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천장산과 의릉(懿陵)

와야 정유순 2020. 8. 19. 11:37

가깝고도 먼 길-천장산과 의릉(懿陵)

(2020년 8월 8일)

瓦也 정유순

   천장산(天藏山), 해발 140m의 낮은 산이지만 ‘하늘이 숨겨놓은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동대문구 회기동·청량리동과 성북구 월곡동·석관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불교사찰의 입지 유형 가운데 가장 빼어난 명당 터다. 천장산 연화사의 삼성각 상량문(上梁文)에는 ‘진여불보(眞如佛寶)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시방삼세(十方三世)에 두루하지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뜻에서 청장산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천장산과 의릉 지도>

   조선 시대에 이러한 연유로 천장산 일대는 조선 왕가의 능지(陵地)로 조성되었다.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무덤인 의릉(懿陵)이 북동쪽에 있고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묘가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승하로 남양주 홍릉으로 합장되기 전까지 남서쪽에 있었다. 그러나 ‘천하의 가장 빼어난 명당’이라던 홍릉이 갑자기 흉지(凶地)로 둔갑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永徽園)과 영친왕의 아들 이진(李晉)의 묘소인 숭인원(崇仁園)이 청량리 쪽에 있다.

<홍릉 터-산림과학원 내>

   오늘은 천장산과 의릉을 찾아보기 위해 서울지하철 6호선 상월곡역에서 출발한다. 월곡(月谷)이라는 지명은 천장산에서 뻗어 내린 지형(地形)이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소 장사들이 소를 몰고 아름답기로 소문 난 ‘신근솔’이란 솔밭에 숙박한 후 장위동 노병 도살장에 소를 팔고 달밤에 도착하여 잔월 아침에 흥정했기 때문에 ‘월곡’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도 한다.

<상월곡동 삼태기마을 벽화>

   상월곡역 4번 출구로 나와 햇살 어린이공원을 지나면 서울국유림관리소 삼태기 숲을 만난다. 국유림관리소는 나무를 심고 키우며 목재를 생산하여 공급하는 일을 하는 곳으로 산림청 소속 국가기관이다. 아울러 국유림 안에서 숲유치원 운영, 숲 해설, 등산로 정비 등 국민의 건강, 치유 활동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삼태기 숲도 이러한 업무의 일환이다. 숲 안에는 시민들이 쉬며 생각할 수 있는 산책로와 정자가 마련되어 있고, 비단잉어가 노니는 못도 있다.

<서울국유림관리소 삼태기 숲>
<서울국유림사무소 정자>
<서울국유림관리소 못>

   삼태기 숲을 빠져나와 ‘천장산 산책로’로 접어든다. 이 길은 한때 중앙정보부가 들어서 금단의 땅이었고, 지금도 기관마다 영역 구분이 엄격하여 일부 능선의 통행이 막혔던 곳을 시민들을 위해 능선의 경계에 좁게나마 데크를 설치하고 군사시설을 제외한 산길을 겨우겨우 열어 최근에 산책로를 조성한 길이다. 구간마다 운동 시설과 쉼터 등이 마련되어 있어 휴식을 취하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도록 하였다.

<천장산 산책로>

    노약자 어린이 등 보행 약자를 포함한 남녀노소가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으나 일부 구간은 가파른 계단도 있다. 북쪽으로 향한 전망대에서는 북한산이 지척이나 흐린 날씨 때문에 눈으로만 짐작한다. 산책길 옆으로 쳐진 철조망은 이곳에 입주한 기관들의 영역을 표시한 것 같다. 천장산자락에는 지금도 국립산림과학원과 국립과학기술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관련 기관들이 많이 있다.

