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의 부부 봉 진안 마이산
(2020년 8월 15일)
瓦也 정유순
진안고원의 마이산을 가려고 새벽길 나서는데, 장맛비는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지 우산으로 막기가 힘들 지경이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수도권을 벗어나자 햇살은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빗방울 차창 두드리는 소리에 토막잠이 오락가락 한다.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지나 익산분기점에서 익산∼장수 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진안 나들목으로 나와 마이산 남부주차장에 도착한다. 오는 길이 막혀 예정시간보다 1시간가량 늦었다.
여장(旅裝)을 다시 꾸리고 마이산 고금당(古金塘)골로 들어선다. 입구 길목에는 듬직한 몸매와 넉넉한 웃음으로 세상을 포용하는 포대화상이 포근함을 안겨준다. 포대(布袋)는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십국 시대까지 명주(현재의 중국 저장성 닝보시)에 실재했다는 고승 정웅대사라고도 부르는 전설적인 불승이다. 흔히 수묵화의 좋은 소재로 여겨지며 큰 포대를 멘 배불뚝이 승려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포대화상의 모습은 특이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충만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푸른 숲이 있는 산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말복(末伏) 날 더위는 체내의 물기를 다 끄집어내어 속곳까지 다 적신다. 멀리 마이산은 봉우리만 살짝 보이며 어서 오라 손짓한다. 그래도 숲길을 지날 때는 가끔은 콧노래도 삐져나온다. 가파른 바위에는 고금당나옹암(古金塘懶翁庵)의 금빛이 반짝인다. 이곳은 나옹선사의 수도처(修道處)로 전해오는 자연 암굴(暗窟)로 원래 금당사(金塘寺) 있었던 자리라 일명 고금당(古金塘)이라 한다.
혹시 이곳에서 나옹선사가 수도하던 중 그 유명한 해탈시(解脫詩) <청산은 나를 보고(靑山兮要我)>를 만드셨나? 고금당 바위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니 ‘바람 가듯 물 흐르듯(行雲流水) 살라’ 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나옹(懶翁, 1320∼1376)은 법명은 혜근(惠勤)이고, 속성은 아씨(牙氏)다. 20세에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득도하였고, 중국으로 건너가 인도의 지공화상(指空和尙)으로부터 법(法)을 받아 귀국 후 고려불교 중흥에 많은 공을 세웠다. 1371년 공민왕(恭愍王)의 왕사가 되었고, 보우(普愚) 무학(無學) 등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토굴가(土窟歌) 등 많은 시와 가사를 남기고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入寂)하였다.
고금당나옹암을 짧은 거리지만 비탈진 바위 위를 조심스럽게 되돌아 나오는데 관절통 등 주로 운동계의 통증에 효염 있다는 꾸지뽕이 붉게 익어가는 9월을 기다린다. 등산로를 따라 멀리 보이는 마이산을 향해 다가가면 처사봉(527m)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비룡대(飛龍臺)다. 비룡대 위에 1998년 건립한 팔각정은 호남정맥과 금남정맥, 백두대간과 호남평야가 동서남북으로 이어지는 태극(太極) 지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나봉암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으나 이 이름의 출전(出典)은 불분명하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국토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산줄기다. 금남정맥(錦南正脈) 진안의 마이산으로부터 북쪽으로 뻗어 전라북도 진안의 주화산을 거쳐, 금산의 병산과 대둔산, 충청도 공주의 계룡산, 부여의 부소산에 이르는 금강 남쪽의 산줄기다. 호남정맥(湖南正脈)은 진안의 마이산에서 시작하여 전주의 웅치, 정읍의 칠보산, 장성의 백암산, 담양의 금성산성, 광주의 무등산, 능주의 천운산, 장흥의 사자산, 순천의 조계산, 광양의 백운산에 이르는 ‘ㄴ’자형 산줄기다.
