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여덟 번째-1)

와야 정유순 2019. 10. 7. 20:53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여덟 번째-1)

(여주시 도리-이포보, 201992829)

瓦也 정유순

 오늘의 첫 출발지는 여주시 점동면 도리 늘향골마을이다. 늘향골마을은 남한강과 청미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마을로 명성황후 후손들이 600년 이상 모여 사는 여흥민씨(驪興閔氏) 집성촌이다. 많은 동·식물들과 철새들이 살고있는 자연친화청정마을로 농촌체험과 자연생태체험을 할 수 있는 마을이다. 돛단배 모양의 마을 아홉사리고개에 핀 구절초는 늘향골마을의 상징이다. 그리고 늘 고향 같은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 특히 임진왜란과 한국전쟁도 비켜 간 평화로운 마을이다

 

<늘향골녹색농촌체험마을>

 

 강 건너 손에 잡힐 듯한 강천면 등평리(현 부평리)1885년 최초로 신학교가 개교하여 1887년에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 천주교 예수성심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강천면(康川面)은 본래 강원도 원주군에 속하던 곳으로, 1895(고종 32) 여주군에 편입되었다가 20139월 시()로 승격하면서 여주시에 속하였다. ‘강천(康川)’이라는 지명은 섬강(蟾江)과 남한강의 합류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모든 배가 편안하게 쉬어가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여강길 1코스 지도>

 

 늘향골마을 앞 강변을 지나면 소무산(韶舞山)자락으로 이어지는 아홉 사리 고개로 들어선다. ‘아홉 개의 산이 마치 국수를 삶아 말아 놓은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경상도나 충청도를 떠나온 유생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또 음력 999번째 고개에 피는 구절초를 꺾어 다려마시면 모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 길을 넘다 넘어지면 아홉 번을 굴러야만 살아서 넘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해져 온다.

 

<아홉사리고개길 입구>

 

 그리고 이 길을 이용한 선비들은 대부분 가난했다고 한다. 돈 많은 선비들은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물길을 따라 충주부터 한양의 마포나루까지 배를 타고 오갔을 것이고, 가난한 선비들은 배싹이라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금의환향하는 선비들은 이 길이 비단길 같았으나, 낙방한 선비들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여강을 바라보며 자신의 처한 처지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 스며있을 것만 같다

 

<아홉사리고개 밑 여강>

 

 강 건너에 강천섬이 보인다. 강천섬은 처음부터 존재한 섬이 아니다. 남한강 물이 불어나면서 육지와 분리되던 퇴적한 지형을 4대강 사업을 통해 조성된 인공 섬이다. 현재는 잘 관리된 공원과 적당히 방치하여 자연과 어우러진 공간 같다. 그리고 이 지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한강에서만 서식하는 단양쑥부쟁이 서식지로 알려진 곳이다. 4대강사업으로 개발될 때 환경단체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개발을 반대하며 멸종위기종인 단양쑥부쟁이를 보호하려 했지만 대체서식지를 만들어 준다는 당국의 힘에 밀리고 말았다

 

<강천섬 지도>

 

 숨 가쁘게 아홉사리고개를 넘으면 흔암리다. 흔암리(欣巖里)나루터는 강 건너 강천면 굴암리를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1972년 대홍수 때 물에 다 떠내려갔고 나루터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별장주택들이 터를 잡아가면서 여강길은 중간에 끊긴다. 나루터는 전부 밭으로 변했고, 나루터는 깃털처럼 바람에 날아갔다.

 

<늘향골녹색농촌체험마을>

 

 

 

 마을 강변 쪽 잔디가 넓은 어느 회사 연수원(휴양소)에는 지금까지 보아온 것 중 가장 높은 솟대가 하늘을 찌른다. 솟대는 원래 삼한(三韓)시대에 신을 모시던 장소인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 하늘에 전달하려는 뜻 같다. 소도로 세우는 입목(立木)과 그 위에 오리 모양의 새를 얹혀 놓은 것이 바로 솟대다. 새를 하늘과 인간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심부름꾼으로 생각한 것 같다. 소도라는 발음 자체도 솟대의 음이 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솟대>

 

 

 다시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면 흔암리유적지라는 표시와 함께 접근금지 표시가 나온다. 흔암리 유적은 경기도뿐만 아니라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곳 가운데 하나이나 지금도 발굴작업 중으로 접근이 안 된다. 유적은 흔암리 마을의 구릉 지대에 분포하며 여강에 인접하여 있다. 12호 집터에서는 여러 종류의 토기 및 석기와 함께 탄화된 벼, 보리, , 수수 등의 곡물이 발굴되었다. 흔암리 유적의 연대는 서기전 7세기 전후로 이야기되고 있으나 그보다 시기가 올라갈 가능성이 매우 크며, 벼농사의 발원지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흔암리 선사유적발굴지>

 

 몇 번인가 길이 끊겨 헤매다가 여주시 우만동에 들어서니 숲 사이로 어른거리던 영동고속도로 남한강교가 다가온다. 영동고속도로는 197112월 신갈에서 원주까지 2차선으로 개통되었다새말강릉 간 97구간은 197510월에 준공되었다. 기존 왕2차선에서 왕복 4차선으로의 확장공사는 신갈원주 구간의 경우 199412월에 완공되었고, 원주새말 구간은 1997년에 완공되었다. 신갈강릉 간 확장공사 중 마지막 구간인 횡계강릉 간 21.9구간이 200111월 개통되었다

 

<영동고속도로 남한강교 원경>

 

<영동고속도로 남한강교 교각 옆> 

 

남한강교 밑으로 빠지면 가슴높이 나무 둘레 6.5, 높이 18의 수령 300년 된 느티나무가 우만리 나루터를 지키고, 아래에는 여강의 자연을 화폭에 담는 화가들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우만리나루는 우만동과 강천면 가야리를 연결했던 나루다. 이 나루는 땔감을 구하러 강천으로 가는 사람과 원주의 주민들이 여주장과 장호원장을 이용했다고 한다. 1972년 홍수로 나루는 사라지고 느티나무만 남았다.

