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 - 종묘(宗廟)

와야 정유순 2019. 9. 19. 22:53

가깝고도 먼 길 - 종묘(宗廟)

瓦也 정유순

   우연히 종로를 거닐다가 종묘 옆을 지난다. 70년대만 해도 닭장 같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담장 아래로는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고, 주변으로 도로가 호위하듯 시야를 뻥 뚫어주니 지나는 발걸음도 가볍다. 그리고 종묘 앞도 공원과 광장으로 만들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종묘에 들어가 본지도 언제 들어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80년대 초반 집안 어른들 모시고 그 때 처음 와 본 것 같다.  

​<종묘지도>


  예부터 나라가 건국되면 제일 먼저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하여 정궁의 왼쪽에 종묘(宗廟)를 세워 왕가의 선조를 받들고, 우측에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백성을 위하여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社稷壇)을 세운다고 했다. 종묘는 역대 왕들의 위패(位牌)를 모신 왕실사당이고, 사직은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단()이다.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景福宮)이다.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종묘 외대문>


   종묘 입장은 입장권을 구입했다고 자유로이 입장하는 것이 아니고 관람시간 대에 맞춰 해설사의 안내와 설명을 들어가며 질서정연해야 한다. 15명쯤 되면 한 팀이 되어 관람을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와 인상적이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外大門)을 들어서면 세 갈래의 박석길인 삼로(三路, 또는 삼도) 보인다. 가운데 길을 조상의 혼령이 다니는 신로(神路), 오른쪽 길을 왕이 다니는 어로(御路), 왼쪽 길은 세자로(世子路).

​<종묘 삼로(三路)>


   종묘는 1392년 개성에서 개국한 조선왕조가 1394년 한양천도 후 처음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세기 초에 중건하였으며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외대문인 정문에 들어서면 우측으로는 1443(세종25)에 만든 우리고유의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형의 작은 연못이 있으며, 중앙의 섬에는 향나무가 있고 그 뒤에는 망묘루와 향대청이 있다.

​<종묘 연못>

 

   망묘루(望廟樓)는 제향(祭享) 때 임금이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종묘사직과 백성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건물 중 한 칸은 다락처럼 높은 누마루이며, 맞배지붕의 소박한 다른 종묘 건물과는 달리 누마루 쪽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향대청(香大廳)은 향··(··)를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종묘 향대청>

​<종묘 망묘루>


   향대청을 지나면 재궁(齋宮)이 나온다. 재궁은 어재실(御齋室) 또는 어숙실(御肅室)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임금이 제향(祭享)할 때 세자와 함께 머물면서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뜰을 중심으로 북쪽에 임금이 머물던 어재실이 있고,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으며, 서쪽에 임금이 목욕을 하던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 임금은 제사를 올리기 3일 전부터 매일 목욕재계를 하고, 하루 전에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종묘재궁>

​<세자재실>

​<어목욕청>


   재궁을 지나면 전사청이다. 종묘 전사청(典祀廳)은 종묘제례에 올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제사에 관한 일을 처리하던 전사관이 사용하던 방도 있었으며, 제물로 바치는 짐승을 도살하던 공간도 따로 있었다. 건물은 자형으로 배치되었고, 주실(主室)은 정면 7·측면 2칸 규모이며 좌우 행각에는 온돌방과 마루방을 들였다. 마당에는 제수를 장만할 때 사용하던 돌절구 같은 큼직한 돌이 4개 있다. 전사청의 동쪽에는 신정(神井)으로도 불리는 제정(祭井) 우물이 있다.

​<전사청>


   전사청 앞에는 천막단과 성생판이 있다. 찬막단(饌幕檀)은 정방형의 단으로 두 벌의 장대석을 돌리고 위에 방전(方塼)을 깐 형태를 하고 있다. 전사청에서 만든 제수를 진설해 놓고 잘못된 곳이 있는 지를 전사관(典祀官)이 살펴보기 위한 시설이다. 성생판(省牲版)은 외벌의 장대석으로 경계석을 삼고 검은색 방전을 깔은 판위 형상을 하고 있다. 대제에 사용할 삼생(三牲:··돼지)이 제수로서 적합한 지 여부를 살펴보기 위한 곳이다. ··돼지를 잡던 재생방(宰牲房)은 전사청 북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종묘 천막단>


   국보(227)로 지정된 정전(正殿)은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 중 공덕이 높은 임금과 비의 신위만을 모신 건물로, 현재 조선왕조의 임금 중 19분의 신위와 비() 30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몸체에 직각방향으로 되어 있는 동서의 월랑을 제외하고도 정면이 25칸의 규모로서 101m나 된다. 정전으로 통하는 문은 3곳으로 남문은 신주의 혼령만 출입할 수 있으며, 동문은 왕과 세자 그리고 제례를 지내는 종친과 신하가 사용하고, 서문은 제례음악과 무용을 담당했던 악공들이 출입한다.

