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여덟 번째-3)

와야 정유순 2019. 10. 9. 20:47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여덟 번째-3)

(여주시 도리-이포보, 201992829)

瓦也 정유순

   신륵사관광지 안에 있는 숙소에서 새벽에 눈을 뜨니 아직도 밖은 깜깜하다. 가까운 신륵사를 산책하기 위해 새벽공기 가르고 숙소를 나서보니 그릇을 굽는 가마는 불이 환하다. 가마를 지키던 젊은 도공들은 소나무 장작불의 관리를 위해 밤샘을 한 것 같다. 여러 단계로 불길이 올라가는 과정마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가 보다. 이틀을 불로 굽고 삼일동안을 서서히 식혀야 완성품이 나온다고 한다. 대단한 끈기와 집념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도자기 가마>


   여명(黎明) 직전의 어둠이 더 짙고 그 위에 안개가 덧칠을 한다.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인 1376(우왕 2)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조선 성종 3)에는 영릉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는 대웅전 대신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極樂寶殿)이 본당이다.

<신륵사 극락보전>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강변 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처음 윤곽을 드러낸 게 신륵사 삼층석탑이다. 경기도문화재자료(133, 200411)로 지정된 평면방형의 3층 석탑으로, 다층전탑(多層塼塔) 부근 강변 암반에 위치해 있다. 석탑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 후기에 건립되었으며,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에 있는 기록을 볼 때 현재 탑이 위치한 장소에서 고려 말의 고승 나옹혜근을 다비(茶毘)한 후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삼층석탑>


  강월헌(江月軒)은 육각정으로 남한강 변 가파른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주변 경치가 뛰어나 남한강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현재 위치는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의 다비 장소였는데, 그의 문도들이 정자를 세우고 당호를 강월헌이라고 이름 붙였다. 강월헌에 올라 안개 낀 여강(驪江)을 바라보니 나옹선사의 선시(禪詩)가 저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靑山見我 無言以生, 청산견아 무언이생)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蒼空見我 無塵以生, 창공견아 무진이생)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解脫嗔怒 解脫貪慾, 해탈진노 해탈탐욕)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如山如水 生涯以去, 여산여수 생애이거)

<강월헌>


   여주 신륵사에는 나옹(懶翁) 무학(無學) 목은(牧隱)세 분의 스승이 있다. 나옹선사는 고려와 함께 쓰러져 가던 불교를 재충전하여 조선으로 넘겨준 큰 스님이다. 그가 입적한 신륵사는 나옹선사의 기념관이라 불릴 만큼 관련 문화재가 많다.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王師)였고,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다. 신륵사는 나옹과 함께 고려 시대 왕실과 불교 중흥을 위한 중심사찰이었다.

<나옹선사-네이버캡쳐>


무학대사(13271406)는 조선 최초이자 최후 왕사이다. 그는 18세에 출가하여 1353년에 원()에 가서 인도의 지공(指空, ?~1363)과 고려 나옹의 가르침을 받고, 1356년에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왕사가 되었다. 1414년에 황해도 평산 연봉사(烟峰寺)에 작은 거실을 마련하여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하고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강의했다. 그는 <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하여 불교에 대한 유생(儒生)들의 그릇된 견해를 반박했다.

<무학대사-네이버캡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의 스승으로 조선에 성리학이 기틀을 잡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신륵사에 대장경과 대장경각을 지어 봉안했고, 왕명으로 나옹선사의 비문을 지어 세우기도 하였다. 1377년에는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절하다가 139657일 여주 신륵사(神勒寺) 부근 연자탄(燕子灘, 제비여울)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던 중 갑자기 별세했다.

<목은 이색-네이버캡쳐>


  신륵사에는 기단 부분은 화강석으로, 탑신부(塔身部)는 벽돌과 축조된 6층인지 7층인지 애매모호 한 탑이 하나 있다. 그래서 이름이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이다. 보물(226)로 지정된 이 탑은 높이 약 9.4m이며, 그 구조는 일반 석탑의 기단과 유사한 2중의 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石段)이 있다. 이와같이 전체의 형태가 이례적이고, 벽돌의 반원 모양의 배열도 무질서한 것은 후세의 무지한 수리로 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륵사 다층전탑>


   신륵사에는 원래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고, <경률론(經律論)>을 인출(印出수장하던 대장각 조성을 기록한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가 있다. 이색은 공민왕 현릉(玄陵)의 자복(資福)과 부모님의 추복(追福)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였고 이숭인(李崇仁)에게 명하여 1380(우왕 6)부터 만들게 하였다. 비문은 자경 2의 해서로서, 직제학 권주(權鑄)의 글씨다. 현재 몸체의 문면(文面)은 크게 파손되어 있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으며, 높이 1.33m로 보물(230)이다.

<대장각기비각>


   나옹선사의 또 하나의 유물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이 신륵사 뒤편에 모셔져 있다. 보물(228)로 지정된 이 석종은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명으로 밀양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1376(우왕2)에 입적하게 되자 1379(우왕5)에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잡아 세운 것이다. 이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한 단층 기단에 받침 2단을 쌓은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며 고려 후기 석종 형태의 승탑 양식이다. 석종 옆에는 나옹의 행적을 기린 비가 있고, 불을 밝히는 석등이 서 있다.