<구름에 가린 북한산 쪽>

    숨 가쁘게 올라 전망대에서 서쪽 자락으로 내려오면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석관동 캠퍼스다. 이 학교는 전문예술인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예술 분야 특수대학으로, 서초동 캠퍼스와 석관동 캠퍼스로 구성되어 있다. 음악, 연극, 영상, 무용, 미술, 전통예술 등 6개 분야에서 창조적 전업 예술가를 육성하기 위한 전문교육을 하고 있다. 1대1 레슨, 그룹별 토론, 전공별 워크숍, 공동제작, 현장실습 등 실기 및 제작 위주의 교육을 진행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종합학교로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국가적 차원의 엘리트를 양성하여 대한민국 문화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 개인의 충분한 창의적 재능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정원에 미달 되어도 선발하지 않는 독특한 입시제도는 진정한 예술적 재능과 잠재적 가능성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창조적 소수를 지향하는 교육 철학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국내 경쟁을 넘어 세계정상급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

    이 캠퍼스는 구 중앙정보부 건물을 사용하고 있으며 사적 제204호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의릉(懿陵)구역 안에 있어, 문화재청 요청으로 석관동 캠퍼스와 서초동 캠퍼스를 통합하여 이전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한다. 학교 명칭도 국립한국예술대학교로 변경하려 했으나 번번이 설치령 개정이 좌절되어 현재까지도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한예종-구 중앙정보부 건물>
<중앙정보부 터 표지>

   능 안의 한예종 큰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조그마한 연못에는 수련이 만개하였고, 작은 정원에는 목 백일홍 배롱나무는 말복 날 뜨거운 열기를 붉은색으로 함께 달군다. 홍살문과 정자각이 나란히 보여 오늘의 목적지인 의릉에 다 왔나 싶었는데, 능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다시 구릉을 올라 천장산을 다녀온다. 정상에는 아무런 표석이 없고 서쪽을 향하여 철조망만 굳건히 닫혀 있다. 능을 향하여 굽은 소나무는 이곳의 비밀을 알고 있을까?

<배롱나무>
<수련>
<천장산 가는 산책로>

   다시 의릉 뒷길을 따라 당도한 곳은 구 중앙정보부 강당이다. 1962년에 건축된 왼쪽 강당은 1972년 7월 4일 남한과 북한의 합의에 따라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성 있는 건물로 인정되어 등록문화재(제92호, 2004년 9월 4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7·4남북공동성명’은 그해 말 박정희의 유신헌법과 김일성의 사회주의 개정헌법의 모태로 정략적으로 이용되고 사실상 용도 폐기되고 말았다.

<구 중앙정보부 강당(좌)과 회의실>

    의릉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魚氏)의 왕릉이다. 효종의 영릉(寧陵)과 같은 양식인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인데, 아래쪽에 선의왕후 어씨가 묻혀 있고 위에 경종이 묻혀 있다. 이러한 배치 양식은 유교적인 이유와 안치한 주검이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적 자리매김 때문이라고 한다.

<천장산과 의릉>

    그런데 1701년 경종의 나이 14세 때, 평생 그에게 불행의 그림자로 남을 사건이 발생한다. 사약(賜藥)을 받은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나면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들의 낭심(囊心)을 잡아당겨 기절시키는 바람에 세자는 그 후 평생을 병약한 몸으로 살다가 1720년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재위 4년 만인 1724년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37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의릉 정자각>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1730) 어씨(魚氏)는 본관이 함종으로 영돈녕부사 함원부원군 어유구(魚有龜, 1675~1740)의 여(女)로서 숙종 31년(1705) 10월 29일 한성부 동부 숭교방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숙종 44년(1718) 2월 세자빈 심씨(沈氏)가 죽자, 이해 9월 13일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경종이 즉위함에 왕비가 되었으며 영조 즉위년(1724)에 왕대비로 올렸다. 영조 6년(1730) 6월 29일 경희궁 어조당에서 소생 없이 26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경종릉 아래에 예장(禮葬)하였다.

