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여강길(3코스 바위늪구비길)
(2021년 2월 27일, 강천마을∼신륵사)
瓦也 정유순
새벽잠을 설치고 시간 절약을 위해 여주역에서 택시로 출발지로 이동했으나 택시 기사의 착오로 출발 스템프를 하지 못하고 첫걸음이 꼬인 채로 강둑을 따라 아침을 조망하며 숨을 고른다. 오늘의 여정은 강천마을회관 앞에서 신륵사까지 가는 길이다. 경기도 여주시 동부에 있는 강천면은 원래 강원도 원주군에 속한 땅이었으나, 1895년(고종 32) 여주 땅에 편입되었다.
‘강천(康川)’이라는 지명은 섬강(蟾江)과 남한강의 합류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모든 배가 편안하게 쉬어가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강 안쪽으로 수초가 잘 발달된 굴암늪이 있고, 강 건너에 강천섬이 보인다. 강천섬은 처음부터 존재한 섬이 아니다. 남한강 물이 불어나면서 육지와 분리되던 퇴적한 지형을 4대강 사업을 통해 조성된 인공 섬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한강에서만 서식하는 단양쑥부쟁이 서식지로 알려진 곳이다. 4대강 사업으로 개발될 때 멸종위기종인 단양쑥부쟁이를 보호하려 했지만 대체서식지를 만들어 준다는 당국의 힘에 밀렸고, 대체서식지로 옮긴 단양쑥부쟁이는 생육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개체가 죽었다. 이렇게 자연에서 멸종된 줄로만 알았던 야생 단양쑥부쟁이가 이곳 바위늪구비에서 발견이 됐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남한강 북안으로 뚝 끝에는 바우늪구비 위로 숲길인 강헌고개를 넘으면 강천면 굴암리다. 굴암리(窟巖里)는 굴바위가 있어 굴암이라 했으며,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행사로 열렸던 굴암리 줄다리기는 현재 여주시가 주관하여 큰 행사가 있을 때만 개최한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주민들이 모두 모여 음력 정월 대보름날 밤에 벌이던 민속놀이로, 줄은 암줄과 수줄 두 줄로 꼬며 각각 30~50m 정도 길이로 줄을 만든 다음에는 수령이 수백 년에 이르는 느티나무 앞으로 가서 쌀 한 말을 바치고 고사를 지낸다.
그런 다음 밧줄을 매고 집집마다 돌며 한 해의 액운을 없애고 안녕과 무사를 기원하는 풍악을 울린다. 이후 밤이 되어 보름달이 뜨면 줄다리기를 시작하는데 수줄의 머리 부분이 암줄의 머리 부분으로 삽입하려고 하면 암줄이 피하면서 서로 실랑이를 벌인다. 어느 정도 실랑이를 한 후 수줄이 암줄의 머리 부분으로 들어가면 줄이 빠지지 않도록 비녀를 끼운다. 줄다리기는 삼판양선승제로 승패를 가르는데, 암줄이 이겨야만 그해 풍년이 들고 재앙이 없을 것이라 믿었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통째로 여강에 띄워 보냈다.
영동고속도로가 남한강대교를 건너 원주 쪽으로 뻗으며 마을을 관통하는 곳이 강천면 적금리다. 이 마을도 본래 강원도 원주지역이었으나, 여주 땅으로 편입될 때 신대촌을 병합하여 적금리라 하였다. 옛날에는 강변 모래밭에서 사금(砂金)을 채취하여 거래하던 곳으로 ‘관방골’이라 했으며, 마을 일대에 금을 모아 쌓아 두었다 하여 적금(積金)이라 불리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마을 앞에 장승을 세워 재앙을 막았다 하여 붉은 적(赤)자로 고쳐 적금(赤金)으로 변하였다.
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남한강대교 밑을 빠져나와 범바위들을 지나면 갈갱이고개 자락에 자리 잡은 종교법인 <대순진리회여주본부도량>이 나온다.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는 증산도 교리인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믿는 증산도 계통의 종교단체다. 증산도 신도인 박한경(朴漢慶, 일명 牛堂)이 1968년 4월 경남 함안에서 올라와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서 대순진리회를 세우고 증산도의 분파들 가운데 가장 조직성을 갖춘 종교단체로 능동적으로 현대화를 지향하며 활발하게 교세를 확장 시켰다.
1969년 5월 광진구 중곡도장을 기공한 이래 사회봉사 활동을 병행하며 교세가 급성장하자 1987년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여주본부도장을 세웠다. 이밖에 제주수련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이 있다. 교육 사업으로 1992년 3월 경기도 포천시에 대진대학교를 개교한 이래 대진고등학교, 대진여자고등학교, 분당대진고등학교, 대진디자인고등학교, 대진정보통신고등학교를 세웠다. 의료사업으로는 1998년 8월 분당제생병원을 개원한 이래 동두천제생병원과 고성제생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다시 강천면 이호리 망경개 들을 지나 <목아불교박물관> 앞에 도착한다. 목아불교박물관(木芽佛敎博物館)은 한국의 전통 목공예와 불교미술의 계승 발전을 위해 1993년 6월 개관한 사립 전문 불교박물관이나,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다. 박물관 앞 야외조각공원에는 남근(男根) 솟대가 개선문처럼 서 있다. 모든 생물의 원초적인 동인(動因)은 식(食)과 생식(生殖)을 위해서다. 따라서 남근숭배 사상은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의 상징이다. 우리 주변에는 묘(墓) 앞의 장군석(將軍石)이나 망주석(望柱石) 모양으로 많이 서 있다.
