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진주(晉州)라 천리길(1)

와야 정유순 2019. 10. 16. 03:03

진주(晉州)라 천리길(1)

(20191056)

瓦也 정유순

  진주(晉州)라 천리길! 조선 시대 한양(漢陽)에서 아무리 빨라도 열흘 이상 걸렸을 거리인데, 지금은 4시간여 만에 도착한다. 진주는 고령가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신라 후기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되었고, 고려 태조 23(940)에 처음 진주로 되었으며, 조선 고종 33(1896)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어 경남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여전히 서부 경남의 중심지다.  


<진주시 지도>


  진주에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찾은 곳은 역시 진주성(晉州城)이다. 진주성은 고려 말까지 토성이었다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1603(선조 31)에 성을 다시 개축하면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게 되었다. 공북문(拱北門)은 내성의 북문이자 정문에 해당하는 문으로, 17세기 말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북(拱北)이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이다.

<공북문>


   진주성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우선 임진왜란 때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으로 불리는 진주대첩이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난 곳으로 그만큼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 진주는 경상도 일대를 관장하는 가장 큰 고을이었으며 고려 시대부터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방어하는 기지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진주성 지도>


  부산포를 시작으로 도성 한양까지 큰 저항 없이 진격했던 왜군들은 점차 경상도를 중심으로 조선 의병들의 반격 활동으로 후방에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조선 의병 활동의 중심에 진주성이 있었다. 평양성에서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한양으로 후퇴한 왜군은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고 호남지역으로 진출하여 안정적인 후방보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주성을 차지해야만 했다.

<진주 남강>


  바닷길을 통해 호남으로 진출할 수도 있었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가로막혀 있었다. 따라서 조선과 왜군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에서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을 벌이게 된다. 1차의 진주싸움은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하며, 왜군들이 대패하였다. 2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1차에 비해 5배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왜군에게 진주성은 함락되고 만다. 당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든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유명하.

<진주성임진대첩 계사순의단>


  성안에 들어서자마자 김시민장군 동상이 압권이다.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은 충청남도 천안(목천)에서 태어났다.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진주 판관(判官)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진주목사가 병사(病死)하자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군비(軍備)를 점검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고, 2만 명의 왜군(倭軍)이 쳐들어오자 3,800여 명의 민관군(民官軍)으로 7일 동안 싸워 승리한다. 그러나 김시민은 왜군이 쏜 총탄에 이마를 맞고, 7일 만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시호(諡號)는 충무공(忠武公)이다.

<충무공 김시민장군상>


  성안에서는 휴일을 맞아 찾아온 사람들로 붐빈다. 서둘러 촉석루로 발길을 옮기며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열정은/사랑보다도 강하다/!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흐르는 강물은/길이길이 푸르리니/그대의 꽃다운 혼/어이 아니 붉으랴변영로의 <논개>를 속으로 읊어댄다. 논개(論介)는 기생으로 알려졌으나, 장수현감을 지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였고, 그가 1593년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2차 진주성싸움에서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였다.

<논개영정>


  이 싸움으로 성을 점령한 왜적들은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였다. 이때 논개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한다. 깍지 낀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나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다. 이때 왜적(倭敵)에 의해 순절(殉節)7만 진주성민이 전쟁의 원혼이 되어 떠돌 때 제 한 몸을 던져 그 원수를 갚았으니 어찌 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의암>


  남강가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아 있는 촉석루(矗石樓)는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고려 공민왕 14(1365)에 세워져 일곱 번의 중수를 거쳤다. 진주성을 남장대(南將臺),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전쟁 때에는 지휘본부로, 평화로울 때는 과거를 치르는 시험장으로 쓰여 얻은 이름이다. 현재 건물은 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된 것을 1959년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며, 촉석산에서 돌을 캐다 누각을 지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촉석루>

<촉석루의 다른 이름 남장대>




   촉석루 바로 앞 절벽 아래에 작은 섬처럼 떠있는 바위가 있는데,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뛰어들었던 의암(義巖)이다. 물 위로 솟은 높이와 너비가 각각 약 3m 정도의 바위로 조금씩 움직여서 촉석루 쪽 절벽에 들러붙기도 떨어지기도 한다는데, 절벽에 와 닿으면 큰 재앙이 난다는 전설이 있다.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에는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촉석루 바로 옆에는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의기사(義妓祠)란 사당이 있어 묵념으로 예를 올린다.

<의암사적비>

<의기사>


   의기사 옆에 있는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국한 제말(諸沫, ?~1592)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 1558~1597)을 기린 비(). 제말 장군은 곽재우와, 제홍록은 이순신과 함께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일제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현재 자리로 옮겨 세웠다. 제말 장군의 비를 떠받치고 있는 거북의 표정이 순진하고 익살맞다.