<의릉-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의릉은 대왕릉엔 병풍석을 세우지 아니하고 능침 주위로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난간 석주에는 십이지(十二支)가 방위에 따라 문자로 새겨졌으며, 난간석 밖으로 석양과 석호 각 2쌍이 밖을 향하여 배설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1좌, 그 양측에 망주석 1쌍이 있으며, 3면의 곡장으로서 제1계가 된다.

<경종릉>

  한 단 아래 제2계엔 문인석 1쌍과 석마 1쌍이 상면 설치되었고, 중앙에 사각형 장명등 1좌가 있다. 그 한 단 아래엔 무인석과 석마 각 1쌍이 문인석의 예와 같이 배치되어 있다. 대왕릉 아래 왕비릉엔 곡장이 설치되지 아니하였는데, 이것은 부부의 예로서 한 곡장 안에 두 봉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난간석, 수석,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의 상설은 대왕릉과 같다.

<선의왕후릉>

   비릉(妃陵) 사초지(莎草地) 아래에 정자각이 있으며 정자각 동북편에 비각이 있고, 정자각 동측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다. 재실(齋室)은 홍살문 동북방 도로변에 있었으나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의 묘역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경역(境域) 내의 영원(英園) 재실로 1973년 이건 되었으며, 재실지는 국악예술고등학교 부지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일반 주택단지로 되었다.

<의릉 후면에서>

   그러면 의릉의 구역 안으로 중앙정보부가 어떻게 들어왔을까? 1961년 5·16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군사정권은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같은 중앙정보부를 1962년 창설하였다. 이때 초대 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이 청사부지로 선택한 곳이 의릉이었다. 왕릉 부지를 꿰찬 중앙정보부는 이곳에서 ‘정부 위의 비밀 정부’로 군림하며, 의릉 경역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훼손했다. 마구잡이로 건물을 지었으며, 인공 연못과 일본식 정원, 잔디 구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의릉 정자각 내부>

    특히 의릉 밑에 양지못이라는 인공 연못이 있었는데, 왕릉 아래 못을 팠다고 해서 전주이씨(全州李氏) 종친으로부터 많은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1972년 남산 중앙정보부 분실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곳은‘남자와 여자를 서로 바꿔 만드는 일’말고는 모든 게 다 가능했다는 곳이었다. 깜깜한‘정치의 무덤’에서 모진 세월을 견뎠을 가여운 왕 경종이나, 일제강점기부터 권력의 횡포에 시달렸던 천장산은 지금도 그 잔재들로 허덕인다.

<의릉 비각>
<의릉비문-조선국 경종대왕 의릉 선의왕후 부>

    의릉 우측 옆으로 사초지를 따라 내려가면 주목 군락 숲속에는 대리석에 ‘<천장향>’이란 제목의 글이 숨어 있다. “천년 비바람을/이겨낸 푸른 모습/이 땅 겨레의/고난을 극복한/굳센 의지를 본다. 1976. 10 노산 이은상이 짓고 찬내 김충현이 쓰다라고 쓴 시비가 있다. 천장산의 굳건한 모습을 노래한 것인지? 오랜 역사를 이어온 겨레를 찬양한 것인지? 또는 이곳에 있던 중앙정보부의 공덕을 칭송한 것인지? 설명이 없어서 도무지 알 수 없다. 이렇게 꼭꼭 숨겨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노산 이은상 시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릉에 가자고 하면 택시기사가 그곳이 어디냐’고 되물어왔다는 의릉을 나와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으로 이동하여 오늘 일정을 마무리한다. ‘돌곶이마을’은 천장산자락의 검은 돌이 수수팥떡이나 경단을 꼬챙이에 꽂아 놓은 것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를 한자화하여 석관동(石串洞)이 되었다. 공포의 유산이었던 중앙정보부의 그늘이 걷혀 의릉이 원상회복되기를 기대해 보고, 더 나아가 일제 잔재의 흔적도 말끔히 걷어내어 하늘의 뜻이 저장되는 신비스러운 천장산을 그려본다.

<의릉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