목아박물관을 지나면 여주시 북내면 가정리다. 북내면(北內面)은 여주읍내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면(北面)으로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원주군 지내면(池內面)과 강천면의 가정리를 병합하여 북면과 지내면의 한 글자씩을 따서 북내면이 되었다. 북내면 상교리에는 1개의 국보와 4개의 보물 등이 있는 고달사지가 있으며, 신남리봉미산(新南里鳳尾山) 산제(山祭)와 지내리(池內里) 단허리놀이가 전해온다.
강변을 따라 하류로 내려오면 금당천의 금당교를 건너야 한다. 금당천(金塘川)은 양평군 지제면 무왕리 모라치고개에서 발원하여 북내면을 관통하여 신륵사 위쪽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옛날 물이 풍부했을 때에는 뱃길로 고달사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 때 목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가정 이곡(李穀)이 원나라에 처녀 공출을 반대한 죄로 북내면 가정리에 귀양을 와서 금당천에서 낚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1419년(세종 1)에는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모시고 이 금당천 가에서 하루 유숙하기도 했다.
금당교를 건너 남한강이 동서로 뻗어 흐르는 산길을 지나면 여주시 천송동(川松洞)으로 신라 때 창건된 고찰(古刹) 신륵사(神勒寺)가 있으며, 신륵사관광지구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혜근(懶翁惠勤)선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으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極樂寶殿)이 본당이다.
신륵사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면 직선으로 보이는 게 신륵사 삼층석탑과 강월헌이다. 경기도문화재자료(제133호, 2004년 11월)로 지정된 3층 석탑은 평면방형으로, 다층전탑(多層塼塔) 부근 강변 암반에 있다. 석탑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 후기로 추정되며,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에 있는 기록을 볼 때 현재 탑이 위치한 장소에서 고려 말의 고승 나옹혜근을 다비(茶毘)한 후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 같다.
강월헌(江月軒)은 육각정으로 남한강 변 가파른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주변 경치가 뛰어나 남한강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현재 위치는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의 다비(茶毘) 장소였는데, 그의 문도들이 정자를 세우고 당호를 강월헌이라고 이름 붙였다. 강월헌에 올라 여강(驪江)을 바라보니 나옹선사의 선시(禪詩)가 저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靑山見我 無言以生, 청산견아 무언이생)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蒼空見我 無塵以生, 창공견아 무진이생)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解脫嗔怒 解脫貪慾, 해탈진노 해탈탐욕)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如山如水 生涯以去, 여산여수 생애이거)
여주 신륵사에는 나옹(懶翁) 무학(無學) 목은(牧隱)세 분의 스승이 있다. 나옹선사는 고려와 함께 쓰러져 가던 불교를 재충전하여 조선으로 넘겨준 큰 스님이다. 그가 입적한 신륵사는 나옹선사의 기념관이라 불릴 만큼 관련 문화재가 많다.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王師)였고,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다. 신륵사는 나옹과 함께 고려 시대 왕실과 불교 중흥을 위한 중심사찰이었다.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조선 처음이자 마지막 왕사다. 그는 18세에 출가하여 1353년에 원(元)에 가서 인도의 지공(指空, ?~1363)과 고려 나옹의 가르침을 받고, 1356년에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왕사가 되었다. 1414년에 황해도 평산 연봉사(烟峰寺)에 작은 거실을 마련하여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하고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강의했다. 그는 <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하여 불교에 대한 유생(儒生)들의 그릇된 견해를 반박했다.
목은 이색(李穡)은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의 스승으로 조선에 성리학이 기틀을 잡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신륵사에 대장경과 대장경각을 지어 봉안했고, 왕명으로 나옹선사의 비문을 지어 세우기도 하였다. 1377년에는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절하다가 1396년 5월 7일 여주 신륵사(神勒寺) 부근 연자탄(燕子灘, 제비여울)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던 중 갑자기 별세했다.
신륵사에는 기단 부분은 화강석으로, 탑신부(塔身部)는 벽돌과 축조된 6층인지 7층인지 애매모호 한 탑이 하나 있다. 그래서 이름이‘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이다. 보물(제226호)로 지정된 이 탑은 높이 약 9.4m이며, 그 구조는 일반 석탑의 기단과 유사한 2중의 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石段)이 있다. 이와같이 전체의 형태가 이례적이고, 벽돌의 반원 모양의 배열도 무질서한 것은 후세의 무지한 수리로 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륵사에는 원래 본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고, <경률론(經律論)>을 인출(印出)·수장하던 대장각 조성을 기록한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가 있다. 이색은 공민왕 현릉(玄陵)의 자복(資福)과 부모님의 추복(追福)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였고 이숭인(李崇仁)에게 명하여 1380년(우왕 6)부터 만들게 하였다. 비문은 자경 2㎝의 해서로서, 직제학 권주(權鑄)의 글씨다. 현재 몸체의 문면(文面)은 크게 파손되어 있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으며, 높이 1.33m로 보물(제230호)이다.
나옹선사의 또 하나의 유물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이 신륵사 뒤편에 모셔져 있다. 보물(제228호)로 지정된 이 석종은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명으로 밀양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1376년(우왕2)에 입적하게 되자 1379년(우왕5)에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잡아 세운 것이다. 이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한 단층 기단에 받침 2단을 쌓은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며 고려 후기 석종 형태의 승탑 양식이다. 석종 옆에는 나옹의 행적을 기린 비가 있고, 불을 밝히는 석등이 서 있다.
* 여주 여강길 3구간 거리 : 1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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