 

<우만리나루터 느티나무> 

 

우만리나루를 지나면 단현동(丹峴洞)이다. 단현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여주군 근동면의 단강리와 오현리를 합하여 단현리가 되었다. 단현리라는 이름은 마을 근처 강변의 바위들이 붉은 색을 띄고 있어 붉은 바위’, ‘붉바위’, ‘부라우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후 여주군 여주읍에 속하였다가 20139 여주군이 시()로 승격하면서 여주읍에 속하였던 단현리는 여흥동 관할의 단현동으로 개편되었다. 강변에 있었던 부라우나루터는 1975년에 패쇄되었다.

 

<단현1리 부라우마을 표지석>

 

오후에는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고달사지(高達寺址)로 짬을 내어 이동한다. 사적(382)으로 지정된 고달사는 일명 고달원(高達院)이라 부르는데, 신라 후기시대인 764(경덕왕 23)에 창건했으나, 고려 시대에 이르러 큰 도량으로 번성했으며, 17세기 후반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1개의 국보와 4개의 보물 등이 있는 큰 사찰이다. 고달사지 입구에서 400년 이상 빈터를 지켜온 느티나무를 지나 맨 위쪽에 있는 원종대사 탑과 고달사지 승탑으로 간다

<고달사지 지도>

<고달사지 입구 느티나무>

 

보물(7)로 지정된 원종대사(元宗大師)탑은 원종대사의 승탑으로 원종대사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삼단으로 이루어진 받침돌 위에 탑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이지만, 전체적으로 팔각 평면 형태를 기본으로 하였고 받침돌의 구조가 특이하다. 받침돌은 네모난 바닥 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겨 만들었는데, 아래는 네모 형태이고, 가운데 윗부분부터는 팔각이다. 원종대사 찬유(889958)는 고려 광종 때 고승이며, 이 비는 977년에 세웠다

 

<원종대사 승탑>

 

조금 위로 비켜 있는 고달사지 승탑은 국보(4)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 남아 있는 고려 시대 승탑이다. 이 탑은 바닥 형태가 팔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 부분 장식이 좀 부실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다. 승탑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돌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가운데 돌에는 거북 한 마리가 입체적으로 새겨 있다. 거북이 좌우에는 모두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거북과 용과 연꽃 등은 조금 전에 둘러본 원종대사 탑과 구조가 비슷한 면도 있는 것 같다.

 

<고달사지 승탑>

 

사리를 모셔 둔 탑 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을 새겼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모서리의 끝부분마다 큰 꽃 조각이 달려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모양의 보개(寶蓋)가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조각 양식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에서 고려 특유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고려 시대 전기인 10세기 무렵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을 다듬은 솜씨가 아주 세련된 작품이다

 

<탑돌>

 

탑 아래로 내려오면 고달사지가 넓게 펼쳐지고 원종대사의 업적을 기린 탑비가 있다. 이 비석은 받침돌과 비 몸, 머리 돌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15년 비 몸이 넘어지면서 여덟 조각으로 깨어지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해 오다가 지금은 여주박물관으로 옮겼으며, 이곳에는 2014년에 복제한 비가 설치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행적과 업적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거북 머리가 험상궂은 용머리에 가까우며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는 장식 등은 라말려초(羅末麗初)로 이어지는 탑비형식이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바로 아래에는 보물(8)로 지정된 석조대좌(石造臺座)가 있다. 대좌는 부처나 보살이 앉는 자리다. 받침돌은 3단으로 만든 대좌로 각 단이 별개의 돌이며 기본형은 사각형이다. 상단의 윗면은 불상을 안치하던 곳이며 잘 다듬어져 있고, 그 아래로 연꽃 24잎이 조각되었다. 중단(中段)은 간석(竿石)으로 사각형이며 각 면에 우주(隅柱)가 있고 위와 아래 끝은 층을 이룬다. 이 안에 커다란 안상(眼象)을 네면 모두에 조각하였다. 하단(下段)은 복련(覆蓮)의 겹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석조대좌>

 

넓은 절터를 대충 보고 나오는데, 큰 석조(石槽)가 나온다. 이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두거나 곡물을 씻을 때 사용하던 용기로 원형 등 다양한 형태의 용기가 있으나 이곳에 있는 것처럼 직사각형의 용기가 가장 많다. 그리고 이 석조처럼 건물 안에서 발견된 예는 드물다고 한다. 우수한 돌 다듬기 기법과 장식기법이 돋보이는 예술성이 뛰어난 석조이며, 이 석조를 통해 옛 고달사의 내력이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른 공터를 대충 살펴보고 오전을 마감했던 강천보로 이동한다.

 

<고달사지 석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