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와야 정유순 2021. 3. 14. 01:01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2021년 3월 10일)

瓦也 정유순

   인천광역시 강화도(江華島)! 옛날 강화로 오고 가는 길은 결코 출세나 영광의 길은 아니었다. 고려조 21대 희종(熙宗)은 무신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어 이곳으로 유배되었고, 조선조의 연산군과 광해군도 반정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철종도 왕족의 신분으로 부귀영화보다도 이곳으로 밀려 나와 고된 생활을 하다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왕좌에 올라 권력 실세들의 눈치 보기에 바빴을 것이다.

<강화군 행정지도>

   그리고 안평대군 등 싹수가 있는 왕자들도 이곳으로 유배되어 소태 씹은 생활을 해야 했다.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은 왕위를 넘보았다는 무고에 연루되어 이복형인 광해군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당시 강화부사에게 증살(蒸殺) 당한다. 이 외에도 피도 눈물도 없는 권력의 매정한 역사(歷史)가 많이 배어있는 곳이다.

<초지대교-네이버 두산백과>

   그러한 강화도를 가기 위해 초지대교를 건너 마니산 서쪽에 있는 함허동천 입구 너른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텅 비어 있다. 여장을 꾸려 입구로 향하는데 입산 금지 푯말이 가로막는다. 혹시나 해서 정수사 쪽으로 방향을 바꿔 달려갔으나 그곳도 마찬가지다. 기왕 나온 김에 마니산행을 포기하고 외포리항으로 가서 싱싱한 횟감을 마련하여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조금 방황하다가 동검도(東檢島) 제방에 앉아 점심을 해결하고 전등사로 향한다.

<외포리 수산물직판장>

   전등사 주차장도 한가하여 혹시 코로나19 영향으로 출입이 통제되었나 하는 불안감이 스쳤으나 가게 아주머니가 뛰쳐나와 주차요금을 징수하여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인다. 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삼랑성 동문으로 전등사 입구다. 삼랑성(三郎城)은 단군왕검께서 마니산참성단을 세 아들인 부소, 부우, 부여를 시켜 축조할 때 쌓은 성이며, 정족산에 있다 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도 불린다. 정족산(鼎足山, 231m)은 산의 생김새가 마치 발이 세 개 달린 가마솥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랑성(정족산성)>
<삼랑성 동문>

   동문을 지나면 우측으로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나온다. 양헌수(梁憲洙, 1816~1888) 장군은 1866년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전등사로 진격해 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인물이다. 이 전투가 끝난 뒤 프랑스 함대는 조선에서 물러갔고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를 전등사 초입에 세웠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양헌수승전비각>

    양헌수승전비를 조금 지나 있는 소나무는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상흔(傷痕)을 간직한 채 등을 돌리고 서 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쇠붙이를 얻기 위해 사찰의 종과 심지어 가정의 숟가락, 젓가락까지 공출하여 빼앗아 가면서 소나무의 송진까지 수탈해갔다. 이 송진은 태평양전쟁 당시 무기의 대체연료로 사용했는데, 소나무의 상흔만큼 우리 민족의 역사에도 깊은 흔적이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다.

<전등사 소나무 상흔>

   전등사는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세운 절로 정족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처음에는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고려 충렬왕 8년(1282) 정화공주의 옥등(玉燈) 시주와 인기스님이 남송(南宋)에서 대장경(大藏經)을 들여오면서 부처님 법의 등(燈)이 전(傳)해진 곳이라 하여 전등사(傳燈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옥등’의 밝음도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며, ‘전등’은 부처님의 지혜가 전해진 것을 말한다.

<전등사 전경>

   대웅보전을 가기 위해서는 <傳燈寺> 현판이 걸려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야 한다. 대조루(對潮樓)는 기둥을 세워 지면과 사이를 두고 지은 누각이다.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으나 1748년(영조 24) 주지 초윤(楚允)과 화주인 보학(寶學) 등이 고쳐 지었다고 하며, 1841년(헌종 7)에는 화주 연홍 등이 중건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이다. 대조루 안쪽부터가 본격적인 불국 정토이자 성스런 수행 공간이다.

<전등사 대조루>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전등사의 중심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다. 내부는 화려한 장식과 능숙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조선 중기 사찰 건축물이다.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부처를 모신 불당과 불상 머리 위의 닫집 장식이 화려하다.

   특히 내부의 낙서 같은 글씨는 병인·신묘양요 때 장병들이 대웅전 벽에 이름을 써서 승전과 자신의 안위를 부처님께 기원했던 간절함이 담긴 표시다. 외부에는 가지각색의 문양과 익살스런 조각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수미단. 조각 속에 담긴 선조들의 익살과 해학이 담긴 보물(제178호)이다.