​<종묘 정전> 


   정전은 정중실(正中室), 익실(翼室), 월랑(月廊)의 세 부분으로 나눈다. 가운데 제일 큰 몸체를 가진 것이 종묘의 중심건물인 정중실이고, 그 좌우로 용마루를 높여서 하얗게 회를 바른 양성(兩城)이 한 단 낮게 연접한 것이 익실이다. 그리고 양쪽 익실의 끝에 직각 방향으로 한 단 더 낮은 건물이 월랑이다. 특히 동쪽의 기둥만 있는 월랑을 배례청(拜禮廳)이라고 하는데, 제사를 주관하는 임금이 동쪽의 문과 하월대를 통하여 처음 정전에 올라서는 곳이다. 정전의 정면은 19칸이고, 측면은 앞의 퇴칸을 합하여 총 4칸이다.

​<종묘 정전 전경>


   정전의 마당인 월대(月臺)를 구성하고 있는 돌은 매우 거칠고 지면도 평탄하지 않다. 바닥에 거친 돌을 사용한 것은 경박스럽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지면이 평탄하지 않고 경사를 이룬 것은 비가 많이 내려도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하월대 가운데에는 검은색 기와와 벽돌로 만든 신로는 이곳에 모신 혼령만 다닐 수 있는 길로 임금도 다닐 수 없으며, 신로가 끝나는 지점에 상월대가 있고, 그 위에 정전이 세워져 있다.

​<종묘 정전 마당(월대)>


   정전에서 서문으로 나가면 영녕전이 있다. 영녕전(永寧殿)은 세종 때 정전의 신주를 모실 공간이 부족하게 되자 정전 서쪽에 새로 마련하였다. 영녕전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으로 조묘라고 부르기도 했다. 16칸으로 이루어진 영녕전은 정전에 비해 규모도 작고 모셔진 신주도 34위로 적지만 정전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전은 지붕 전체가 일직선인데 비해 영녕전은 중앙 태실 부분이 한 단 높게 돌출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에서 부모까지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4칸의 중앙 태실을 중심으로 동서로 각 6칸씩 마련된 영녕전은 정전에 비해 아담하여 편안함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영녕전에는 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왕이나 재위 기간이 짧았던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신주는 종묘에 모셔졌지만, 폐위된 왕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신주가 없다.

​<종묘 영녕전>

 

  중요무형문화재(56)로 지정되었고, 2001518일 종묘제례악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제례는 정시제(定時祭)와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정시제는 춘하추동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셋째 未日)에 지내다가 1909년에 납일 제향을 폐지하였다. 그밖에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마다 임시제인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 계절 따라 햇과일과 햇곡식이 나오면 약식 고유를 하였는데, 이것을 천신제(薦新祭)라고 하였다.

   일제하에서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겨우 향화(香火)만 올려 왔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오랫동안 향화조차 봉행하지 못하다가, 1969년부터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주관하여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으나 복식(服飾)과 제찬(祭饌)을 제대로 갖추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75년 종약원은 종묘대제봉향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정부에서도 지원하여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종묘제례-네이버캡쳐>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과 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는데 이것이 친행(親行)이고, 왕이 유고로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는 것이 섭행(攝行)이다. 친행 시는 왕이 초헌관(初獻官)이 되고 아헌관(亞獻官)은 세자, 종헌관(終獻官)은 영의정이 맡았으나,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의 제관(祭官)은 각 능봉향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인품과 제례 경험이 많은 종친을 추천받아 제관으로 위촉하고 있다.

   왕은 제사를 올리기 전에 7일간 재계(齋戒)를 행하는데, 이 기간에는 문병이나 문상을 하지 않으며 주색을 끊고 오직 제사에 관한 일만 생각해야 한다.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신을 대하려는 정성인 것이다. 제사 당일에 왕은 최고의 예복인 면류관과 구장복을 입고 종묘로 행차한다. 왕이 행차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의장기와 의장물을 세우고, 조정의 문무백관을 대동한 채 종묘로 간다. 종묘의 정전에서는 감실(龕室)에서 신주를 꺼내 놓는데, 뜰의 동쪽에 배향공신의 신주를, 서쪽에 칠사의 신주를 배치한다.

​<종묘제례 시 왕의 복장>


  왕이 종묘에 도착하면 제1실에 모셔진 태조의 신위부터 차례대로 제례를 올리기 시작한다. 이때는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의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어 신을 기쁘게 한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종묘에 모셔진 선왕과 선후의 공과 덕을 찬양한 노래와 춤이다. 보태평은 주로 덕을 찬양하였으므로 문무(文舞)라 하고, 정대업은 공을 찬양하였기에 무무(武舞)라 한다. 문무와 무무를 합하여 두 가지의 춤곡이란 뜻에서 이무(二舞)라고도 한다.

