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여강길(4코스 5일 장터길)
(2021년 3월 6일, 신륵사∼세종대왕릉역)
瓦也 정유순
여주를 대표하는 사찰이 단연 신륵사다. 여주 시내에서 여주대교를 건너면 낮고 부드러운 곡선의 봉미산(鳳尾山)이 누워있고, 이 산 남쪽 기슭에는 신륵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신륵사 주변으로는 <신륵사 관광지구>가 조성되었다. 뒤로는 숲이 우거지고 왼쪽 곁으로는 안벽(岸壁)이, 마당 앞으론 여강(驪江)이 유유히 흐르는 절경이다. 여강길 4코스 5일 장터길 출발점은 신륵사 일주문 앞이다.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몹시 사나운 용마(龍馬)를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신륵사 일주문 앞의 아침은 고요하다. 옅은 안개가 낀 여강도 일렁이는 물결 한 점 없는 잔잔함이다. 옛날 조포(潮浦) 나루터가 있던 강 위로는 신륵사관광지구와 금은모래유원지를 잇는 총 길이 515m의 출렁다리를 2022년 6월 준공 목표로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완공되면 국내 출렁다리 중 충남 논산 탑정호 출렁다리(600m)에 이어 두 번째로 길다고 한다.
막 출발하자마자 큰 비석이 눈에 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찌른 충장공(忠壯公) 원호(元豪, 1533~1592)장군 전승비다. 그는 원주원씨로 여주에서 태어난 무신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패주하는 관병과 민병 등을 규합하여 신륵사 앞 여강에서 도강(渡江)하던 왜적을 몰살시켜 육전(陸戰)에서 첫 대승을 거두었다. 그후 여주목사 겸 경기·강원도 방어사가 되어 금화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하였다.
여주박물관 앞에서 보이는 강 건너 마암과 영월루는 한 폭의 산수화다. 강변을 따라 연인교를 따라 여주시내로 들어선다. 연인교는 구 여주대교로 1964년 8월에 준공되었지만, 노후화로 인해 이 다리를 그대로 놔둔 채 바로 옆에 지금의 여주대교를 새로 건설했다. 그리고 인도(人道)로만 사용되다가 2001년에 안개 분수, 제트식 분수, 무지개 분수와 도자 벽화 등 각종 조형물을 설치한 후 다리 이름을 연인교(戀人橋)로 고쳤다.
다리를 건너 강변을 따라 하류로 조금 내려오면 여주시청 옆으로 청심루가 있었던 여주초등학교를 지나간다. 청심루(淸心樓)는 여주 관아의 객사 북쪽에 있는 부속 건물이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관상목이 많이 있어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1945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았으며, 1987년 경기도에서 ‘청심루터’ 표석을 세웠다.
여주는 경관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강변을 따라 여러 곳에 누정(樓亭)이 세워졌다. 청심루에서 바라보는 신륵사의 다층전탑이 아득히 보이고 서쪽으로 영릉의 울창한 송림과 강 아래로 오고 가는 돛단배들이 어우러져 경관이 더 뛰어나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墨客)들이 유람을 하며 글을 남겼는데, 한때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비롯한 약 40여 명의 시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여주초등학교 이웃에 있는 여주시청 앞으로 간다. 1914년 3월 1일 여주군청으로 설치된 뒤 2013년 9월 23일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여주시청으로 개편되었다. 1읍 8면과 3개 행정동을 관할한다. 시의 주 캐릭터는 성군 세종대왕이며, 보조캐릭터는 쌀을 형상화한 미돌이와 도자기를 형상화한 청돌이와 백돌이다. 이밖에 시나무는 은행나무, 시화(市花)는 개나리, 시새[市鳥]는 백로다.
여주시청 삼거리에서 별관 쪽으로 건너 농협에서 우회전하여 직진하면 여주 5일 장터가 나온다. 장터가 정확히 언제부터 열렸는지는 확실치가 않지만 고려 시대부터 생필품을 거래하면서 자연스럽게 장이 선 것으로 추정된다. 전형적인 재래 5일장으로 인근의 천령장(이포장)·억억장(흥천장)과 함께 여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생기고 가장 번성하였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전통 5일장 형태를 갖춘 장중에 가장 큰 장으로 5일과 10일에 개장한다.
시장을 둘러보고 나와 다시 강변으로 나오다 보면 대로사가 나온다. 대로사(大老祠)는 조선의 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정조 9년(1785) 왕이 영릉에 참배하러 왔다가 여주의 유림(儒林)들과 경기 유생들의 건의를 받자 김양행등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건립하게 하고 대로사(大老祠)라 사액(賜額)하였다.
