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여덟 번째-4)

와야 정유순 2019. 10. 10. 19:36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여덟 번째-4)

(여주시 도리-이포보, 201992829)

瓦也 정유순

   이포보를 건너면 산성이 있는 파사산(230.4m)이다. 파사산성(婆娑山城)은 이 산의 꼭대기에 돌로 쌓은 성이다. 거의 일직선으로 약 20여 분 동안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다. 파사산은 한강의 수상교통과 중부 내륙의 육상교통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포대교를 중심으로 한강의 상류와 하류의 넓은 유역이 한눈에 내려 보인다. 성의 둘레는 1,800m이고, 최대높이는 약 6.5m(낮은 곳은 1.4m)로 규모가 큰 편이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일부 구간은 최근에 복원했다.

 

<파사성 올라가는 길>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에 있는 파사산성(婆娑山城)은 신라의 파사왕(婆娑王, 80~112) 때에 축성하여 파사성(婆娑城)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고, 산 이름도 파사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파사산성에 관한 문헌적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595(선조 28)에 처음 보이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파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파사산성에서 본 남한강(양평)>

 

   성문 입구로 들어서 성벽 위로 올라서면 이포대교와 이포보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으로는 양평의 용문산(龍門山, 1157m)이 병풍처럼 둘러쳐진다. 파사산성 정상에 서면 동북쪽으로는 투구를 엎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주읍산이 보인다. 양평군 개군면에 있는 주읍산(主邑山, 해발 583m)의 원래 이름은 추읍산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따라 추읍리가 주읍리로 바뀌면서 산 이름도 주읍산으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이 산에 오르면 주변 일곱 개의 읍이 내려 보인다고 해서 칠읍산이라고도 불렀다.

 

<파사산성에서 본 이포대교>

 

<용문산 원경>

 

<파사산성에서 본 주읍산>

 

   유적으로는 천서리를 면한 곳에 동문지(東門址)가 있고,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를 면한 곳에 남문지(南門址)가 남아 있다. 동문지에는 옹성문지(甕城門址)가 있고, 남문지에는 문루(門樓)를 세웠던 고주형초석(高柱形礎石) 2개와 평주초석(平柱礎石) 등이 남아 있다. 성벽을 살펴보면 초창기의 성벽과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때의 성벽을 구별할 수 있다.

 

<파사산성 동문지 표지>

 

   임진왜란 중에는 파사산성 수축에 대한 논의가 많이 진행되었고, 왜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도 경기도의 좌··(左右中) 삼로(三路)에 있는 산성을 수축하고 경영해서 서울 방어에 계획을 세우는 것이 급무(急務)라고 판단하였고, 선조도 왜적을 방어하는 여러 방도를 전교하면서 한강(漢江)을 사수(死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강을 지키지 않았다가 적이 성 아래까지 이르러, 적에게 포위당한 뒤에야 도성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 계책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파사산성>

 

   유성룡은 경기지역의 수로군(水路軍)을 모두 주사(舟師)에 소속시켜 농한기(農閑期)에 수전(水戰)을 연습시켰다가 유사시에는 그들을 거느리고 책응(策應)하게 하며, 여주(驪州지평(砥平) 등 먼 고을의 수군(水軍)은 제번(除番)시켜 파사성(婆娑城)에 소속되게 하여 상류(上流) 쪽을 방비하게 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변사에서도 파사산성(婆娑山城)은 상류의 요충지로 용진(龍津)과 더불어 서로 의지가 될 만합니다.”라고 하면서 파사산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파사산성벽>

 

   파사성을 내려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는 한 울타리 안에 두 분의 임금을 모신 왕릉으로 이동한다. 이름이 묘하게도 모두 영릉인데, 한 분은 세종대왕을 모신 英陵(영릉)이고, 또 한 분은 효종대왕을 모신 寧陵(영릉)이다. 이 능역(陵域)19705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고, 2009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녕릉 지도>

 

  매표소를 지나 먼저 寧陵으로 올라간다. 寧陵(영릉)은 효종(孝宗 1619 1659, 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16181674)의 무덤이다. 왕릉과 왕비 능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라고 한다. 처음엔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의 태조 무덤인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샐 염려가 있다 하여 1673(현종 14) 세종의 무덤인 영릉(英陵) 동쪽으로 능을 옮겼다.