​<종묘 정전에 모신 신위>


   왕은 종묘에서 몸소 진향(進香), 진찬(進瓚), 전폐(奠幣)를 순서대로 거행한다. 진향은 하늘에 있는 혼()을 불러오기 위해 향을 세 번 피운다. 진찬은 땅속에 있는 백()을 부르기 위해 옥으로 만든 술잔에 미리 따라 놓은 술을 땅에 붓는 의식이다. 이때 사용하는 술을 울창주(鬱鬯酒)라 하는데, 울창주는 검은색 기장을 사용하여 만든 창주(鬯酒)에다 울금초(鬱金草)를 섞어서 제조한 것이다.

   보통 울창주와 맹물인 현주(玄酒)를 같이 올렸다. 전폐는 비단을 묶은 폐백(幣帛)을 신에게 예물로 올리는 의식이다. 진향에서 전폐는 새벽에 신을 불러오는 의식으로, 이를 신관례(晨痙禮)라 하였다. 다음으로 음식을 올렸는데 이를 진찬(進饌)이라 하며, 제수(祭需)로는 익히지 않은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를 사용했다.

​<종묘제례 진설-네이버캡쳐>


   다음으로 왕이 초헌관(初獻官)이 되어 제1실부터 차례대로 술을 석잔 올리는 초헌례(初獻禮)를 행한다. 초헌례 때에도 보태평의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춘다. 초헌례에 사용하는 술은 예제(醴齊)인데, 지금의 단술과 유사하다. 이어서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이 각 신실에 술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를 거행한다. 아헌례와 종헌례도 의식절차는 초헌례와 동일하였다.

   삼헌례가 끝나면 왕이 음복을 하는 음복례를 거행하였다. 음복은 조상이 내려 주는 복을 마신다는 의미로, 제사에 사용한 술과 안주를 먹는 절차였다. 음복 이후에는 종묘의 서쪽 계단에 구덩이를 파고 제사에 이용한 폐백과 축문 등을 묻었다. 왕은 이것을 지켜보았는데, 이 절차가 망예(望瘞)였다. 망예 이후 왕이 환궁함으로써 종묘제는 끝이 났다.

​<망예-네이버캡쳐>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종묘제례가 봉행되는 동안 연주되는 음악으로 기악()과 노래()에 춤()이 함께 한다. 음악은 각각의 절차에 따라 보태평과 정대업 11곡이 한국의 전통 악기로 연주된다. 종묘제례악은 편종, 편경, 방향(方響)과 같은 타악기가 주선율을 이루고, 여기에 당피리·대금·해금·아쟁 등 현악기의 장식적인 선율이 더해진다. 이 위에 장구··태평소·절고·진고 등의 악기가 더욱 다양한 가락을 구사하고 노래가 중첩되면서 종묘제례악은 그 어떤 음악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중후함과 화려함을 구사한다.

   정전 앞 계단 위(상월대)에서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은 등가(登歌)라 하고, 계단 아래 뜰(하월대)에서 노랫말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은 헌가(軒架)라고 부른다.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의 간결하고 힘찬 노래는 위대한 국가를 세우고 발전시킨 왕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일무)]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 진다. 무용의 문무와 무무는 8줄로 구성된 64명의 무용수가 추며, 서로 보완적인 음()과 양()을 표현한다.

​<종묘 제례악-네이버캡쳐>


   그 밖에도 정전 안에는 칠사위를 모시는 칠사당(七祀堂)과 조선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공신당이 있고, 정전과 영녕전 밖에는 악공청이 있으며, 정문인 외대청 우측으로는 공민왕신당이 있다. 악공청은 제례악에 참여하는 악공들이 연습하고 쉬던 공간 이며, 공민왕신당은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을 위하여 건립한 별당으로, 종묘를 창건할 때 함께 세워졌다고 한다. 공민왕은 이성계를 중용하여 결국 조선왕조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종묘 정전 악공청>


   해설자의 안내를 받으며 종묘를 둘러보고 외대문을 빠져나올 때는 임금님들의 혼령들도 동행하는 것 같은 숙연한 마음이다. 그런데 외대문을 나온 혼령들은 어디로 갈까? 조선시대에는 백악(북악)의 정기가 창덕궁 후원의 숲과 종묘를 거쳐 목멱산(남산)지 이어지는 신()들의 숲길이었는데, 일제는 창덕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허리에 신작로(도로)를 낸다는 명분으로 맥을 끊어버렸고, 무지한 후손들은 종묘 앞부터 목멱산까지 이어지는 숲길에 상가를 지어버려 갈 곳을 몰라 구천을 해매는 것은 아닌지왜 이리 마음이 답답할까

​<외대문 앞 종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