이후 대원군이 득세하자 그에게 ‘대로(大老)’라는 호칭을 붙이자는 움직임이 일면서 조선에 ‘대로’가 두 사람일 수 없다며 1873년(고종 10) 10월 대로사를 강한사(江漢祠)라 개칭하였다. 이 사당은 다른 사당과는 달리 서쪽을 향하여 있고, 내부에는 송시열의 입상(立像) 초상화가 효종(孝宗)릉이 위치한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우암은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스승이었고, 왕이 된 뒤에는 북벌을 논의할 만큼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다.
여강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소양천과 만나는 곳에 양섬[羊島]이 있으며, 그 위로 세종대교가 가로지른다. 세종대교는 영릉삼거리에서 여주시 현암동을 잇는 연장 500m, 폭 6m의 남한강대교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의 필요한 소와 양, 말 등을 섬에 방목으로 길러 조정에 상납하여 얻은 이름으로 조선 시대에 초기 여주 천주교인들이 부활 축하 모임을 열다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순교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양섬은 남한강의 강의 유속이 느려지면서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하중도(河中島)로 여주 8경 중 5경으로 기러기 떼 내리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 밖에 야구장과 여주시민들의 산책로 및 쉼터로 잘 꾸며져 있고, 캠핑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또한, 양섬에는 한국전쟁 당시 갈대숲에서 민간인이 많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어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낸다.
세종산림욕장을 넘어와 영릉(寧陵·英陵)에 도착한다.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는 한 울타리 안에 두 분의 임금을 모신 왕릉이 있다. 이름이 묘하게도 모두 ‘영릉’인데, 한 분은 세종을 모신 英陵(영릉)이고, 또 한 분은 효종을 모신 寧陵(영릉)이다. 이 능역(陵域)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표소를 지나 먼저 효종의 寧陵(영릉) 재실을 둘러 본다. 일반적인 조선 시대 재실은 재방, 안향청, 제기고, 전사청,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 되거나 원형이 훼손되었으나, 영릉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의 공간 구성과 배치가 잘된 기본 형태 그대로 남아 있어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아 보물(제1532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경내의 제향(祭享)과 관계있는 향나무와 느티나무, 회양목 등의 고목도 함께 어우러져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회양목은 원래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이곳의 회양목은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년 이상 크게 자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나무가 되었고, 그 유래와 역사가 깊어 천연기념물(제459호, 2005년 4월)로 지정되었다.
寧陵(영릉)은 효종(孝宗)과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유택(幽宅)이다. 왕릉과 왕비 능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최초의 형태라고 한다. 처음엔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의 태조 무덤인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샐 염려가 있다 하여 1673년(현종 14) 세종의 무덤인 영릉(英陵) 동쪽으로 능을 옮겼다.
왕릉 바깥쪽으로 곡장(曲墻)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童子石)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이고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흐르는 금천(禁川)을 건너 밖으로 나와 ‘왕의 숲길’을 따라 세종대왕이 계신 英陵(영릉) 쪽으로 가야 하는데, 왕의 숲길은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영릉(寧陵)을 연결하는 길로 조선왕조실록에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영릉(寧陵)을 먼저 참배한 후 영릉(英陵)을 참배했다”는 기록에 따라 조성한 길로, 이 길을 걸으며 왕의 발자취를 느껴보라는 의미가 있다.
英陵(영릉)은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를 합장한 무덤이다.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랐다고 한다. 국조오례의는 조선 초기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등 오례(五禮)에 관한 의식절차를 기록한 책이다.
원래 英陵(영릉)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獻陵, 태종의 능) 경내에 왕과 왕비를 합장하여 쌍실을 갖추고 있었으나, 터가 좋지 않아 1469년(예종1)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설치되었으며,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魂遊石) 2좌를 마련하여 합장 능임을 표시하였으며, 난간 석에 12지신 상을 조각하는 대신 12지를 문자로 표현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고 한다.
영릉 밖에는 재실이 있고 그 옆의 세종대왕유적관리소와 영릉휴게소 자리에는 새로 재실을 신축 중이며, 조금 떨어진 곳에 세종대왕의 동상과 조선 시대 천문대에 설치되었던 중요한 천문관측기기인 간의(簡儀)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태양의 그림자를 재어 24절기를 알 수 있게 만든 규표(圭表) 등 세종조에 발명한 과학기구들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은 여강길 6코스 출발할 때 살펴보기로 하고 영릉에서 약 6㎞ 정도 떨어진 세종대왕릉역으로 봄바람에 돌아가는 바람개비와 함께 걸어간다.
세종대왕릉역(世宗大王陵驛)은 여주시 능서면 신지리에 있는 경강선의 전철역이다. 2016년 4월 처음에는 역명을 영릉역(英陵驛)으로 하였으나, 2016년 9월 24일 개통과 함께 영업을 개시하고 이틀 후인 9월 26일에 세종대왕릉역으로 명칭 변경하였으며, 거리도 판교 기점 49.4km에서 51.1km로 변경하였다. 역 2층에 있는 승차장에 올라서니 재래 된장과 간장 담그기 체험장의 장독대가 장담그기 제철을 알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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