 

<효종대왕 寧陵>

 

   왕릉 바깥쪽으로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童子石)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石羊석호(石虎) 2, 상석 1, 망주석 1, 문인석·석마(石馬) 1, 장명등 1, 무인석·석마 각 1쌍이고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다.

 

<인선왕후 릉>

 

   홍살문[홍전문(紅箭門)]은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문이며,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정자각(丁字閣)은 왕릉(王陵) 등의 바로 앞에 짓는 자형 침전(寢殿)으로 제례(祭禮) 때는 이곳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정자각 뒤의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石函)은 제사가 끝난 뒤 철상(撤床)하면서 축문을 태워 묻는 곳인데 이를 예감(瘞坎)이라 한다. 정자각 우측 뒤로는 영릉비(寧陵碑)가 있는데, 이는 효종대왕 릉의 조성경위를 기록한 것이다.

 

<홍살문>

 

<정자각>

 

<효종 寧陵 비>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흐르는 금천(禁川)을 건너 밖으로 나와 왕의 숲길을 따라 세종대왕이 계신 英陵(영릉) 쪽으로 가야 하는데, 왕의 숲길은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영릉(寧陵)을 연결하는 길로 조선왕조실록에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영릉(寧陵)을 먼저 참배한 후 영릉(英陵)을 참배했다는 기록에 따라 조성한 길로, 이 길을 걸으며 왕의 발자취를 느껴보라는 의미가 있다.

 

<왕의 숲길>

 

<세종대왕릉 관람제한>

 

   그러나 英陵(영릉)의 보수공사로 출입을 막아 발길을 돌려 효종의 寧陵(영릉) 재실을 둘러 본다. 일반적인 조선 시대 재실은 재방, 안향청, 제기고, 전사청,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조선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 되어 원형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이곳 영릉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잘 되어 있다.

 

<효종 寧陵 재실>

 

   또한 경내의 재향과 관계있는 향나무와 느티나무, 회양목 등의 고목도 함께 어우러져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 시대 재실 건축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보물(1532)로 지정되었다. 특히 회양목은 원래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이곳의 회양목은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년 이상 크게 자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나무로 유래와 역사가 깊어 천연기념물(459, 20054)로 지정되었다.

 

<회양목>

 

<느티나무>

 

   참고로 英陵(영릉)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446)를 합장한 무덤이다.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랐다고 한다. 국조오례의는 조선 초기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등 오례(五禮)에 관한 의식절차를 기록한 책이다.

 

<세종대왕 영정>

 

   원래 英陵(영릉)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獻陵, 태종의 능) 경내에 왕과 왕비를 합장하여 쌍실을 갖추고 있었으나, 터가 좋지 않아 1469(예종1)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설치되었으며,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魂遊石) 2좌를 마련하여 합장 능임을 표시하였으며, 난간 석에 12지신 상을 조각하는 대신 12지를 문자로 표현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고 한다. 혼유석은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은 직사각형의 돌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돌이다.

 

<세종대왕 英陵>

 

   영릉 밖에 있는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는 훈민정음의 초성 ㅎㅁㅈㅇ자를 입구에 형상화 해놓았다. 내부에는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세종실록)”는 기본으로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기구를 발명하여 혼천의(渾天儀) 등 천문관측기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었으며, 우리 실정에 맞는 농사직설(農事直設)을 제작하여 널리 배포하였고 아악(雅樂)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업적의 바탕에는 세종의 애민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

 

<훈민정음 조형물>

 

   남한강의 여강길을 마무리하면서 옛 선조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했던 여주팔경(驪州八景)을 회상해본다.

1경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정겨웁고<神勒暮鍾(신륵모종)>

2경 마암 앞 강가에 고기잡이배가 밝히는 등불<馬巖漁燈(마암어등)>

3경 강 건너 학동마을 밥 짓는 연기<鶴洞暮煙(학동모연)>와 어우러지고

4경 제비여울 돛단배 귀항하는 모습<燕灘歸帆(연탄귀범)>

5경 양섬에 기러기 떼 내리는 모습<洋島落雁(양도낙안)>

6경 오학리 강변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八藪長林(팔수장림)>과 어울려 하나가 될 때

7경 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이 우는소리<二陵杜鵑(이릉두견)>

8파사성 소나기 스치는 광경<婆娑過雨(파사과우)>이 가경(佳景)이로다.

 

<여주팔경 조감도-네이버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