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선정릉(宣靖陵)

와야 정유순 2020. 8. 11. 03:33

가깝고도 먼 길-선정릉(宣靖陵)

(2020년 8월 8일)

瓦也 정유순

   장맛비가 계속되는 날씨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주 먼 길처럼 잘 가지지 않는 선정릉(宣靖陵)을 가기 위해 선릉역을 향해 아침부터 바삐 발품을 판다. 선릉역은 1982년 12월에 지하철 2호선 개통과 함께 영업을 개시하였고, 2003년 9월 분당선 개통과 함께 환승역이 되었다. 당시에는 경기도 광주(廣州) 땅으로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서울 강남 도심의 중심부이고, 울창한 숲이 도심의 허파 역할을 한다.

<서울 선릉과 정릉>

   빌딩 숲속에 자리한 선정릉은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과 제2계비인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宣陵)과 아들 11대 임금인 중종(中宗, 1488∼1544)의 능인 정릉(靖陵)이 있어 선정릉이라고 하며, 또한 3개의 능(陵)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으로도 불리었고, 인근 테헤란로의 원래 이름도 <삼릉로'(三陵路)>였다. 능지(陵地)로 선정된 것은 1495년(연산군 1)에 성종의 능인 선릉이 들어서면서부터다. 그 뒤 1530년(중종 25)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 윤씨가 이 능에 안장되었다.

<재실>

   성종(成宗, 1457∼1494)은 훗날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와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되어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성종은 할아버지인 세조의 손에 자란다. 세조는 일찍이 손자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총애가 남달랐다. 세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성종은 다섯 살이 되던 해(세조 7년, 1461)에 자산군에 봉해지며, 1467년에는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와 혼인을 올리고 1469년에는 숙부인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선릉 향롱와 어로>
<선릉(성종) 전경>

   그 후 성인이 되는 7년 동안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으며 불안하게 출발하였지만, 권신과 사림세력을 조화롭게 운영하여 국가권력의 균형을 이루며 치세에 능한 왕이 되었다.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의 기초를 완성함으로써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 1485년에는 조선의 기초가 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었고,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등 다양한 서적이 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장수하지 못하고 38세의 나이에 16남 12녀의 자녀를 두고 승하한다.

<선릉(성종)>
<혼유석 받침돌>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윤씨는 정비인 공혜왕후 한씨,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뒤를 이은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자 중종의 생모(生母)다. 우의정 윤호(尹壕, 1424∼1496)의 딸로 성종 4년(1473) 숙의에 봉해졌으며, 1479년 폐비 윤씨가 폐출되면서 1480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497년에 자순대비가 되고 소생으로는 중종과 신숙공주가 있다. 1530년(중종 25년)에 68세를 일기로 경복궁에서 승하하여 성종의 동북쪽에 묻힌다.

<선릉(정현왕후) 전경>

   성종릉은 병풍석의 면석(面石)에는 구름문양 속에 십이지신(十二支神)이, 지대석(地臺石)과 만석(滿石)에는 연꽃문이, 인석(人石)에는 해바라기와 모란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치맛돌[상석(裳石)] 및 난간석이 있다. 정현왕후 능은 석물 등 상설(象設)은 기본적으로 왕의 능과 같으나 다만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欄干石)만을 두르고 봉분도 비교적 낮아 조촐한 모습이다. 이곳 석물들은 성종 5년(1474)에 완성된 국조오례(國朝五禮)에 의하여 장대하면서도 조화가 잘 이루어져 균형미가 있다.

<선릉(정현왕후)>

    선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같은 능역(陵域)에 하나의 정자각(丁字閣)을 사용하되 언덕을 달리하고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선정릉 입구에 들어서서 재실(齋室) 앞으로 하여 서쪽으로 들어가면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이고 정자각 서북쪽 뒤로 성종의 무덤이 있으며, 왕후의 능은 계곡 건너편 동북쪽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두 능침 사이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고, 능역 외곽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선릉 정자각>

   입구에서 성종의 능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능역과 부속건물의 배치가 여느 능과 다르다. 사초지(莎草地), 즉 봉분으로 오르는 경사진 언덕 전면 중앙에 있어야 할 정자각(丁字閣)이 측면에 놓였는데, 이것은 동원이강릉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 배치다. 즉 동원이강릉에서는 정자각을 능침 앞에 하나씩 세우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능침 사이에 세우기 때문에 봉분과 사초지와 정자각이 일직선에 놓이는 일반적인 배치와는 다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예감>

   정현왕후 능을 둘러보고 우측 산책로를 따라 계곡 길을 한참 걸으면 중종의 묘인 정릉(靖陵)이 나온다. 중종은 성종19년(1488년)에 정현왕후 윤씨 소생으로 성종의 차남이다. 성종25년(1494년)에 진성대군에 봉해지고, 1506년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보위에 오른다. 중종은 신진 사림세력들을 등용하여 훈구대신들과의 세력 균형을 이루면서 새로운 이상형(理想型)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등 각종 옥사로 이어지는 당파싸움의 벽을 넘지 못한다.

<정릉(중종) 전경>

    중종은 진성대군 때인 1499년에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와 결혼하였으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의 딸이며 연산군의 비 신씨의 질녀라는 이유로 반정을 주도했던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위되고 만다. 1544년 57세의 나이로 승하한 중종은 38년 2개월 동안 왕위에 머물렀으며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 윤씨와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 등 두 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을 두어 9남 11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릉(중종)>
<정릉 둘레석 문양>

   원래 중종은 1544년 승하하여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묻혔으나 명종17년(1562년) 문정왕후가 사후에 왕과 합장하기를 희망하여 원찰(願刹)이 있었던 봉은사(奉恩寺)를 지금의 수도산 아래로 옮기고, 현재의 위치로 천장(遷葬) 하였다. 그러나 장마 때면 물이 차오르는 등 풍수상의 결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문정왕후는 노원구에 있는 태릉(泰陵)에 묻혀 있다.

<선정릉 관람안내도>

   그래서 정릉은 단릉(單陵)으로 홍살문과 정자각이 일직선으로 있다. 정릉의 상설(象設) 구조는 기본적으로 선릉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인석에는 국화문양과 모란문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은 장대하고 선각이 뚜렷하여 머리가 몸에 비하여 큰 편이다. 인석(人石)은 사람의 형상을 본떠 만든 돌이란 뜻이며,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 시대의 해학(諧謔)이 담겨있다.

<정자각과 정릉>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파헤쳐져 재궁(梓宮)이 전부 불타 버렸기 때문에, 선릉과 정릉의 세 능상(陵上) 안에는 시신이 없다. 정릉의 경우는 좀 더 특수한데,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침에서는 아예 잿더미들만 나왔지만, 중종의 능침에서는 시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해 원로 대신에서부터 궁중의 나인들까지 동원되어 살펴보았지만, 중종이 승하한 지 오래되어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남은 사람들도 고령이라 확인이 힘들었다.

<선정릉의 맥문동>

   남아있던 기록과 시신의 모습이 달랐고 중종이 승하할 당시가 더운 여름이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 때문에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어쨌든 선정릉의 세 능상은 모두 비어있으며 후에 보수하면서 새로 만들어 올린 의복들만 묻혀 있다. 그 시신이 정말 중종의 시신이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은 아직은 없다.

<정릉 무인석>

   사적 제199호로 지정된 선정릉은 <세계유산 조선 왕릉>으로 2009년 6월에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1392년부터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이끌어온 왕과 왕비의 무덤 42기 중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으로 지금까지 이곳에서 산릉제례(山陵祭禮)가 500년 이상 이어져 오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선정릉의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