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봉은사(奉恩寺)
(2020년 8월 8일)
瓦也 정유순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이라 아이들과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사찰 봉은사에 와본 적이 있다. 경내를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강원도 춘천에 중국 민항기가 불시착했다는 급보가 날아온다. 그리고 30여 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봉은사의 예쁜 홍매(紅梅)를 보려고 찾아 왔으나 꽃망울 몇 송이만 세어 보다 돌아갔고, 오늘은 장맛비가 계속되는 궂은 날씨에 선정릉을 둘러보고 원찰(願刹)이었던 봉은사에 갑자기 찾아와 한 바퀴 둘러 본다.
봉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신라 원성왕 10년(794년)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하여 견성사(見性寺)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고려 시대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498년(연산군 4)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을 위하여 능의 동편에 있던 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봉은사라고 개칭하였다. 1501년(연산군 7) 나라에서 절에 왕패(王牌)를 하사하였다.
조선 명종이 12세에 등극하자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실권을 쥐게 된다. 평소 불교를 신봉하던 그녀는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승 보우(普雨)를 등용해 침체(沈滯)된 불교의 중흥을 꾀하는데, 봉은사가 바로 그 중심에 있게 된다. 문정왕후는 중종에 의해 완전히 폐지되었던 선종과 교종의 부활을 시키고, 이에 따라 봉선사는 교종을 대표하는 교종수사찰(敎宗首寺刹)이 되고 봉은사는 선종을 총괄하는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이 된다.
보우는 ‘판선종사 도대선사 봉은사주지(判禪宗事都大禪師奉恩寺住持)’가 되어 이곳 봉은사를 무대로 불교 중흥에 앞장선다. 또 문정왕후는 보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승과(僧科)를 다시 실시한다. 승과는 명종 7년(1552) 봉은사 앞 벌판에서 첫 시험이 치러진 이래 식년(式年)과로 3년마다 문정왕후가 승하한 이듬해인 명종 21년(1566)까지 실시된다.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왜군과 맞선 서산대사(西山大師)나 사명당(四溟堂)이 모두 이 승과를 통해서 배출된 인재들이다. 보우는 1562년에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선릉(宣陵) 동쪽으로 옮기고 절을 현 위치로 이전 중창하였다.
선정릉에서 봉은사로를 따라 맨 처음 당도한 곳은 진여문이다. 진여문(眞如門)은 봉은사의 정문으로 하늘과 맞닿을 양 위로 솟구친다. 진여(眞如)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뜻한다. 이 문은 창건 당시부터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39년 대화재 때 소실 되었고, 1982년 일주문 자리에 진여문을 세웠으며, 기존 일주문은 양평 사나사(舍那寺)로 옮겨졌다가 2000년 중반 사나사에서 새 일주문으로 교체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진여문 안에는 목조(木彫)사천왕상이 좌우로 각각 2개씩 4개가 서 있다. 이들은 원래 진여문과 법왕루 사이에 있었던 천왕문에 있었으나 1997년 천왕문을 철거하면서 이곳으로 임시로 옮겨와 지금에 이른다. 이 사천왕상은 1746년(영조 22년)에 조성되었는데 능창군(綾昌君 : 宣祖의 7子인 仁城君의 증손)과 상궁 박필애(尙宮 朴弼愛) 등 궁중 관련 인물 현상성(賢上城)에서 건달바(乾達婆,Gandharva)와 비사사를 거느리고 동쪽 인간세계 사람들, 특히 국가와 국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현상성은 불교세상 중앙에 솟아있는 수미산 중턱 동방의 4층에 있다는 궁전이다.
진여문을 통과하기 전 초입부터 법왕루까지 큰 화분에 심어진 연(蓮)이 도열해 있어 여름 내내 연꽃 축제를 하는 것 같다. 불교에서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는 청정무구한 것으로 열반(涅槃)의 경지를 상징한다. 부처가 탄생할 때 마야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어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였는데, 이때 일곱 걸음을 걷자 그 걸음마다 연꽃이 솟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연꽃은 완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법왕루(法王樓)는 2층 누각으로 봉은사 경내에서 진여문 다음으로 통과하는 제2 관문이다. 기존의 법왕루를 1997년에 재건축하였으며 1층은 종무소로, 2층은 대법회와 기도, 불교 강연 장소로 사용한다. 법왕(法王)은 석가모니를 가리킨다. 불단 중앙에는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었으며, 주변으로는 신도들의 시주(施主)로 만들어진 작은 관세음보살 원불(圓佛)이 무려 3,300개나 있어 발산하는 금빛이 황홀한 풍경을 자아낸다. 법왕루 옆의 연회루(緣會樓)는 봉은사를 창건한 연회국사를 기리고자 지은 건물 같다.
