의 당론을 따르는 정적이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창경궁후원의 주목>

 

  당시 임금들의 평균수명이 49세일 때 42살의 늦깎이로 얻은 아들에 대한 조급하고 지나친 기대와 아들의 재능을 알아주지 못한 아버지의 빗나간 사랑과 노론세력이 절대 우세할 때 소론을 지지하는 세자와의 틈새에 집권세력인 노론의 정치적 공작이 갈등을 더욱 키웠으며, 권력은 절대 양립할 수 없다는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난다

<융릉의 미선나무 열매>

 

  1762년 음력 5 22일 나경언(羅景彦)이란 사람이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고변했다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 고변으로 영조는 세자의 여러 비리를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다. 왕은 분노와 고민을 깊게 하다가 윤5 13일에는 세자를 폐하고 뒤주에 가두었으며, 결국 세자는 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세손을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眞宗이 됨)의 후사(後嗣)로 입적하여 동궁으로 책봉했다

<화성행궁의 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