<보제존자석종과 석등>

<보제존자석종비>


   조반을 마치고 오늘 걷기 출발점인 여주보로 이동하여 능서면을 지나 양화천을 건넌다. 안개로 시야가 가려 분간하기 좀 어렵지만, 여주의 양화천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양화천을 건너면 여주시 흥천면이다. 흥천면(興川面)은 본래 긴 내(복하천)가 흐르고 있어 길천면(吉川面)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흥곡면(興谷面)과 길천면이 통합되어 흥천면이라 했다. 흥천면은 법정리 14, 행정리 25, 자연마을 50개로 구성되었다. 복하천은 흥천면 중앙부를, 양화천은 동쪽 면계를 북동류하여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양화천교>

<복하천>


   양화천과 복하천 사이의 마을이 흥천면 상백리다. 이곳에서는 우리 고유명절인 단오축제가 열린다. 단오(端午)는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이기도 한 우리나라에서 큰 명절이었다. 단오의 풍속 및 행사로는 그네뛰기, 마을 어르신 장기자랑, 마을주민의 다양한 작품전시, 농사 풍년기원제, 창포물에 머리 감기, 주민 탈춤 한마당, 마을 노래자랑, 흥천농협 풍물공연, 여주 문인협회의 시 낭송 등 다채로운 행사 등이 행해진다. 농림축산식품부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상백리 마을 축제로 진행한다.

<상백리 표지석>


   복하천(福河川)을 건너면 계신리(桂信里). 지방도로 333호를 따라가다 좌측으로 들어가 도로 밑으로 하여 계신리마을회관을 지나 복하천이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이른다. 이곳에는 강원도에서 한강으로 내려오는 뗏목꾼들이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곳에 들려 기도를 하였다는계신리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곳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98)로 지정된 이 석불은 계신리 동쪽 400m 거리의 남한강변의 남향한 자연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마애여래입상이다.

<계신리 마을회관>


   이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은 계산리 부처울마을 한강변 암벽에 전체적으로 얇게 돋을새김을 했는데, 민머리 위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으며, 얼굴과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양 귀는 원만하게 드리워져 있다. 또한 눈, , , 입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둘러져 있다. 그리고 머리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3중 원형의 두광이 구비되었는데, 외곽에는 화염문이 조각되어 있다. 어깨로부터 흐르는 가사 자락은 양팔을 거쳐 발목까지 이어졌다.

<마애여래입상>


   오른손은 어깨높이로 들어 올리고, 왼손은 옆으로 벌리면서 자연스럽게 내렸다. 법의는 두 어깨를 가린 통견으로 불신 전면에 완만한 자형의 옷주름이 조각되었고, 가슴에는 내의의 매듭이 표현되었다. 양쪽 발은 벗은 채 노출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연꽃무늬의 좌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 불상은 원만한 상호, 유려한 의문, 당당한 어깨, 연화문 등에서 신라 시대의 양식을 엿볼 수도 있으나 부분적인 수법으로 보아 이 불상의 조성 시기는 고려 초기로 보인다. 마애석불 보호를 위해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마애여래입상 보호각>


   가을이 익어가는 계신리를 지나면 금사면 이포리다. 여주시 서북부에 위치한 금사면(金沙面)예로부터 하천에서 금()이 많이 채취되어 금사면이라고 하였다. 금사면은 여주시의 북단에 위치하여 옛날부터 남한강 뱃길의 관문 역할을 담당해온 이포나루가 있는 곳이다. 조선 초기 문장가 최숙정(崔淑精)을 비롯하여 명현석학들이 말해주듯 자연의 절경을 이룬 곳이다. 주록리(走鹿里)에는 한국 천도교 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의 묘가 있다. 특히 금싸라기 참외가 많이 나고, 남한강 변의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재배된다.

<금사면의 벼>


   이포리(梨浦里)는 조선 시대에 세곡과 물화를 싣고 풀던 큰 나루터로, 금사면 이포리와 대신면 천서리를 연결하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나루터였다. 조선 시대 서울의 마포나루와 광나루, 여주의 조포나루와 함께 4대 나루터였던 곳으로 가장 최근까지 존재했던 나루였으나, 1991년 천서리로 건너가는 이포대교가 건설되면서 나루의 기능이 소멸하였다. 이곳에는 배꽃이 예뻐 이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포에는 3년에 한 번씩 지내는 삼신당 당굿 역사가 600년이 넘게 이어져 오는 삼신당(三神堂)이 있다.

<이포나루 옛모습-여주시사 캡쳐>


   이포대교(梨浦大橋)는 길이 796m, 너비 12m, 높이는 9m이고 경간은 16개다. 주변 남한강 변은 경치가 아름답고 수심이 얕으며 자갈밭이 많아 오토캠핑장으로도 유명하여 여름철에는 가족 단위 피서객이 많이 몰린다. 이포나루는 이포대교가 생긴 뒤 나루터의 기능을 잃고 뱃사공도 사라졌다. 대교 건너 대신면 천서리는 막국수로 유명하다. 인근에 경기문화재자료(75)인 기천서원지(沂川書院址)와 모현사(慕賢祠)등이 있다.

<이포대교와 파사산>


   이포대교 바로 아래쪽에는 이포보가 있다. 이포보도 강천보와 여주보와 똑같은 용도와 목적으로 같은 시기에 금사면 외평리와 대신면 천서리를 연결하는 남한강에 설치된 보(). 이포보의 길이는 총 591m로 이 중 가동보가 295m, 고정보가 296m이며, 교각 상부에는 공도교(公道橋)가 설치되어 있다. 이포보는 백로(白鷺)의 날개 위에 알이 올려져 있는 형상으로 디자인되어 건설되었으며, 이포보 우안(右岸)에는 물고기가 다닐 수 있는 자연형 어도(魚道)와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이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