법왕루를 지나 대웅전 앞에 선다. 봉은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은 1982년에 새로 지어졌다. 팔작지붕의 5칸 규모로 제법 규모가 큰 법당 안에는 목조 삼불상(석가·아미타·약사여래, 서울유형문화재 제226호)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로는 신중도(제229호), 삼세불도(제234호), 삼장보살도(제235호), 감로도(제236호) 등 4점이 모셔져 있다. 신중도(神衆圖)는 1844년(헌종 10)에 상궁들의 시주로, 삼세불도와 삼장보살도, 감로도는 1892년(고종 29)에 민두호(閔斗鎬)와 상궁들의 시주로 조성되었다.
대웅전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북한산 진관사 대웅전의 글씨를 모각(模刻)한 것이다. 우측으로 주좌(主座)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염라대왕 등 십왕(十王)을 모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는 지장전(地藏殿) 사잇길로 난 계단을 올라가 좁은 숲길 옆에는 봉은사 칠성도를 모신 북극보전(北極寶殿)이 칠성각(七星閣)을 대신한다. 칠성도(七星圖)는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고 재앙을 소멸시켜주는 차성광여래(북극성)와 북두칠성을 비롯한 여러 별을 그린 칠성도다.
대웅전 측면 앞에는 영산전(靈山殿)이 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와 일대기를 여덟 시기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를 봉안하는 불교건축물로 팔상전이라고도 한다. 영산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영산불국(靈山佛國)을 상징한다. 영축산정은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던 곳으로 불교의 성지(聖地)를 영산전을 통하여 발현시킨 것이며, 이곳에 참배함으로써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불국토인 영산회상에 참배하는 것이 된다.
북극보전 옆 계단으로 내려오면 영각이다. 1992년 증축한 영각(影閣)은 봉은사를 창건한 연회국사와 중창한 보우대사, 이 절의 출신인 서산대사와 사명당 그리고 남호영가율사와 영암, 석주 등 일곱 승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오른 쪽 벽면에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호국영령 201위의 영단이 있으며, 불단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있고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보좌하고 있다. 명부전처럼 죽은 이를 위한 공간이지만 이곳을 거쳐 간 큰 승려와 호국영령이 봉안된 특별한 공간이다.
영각 서쪽으로는 미륵대불(彌勒大佛)이 있다. 봉은사가 서울에서 제일 큰 절이라 이에 걸맞게 가장 큰 미륵대불을 세운다. 이 대불은 1966년 당시 주지였던 영암이 발원하여 일만여 명의 시주를 받아 10여 년의 불사(佛事) 끝에 완성되었다. 대불의 높이는 23m로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불이었다. 이곳도 미륵대불 주변으로 원불(圓佛) 3,000개가 장관을 이룬다. 미륵대불을 향해 길게 누운 와송(臥松)은 미륵(彌勒) 세상이 빨리 오라고 간절히 기원하는 것 같다.
미륵대불 옆의 판전은 1939년 대화재 때 소실되지 않고 남은 전각으로 경판(經板)을 보관하는 곳이다. 1855년 남호 영기와 추사 김정희가 뜻을 모아 화엄경 소초 81권을 판각하여 이를 보관하고자 1856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유마경(維摩經)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등을 더 판각해 3,438점의 판본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판전은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각과 예불을 올리는 불당의 기능을 같이하는 특별한 구조로 건축적 희소성이 있다.
板殿(판전) 현판은 추사의 마지막 글씨로 죽기 3일 전에 썼다고 한다. 현판 좌측의 잔글씨는 ‘나이 71세 병중에 썼다(七十一果病中作)’는 얘기다. 추사는 불가와 관련 있는 글씨를 쓰거나 승려들에게 글을 보낼 때 흔히 ‘병거사(病居士)’임을 자처했다. 이 말은 병을 핑계로 부처님의 제자들과 일대 토론을 전개하여 그 내용이 경전으로까지 남은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에 자신을 빗댄 것이다. 추사는 돌아가기 몇 달 전인 1856년 여름 무렵에는 아예 봉은사에 거처를 꾸며 생활하고 있었다.
판전 아래 오른쪽 작은 비각 안에는 1870년(고종 7)에 세운‘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가 있다. 앞면 비액이나 뒷면 4자씩 8구절로 된 비문은 모두 예서체로 품위 있는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비문은 봉은사의 땅이 남의 농토에 뒤섞여 여러 해 송사에 시달렸는데 흥선대원군 덕택에 해결되어 그 은혜를 돌에 새겨 영구히 전한다는 내용이다.
미륵대불 정면에는 미륵전이 있다. 미륵전(彌勒殿)에는 미래(未來)의 세상을 여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앞마당에는 밤이 되면 환하게 비추는 세계가 어둠을 기다리고 있다. 절 마당 한쪽에는 1974년에 건립된 범종각은 동쪽에 새 종루(鐘樓)를 지으면서 기능을 멈췄다. 고층 빌딩 숲에 묻힌 봉은사는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아 인파로 북적이지만, 화사한 꽃향기 속에 역사가 함께 머무는 흔치 않은 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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