<전등사 대웅보전>

   전등사 대웅보전 처마 밑 네 모서리에는 손으로 처마를 떠받들고 있는 벌거벗은 조각상이 있는데, 조각상에는 대웅전을 지은 목수가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 여인을 벌하고 그 죄를 씻어주고자 조각상을 만들어 추녀 네 모서리를 떠받들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추녀 4곳 중 2곳의 조각상은 두 손이 아닌 한 손으로 떠받들고 있다. 이는 꾀를 부리는 듯한 모습으로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전등사 대웅보전 처마 밑 나부상>

   전등사 대웅보전 서편으로 150여m쯤 올라가면 특별한 건물 하나를 만난다. 조선 왕실의 중요한 서적들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鼎足山史庫)다. 정족산사고가 설치된 계기는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가 1653년(효종 4) 11월 실록각(實錄閣)의 실화사건(失火事件)으로 많은 사적을 불태우게 되자 새로이 정족산성 안에 사고 건물을 짓고, 1660년(현종 1) 12월에 남은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었고, <태조실록>에서 <인조실록>까지는 처음부터 봉안되었으며, <효종실록>은 1661년 11월에 봉안되었다.

<정족산 사고지>

   그리고 1664년 12월에는 무려 223권에 달하는 실록들을 개사(改寫)하였다. 1665년 9월에는 그 동안 낙권(落卷)이 되어 있던 부분을 새로 등서(謄書)해 채워 넣었다. <현종실록>은 1683년(숙종 9) 3월에 완성, 봉안되었으며, <숙종실록>은 1728년(영조 4) 3월에 완성, 봉안되었다. <경종실록>은 1732년 2월에 완성되었으나 노론에 불리한 기사가 많다는 이유로 1778년(정조 2) <영조실록>과 함께 다시 <경종수정실록>이 편찬되기 시작해 1781년 7월에 완성하여 봉안되었다.

<정족산 사고지 대문>

  정족산 사고가 있는 전등사는 조정으로부터 각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한양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전국 네 곳에 사고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전주 사고만 보존할 수 있었다. 이후 한양의 춘추관을 다시 짓고,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했지만, 병자호란 때 또 마니산 사고가 파괴되고 만다. 조선의 역사와 정신이 담긴 왕조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다. 그 결과 선택된 곳이 바로 전등사가 있는 이곳 정족산이다. 따라서 전등사 주지는 조선 시대 최고의 승직인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정족산 사고지 장서각>

   그러나 정족산 사고의 운명은 조선의 국운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이 1910년 강제로 정족산 사고에서 조선총독부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1930년 다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가, 광복 후 현재까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전각들은 사고가 조선총독부로 이관되면서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건물은 사라졌고,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가 199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왕조실록을 보관하는‘장사각(藏史閣)’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 현판을 다시 달았다.

<정족산 사고지 선원보각>

   전등사 경내에는 약사전, 정행당, 요사채 등 여러 전각(殿閣)이 있고, 특히 정족산 사고를 지키기 위하여 정족진(鼎足鎭)이 설치된 곳이었으나, 1907년 방화로 소실된 것을 2009년 발굴조사하여 11개소의 건물지를 포함해 대규모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1870년대 무렵에 제작된 정족산성진도(鼎足山城鎭圖)에 보이는 포량고(砲糧庫) 등의 창고와 건물지와 담장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며, 빗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시설도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정족산성 진지 터>

   또한, 이곳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특히 청단풍나무는 수령이 280년이 지난 노거수로 한 밑둥에서 여러 가지가 나와 수세(樹勢)가 왕성하다. 사계절 아름다운 풍광과 자태를 연출하는 이 나무는 전등사를 찾는 모든 이에게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보배 같은 나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전등사에는 수많은 나무 중 꽃은 피되 은행이 열리지 않는 은행나무가 있다.

<전등사 청단풍>

   철종(哲宗) 때 수령이 5백 년이 넘고 풍작이 되어야 겨우 열 가마니 밖에 수확하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 조정에서는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었다. 기도를 끝낸 추송 스님은 사람들을 향해 “이제 이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하고 사라졌는데, 그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한다.

<전등사 은행나무>

   그 밖에도 전등사는 1907년 7월 이동휘를 중심으로 400여 명의 강화도 주민들이 모여 대규모 반일집회를 개최하였으며, 1907년 8월 일제의 강요에 조선군대가 해산당하자 강화진위대 소속 해산군인들이 이에 항거하면서 이능권의 지휘 아래 강화의병(대동창의진)을 일으켜 1908년 10월 30일과 31일 이틀에 걸쳐 일본군 13연대 소속 70여 명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곳이다.

<강화도 마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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