비룡대를 내려와 다시 암마이산을 향해 발걸음 내민다. 땀은 이미 온몸을 적시어 걸을 때마다 방울지어 땅으로 뚝뚝 떨어진다. 평소에 내 몸이 남보다 수분이 많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많게 경험하기는 처음 같다. 올해의 복 달음은 확실히 하는 것 같다. 상어같이 입을 딱 벌린 바위 밑으로 작대기를 받쳐둔 모습은 겨울에 참새를 잡기 위해 삼태기 밑에 모이를 뿌려 놓고 막대기를 받쳐 놓은 동심(童心)이로다.
드디어 암마이산 입구 초소에 당도하여 배낭을 벗어놓고 맨몸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마이산(馬耳山)은 말 그대로 ‘말의 귀’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때는 서다산(西多山), 고려 시대에는 용출산(龍出山), 조선 시대부터 마이산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두 봉우리의 높이는 숫마이산이 685m, 암마이산 678m다. 산 전체가 거대한 백악기의 역암(礫岩)으로 바위이기 때문에 나무는 그리 많지 않으나 군데군데 관목과 침엽수와 활엽수가 자란다.
마이산은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르다. 봄에는 안개 속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 사이에서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이산의 정상인 숫마이산 중턱의 화암굴에는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약수가 솟는다고 한다.
경사가 가파르고 좁은 계단으로 오르기가 무척 힘이 들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새로운 힘이 솟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송이 연꽃처럼 피어오르는 숫마이산의 기를 받아서 그러는 걸까? 암마이산 바위에 푸르게 푸르게 돋아나는 이끼 때문일까? 맑고 푸른 하늘로 더 가까이 다가서서 그러는 걸까? 청정한 진안고원의 깨끗한 공기 때문일까? 깊은숨 몇 번인가 내 쉬었더니 암마이산 정상이다.
정상을 지나 조망대에 올라서니 오늘 더듬어 온 궤적들이 훤히 보인다. 출발했던 남부주차장, 금빛 물든 고금당, 용이 나르는 비룡대가 있는 나봉암 그리고 멀리는 서쪽으로 모악산이 흐릿하게 보이고, 동쪽으로는 덕유산이, 북쪽으로는 운장산이 희미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발밑으로 펼쳐지는 진안고원(鎭安高原)이 모두 내 정원이로다. 경관이 아름답고 특이하며, 수많은 풍화혈이 발달하여 학술적 연구가치가 크다. 1979년 10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3년 10월에는 전북기념물에서 명승 제12호로 격상되었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을 분리해서 계단을 설치했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도 상당히 효율적이다. 올라갈 때는 무척 힘들었지만 내려올 때는 금방이다. 아쉬움에 뒤를 힐끔힐끔 되돌아본다. 숫마이산은 더 가까이 다가선다. 욕심 같아서는 두 산 사이에 있는 448개의 층계를 단숨에 뛰어오르고 싶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그 길을 그저 멍하니 바라본다. 숫마이산은 산정이 날카롭고 사람이 등반할 수 없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산 남쪽 비탈면에서는 섬진강 수계가, 북쪽 비탈면에서는 금강 수계가 발원한다. 하늘에서 같은 구름을 타고 노닐다가 빗방울이 되어 암마이산과 숫마이산 중간의 천왕문 수분대(水分臺)로 뚝 떨어져 북쪽으로 흘러내리면 금강을 이루고 남쪽으로 흘러내리면 섬진강을 이루니, 운명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찰나의 순간마저 자연이 만들어내는 섭리다.
마이산의 암봉들 사면에는 벌집처럼 울퉁불퉁 구멍이 나 있는 타포니를 볼 수 있다. 이는 풍화혈(風化穴)로 암석의 표면이 오랜 시간 동안 물과 바람 등에 깎여나가면서 만들어진 현상으로 마이산과 같은 거대한 규모는 세계적으로 드물다고 한다. 마이산을 오르내리며 역암(礫巖)을 보고 느낀 점은 모래와 자갈을 섞어 만든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이 산은 기이한 경관 때문에 예로부터 민족의 영산으로 숭상되어왔다.