<쌍충각>


  진주성은 원래 남쪽의 남강, 그리고 북쪽은 연못이 해자(垓子) 역할을 하는 천혜의 요새였으나, 일제강점기 때부터 도시 개발이 진행되며 연못들은 전부 매립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조선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서장대 아래를 해자로 하는 둘레 4km의 외성(外城)이 있었다고 한다. 문화재 발굴과정에서 조선 시대 외성, 고려 시대 토성(土城)과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수로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촉석루 아래 남강>


  진주성 안에는 촉석루와 공북문 외에도 서장대를 비롯하여 여러 유적이 가지런하게 정렬해 있다. 서문 지휘소인 서장대 옆에 위치한 호국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근거지였으며, 창렬사는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사당이다. 청계서원(淸溪書院)은 고려 때 목화씨를 처음 심어 목면(木綿) 베옷을 입게 한 문익점(文益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을 모셨다. 성내에 들어선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은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고 한다.


<월영산 호국사>


   대충 진주성을 살펴보고 <진주에나길>로 가기 위해 진주성에서 출발하여 진주중앙시장을 거쳐 북쪽의 비봉산으로 가야 하지만, 도보 일정과 도심 구간을 통과하기 때문에 버스로 비봉산 입구까지 이동한다. 진주에나길의에나’,‘진짜라는 의미의 진주 사투리다. 따라서 진주에나길은 진주의 참모습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시조인 고구려 강이식(姜以式)장군을 모신 사당인 봉산사(鳳山祠)가 있다.

<봉산문-네이버캡쳐>


   봉산사에서 올라가는 비봉산 초입의 데크계단을 따라 약 500m쯤 가파르게 올라가면 비봉산 정상이다. 이 구간에는 대나무 숲길이 눈길을 끈다. 비봉산의 옛 이름은 대봉산(大鳳山)이다. 고려 인종 때 척준경(拓俊京)이 임금에게 상주하여 진주강씨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대봉산의 봉암(鳳巖)을 깨뜨려 봉황을 날아가게 했고, 이름도 비봉산(飛鳳山, 138m)으로 바꿔버렸다. 그 이후 위기를 느낀 강 씨들은 날아간 봉황을 다시 부르기 위해 남강 강변과 비봉산에 대나무와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비봉산 입구>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이 소나무 한그루가 외롭게 정상을 지킨다. 소나무 주위로 단풍나무, 배롱나무, 등이 호위하듯 서 있다. 말안장 같은 정상을 지나면 평평한 고갯마루고 한쪽에는 느티나무가 널찍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 옛날 고개를 넘나들던 보부상들도 이 느티나무 그늘 덕을 보았으리라. 넘어가는 사람도, 넘어오는 사람도

<비봉산 정상>


   고갯마루에서 작은 언덕을 넘으면 두 갈림길이다. 어떤 길로 가도 나중에는 만나게 되지만 오른쪽 길로 가야 한다. 왼쪽 길은 임도, 오른쪽 길은 그늘 좋은 오솔길이다. 중간중간 시야가 터지는 곳에서 만나는 진주 시내 풍광은 한편의 파노라마다. 오솔길이 끝나는 언덕에는 201811월 준공된 대봉정(大鳳亭)이 있다. 산마루에 팔작지붕을 얹어 날아갈 듯 올라앉은 큼직한 대봉정의 이름은 비봉산 옛 이름인 대봉산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대봉정>


  대봉정을 내려와 임도를 따라가다 보면 마티고개를 가로지른 봉황교가 있다. 봉황교를 넘어서면 선학산(135m)이고 다시 숲길이다. 선학산도 높은 산은 아니라서 길은 여전히 부드럽게 이어진다. 숲으로 들어서니 가을향기 은목서가 길을 유혹한다. 천리향으로도 불리는 은목서(銀木犀)는 중국 원산으로 한국에서는 남부 지역에 서식하며, 노란 꽃이 피는 금목서와 대비하여 흰 꽃이 피는 것을 은목서라고 하며, 키는 3m 정도까지 자란다고 한다.

<은목서>


  봉황의 모습을 한 보행 교량인 봉황교(鳳凰橋)를 지나면 선학산이다. 선학산(仙鶴山, 135m)은 진산인 비봉산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서쪽으로는 남강에 면하여 절벽을 이루고 있고,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는 선학산 전망대 풍광도 대봉정 못지않다. 대봉정 풍광이 진주 시내 전체를 담고 있다면 선학산 전망대는 남강과 진주성 주변의 풍광을 잘 보여준다. 선학산은 명당으로 이름이 나서 진주소씨 시조묘를 비롯하여 진양하씨, 진양정씨 문중의 뛰어난 인물의 묘가 많이 있다고 한다

  <봉황교>

<선학산 정상>


   선학산 전망대에서 바로 남강으로 내려오는 길을 따라 진주교 입구 강변으로 간다. 햇살은 옆으로 길게 누워 남강에 붉은빛을 띄운다. 그러면서 남강 너머 첩첩한 산그늘이 지고, 저 멀리 지리산 줄기 위로 노을이 진다. 해는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는데 노을은 선연하게 붉어진다. 어둠 속으로 사위어 갈 때 남강의 유등은 일어날 시간이다. 남강의 어둠은 또 다른 빛을 발산한다.

<진주성의 낙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