천왕문에서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면 은수사다. 은수사(銀水寺)는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李成桂)가 왕조의 꿈을 꾸며 기도를 드렸던 곳으로, 기도 중에 마신 샘물이 은같이 맑아 이름이 은수사라 붙여졌다. 현재 샘물 곁에는 기도를 마친 증표로 심은 청실배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위용을 자랑하고, 왕권의 상징인 금척(金尺)을 받는 몽금척수수도(夢金尺授受圖)와 왕의 상징인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태극전(太極殿)에 모셔져 있다.
특히 천연기념물(제386호, 1997년 12월 30일)로 지정된 청실배나무는 지형과 지세의 영향으로 산 밑에서 산정을 향해 바람이 불어오면 거센 회오리바람이 되며, 이때 청실배나무의 단단한 잎을 흔들어 표현하기 어려운 소리가 나고, 겨울철에는 청실배나무 밑둥 옆에 정화수를 담아두면 나뭇가지 끝을 향해 역(逆)고드름이 생기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청실배는 기침·해소·천식에 효과가 있다. 이곳에는 이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며, 일명 아그배 또는 독배라고도 한다.
은수사에서 남쪽 아래로 내려오면 탑사다. 탑사는 이갑용 처사가 쌓은 80여 개의 돌탑으로 유명하다. 돌탑들의 형태는 일자형과 원뿔형이 대부분이고 크기는 다양하다. 대웅전 뒤의 천지탑 한 쌍이 가장 큰데, 어른 키의 약3배 정도 높이다. 이 돌탑들은 1800년대 후반 이갑용 처사가 혼자 쌓은 것으로 낮에 돌을 모으고 밤에 탑을 쌓았다고 한다. 이 탑들은 이제 10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아무리 거센 강풍이 불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탑사의 주탑인 천지탑을 정점으로 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줄줄이 세워져 있고 팔진법의 배열(配列)에 따라 쌓았다고 전해지며, 당초에는 120기 정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80여 기가 남아 있다. 맨 앞 양쪽에 있는 탑을 일광탑·월광탑이라 하며 마이산 탑군은 태풍에 흔들리기는 하나 무너지지 않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데 이는 조탑자(造塔者)가 바람의 방향 등을 고려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천지탑(天地塔)은 부부탑(夫婦塔) 2기로 되어있으며 높이는 13.5m이고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다.
탑사에서 남부주차장 쪽으로 1㎞쯤 내려오면 탑영제(塔影堤)다. 이곳에서 올려다보면 탑사는 산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암마이산과 나도산 등이 유연한 자태로 저수지 수면을 비추고 있다. 이곳은 큰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사찰에서는 방생(放生)의 최적지로 꼽힌다. 탑영제 주변에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부유데크 등을 설치해 물 위를 걸으며 특색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봄이면 주변으로 펼쳐지는 벚꽃은 더 화사한 봄을 만든다.
탑영제를 지나 오전에 출발했던 남부주차장에 도착하면 주차장 가운데에는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814년(현덕왕 6) 중국 승려 혜감(惠鑑)이 창건한 금당사(金塘寺)의 일주문이 있고,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있는 경내 안에는 ‘금당영지(金堂靈地)’표지석이 있다. 극락보전과 9층 석탑은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전라북도 문화재자료(제122호)로 지정된 금당사 석탑은 옛날을 회상한다.
산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서는 길손에게 마이산은 탄생 신화를 들려준다.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천상에서 쫓겨난 산신 부부가 이 세상에 내려와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낸 뒤, 천상세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조건은 하늘로 돌아가는 모습을 들키지 말아야 하는데, 여신은 밤이 무서워 새벽에 떠나자고 우겨 이튿날 새벽에 하늘을 향해 솟고 있을 때, 한 아낙네가 이를 보고 놀라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암수 마이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 유일의 부부산(夫婦山)이 되었다는 마이산 신화 소리가 여운으로 길게 메아리칠 때 긴 장마 끝에 보이는 서쪽 하늘에는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차창을 비춘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석양이다. 그러나 저 붉은 노을이 내일에는 뜨거운 폭염(暴炎)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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