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태기산성 및 횡성호수길 걷기

와야 정유순 2019. 9. 25. 00:53

 

 

 

 

 

태기산성 및 횡성호수길 걷기

(2019921)

瓦也 정유순

   가을 초입에 태풍이 불어온다고 하늘은 찌푸린다. 빗방울이 오락가락 하면서 버스는 강원도 횡성으로 달린다. 횡성군은 강원도의 남서부에 위치하며,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영서지방에 속한다. 북쪽으로 홍천군, 서쪽으로 경기도 양평군, 남쪽으로 원주시와 영월군, 동쪽으로 평창군에 접한다. 행정구역은 1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형은 백두대간의 영향으로 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동북쪽은 큰 산이 많은 산악지대인 데 비하여 남서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완만해져서 비교적 넓고 비옥한 평야다.

 

<횡성 태기산성 및 횡성호수길 걷기 현수막>

 

   횡성의 진산인 태기산(1261)은 횡성군 둔내면·청일면, 평창군 봉평면, 홍천군 서석면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본래는 덕고산(德高山)이라 불렀는데, 삼한 시대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산성을 쌓고 신라에 대항하던 곳이라 하여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갑천(甲川)도 원래는 주천(酒泉)이었으나 태기왕이 박혁거세의 추격을 받아 산으로 들어올 때 더러워진 갑옷을 씻었다 하여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이 지역 일대의 지명은 태기왕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태기산 수국>

 

  오솔길을 비집고 도착한 곳은 하늘 아래 첫 학교로 불렀던 태기분교 앞이다. 횡성군 둔내면 태기리(泰岐里)에 자리 잡은 태기분교(泰岐分校)는 횡성군 갑천면 봉덕초등학교 태기분교로 1968년에 개교하였다가 1976년 둔내면 덕성초등학교 태기분교로 폐교를 맞이했다. 해발 1261태기산 꼭대기에 있었던 하늘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는 현대판 상록수 이영순선생의 눈물겨운 노력과 아픔이 담겨있다.

 

<코스모스>


   19659월 강원도의 화전민 정착사업에 따라 횡성군 내에 흩어져 있던 74가구가 태기산으로 몰려들게 되자 이들을 따라 나선 당시 26살의 가냘픈 처녀선생님은 나무 밑이나 남의 집 헛간을 빌어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던 중 아이들의 고생을 차마 볼 수 없어 도지사를 찾아가 교실을 마련해 줄 것을 호소하여 1백여 평의 아담한 교실을 마련하게 되었다. 학생 106명에 교사 3명이 2개 학년씩 맡아 복수제 수업을 하였고, 당시 학생들도 도시의 중학교 수준의 나이였다고 한다.

 

<횡성 태기분교 터>

 

   화전민이 태기산에 모여 살다 사람들이 다 떠나 19764월 행정공부(行政公簿)에서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 있는 태기리는 2천 년 전 삼한시대 말기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과 아라왕비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태기왕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에게 쫓기어 난공불락 천연요새인 이곳에 부하들과 석성을 쌓고 군사를 길러 신라군과 맞서 싸웠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리고 신라군에게 잡혔던 아라왕비가 풀려나와 태기왕을 따라 이곳으로 와 태기왕과 함께 머물렀다고 한다.

 

<태기산성>

 

   ‘태기왕전설길을 따라 나서면 산성도 나오고 약수터도 나온다. 산성이나 사찰의 공통점은 어느 위치에 있건 꼭 우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산성에도 태기왕과 그의 부하들이 태기산에서 생활을 하면서 사용했던 샘터가 있었는데, 이 샘터가 태기약수로 전해지고 있다. 이 물을 마시면 태기산의 기운을 받아 아이를 갖게 해준다고 하여 태기(泰岐)약수를 태기(胎氣)약수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물 한바가지 마셨더니 아랫배가 빵빵해진다.

 

<태기약수>

 

   또한 사람들이 모여 마을이 형성되면 마을을 지키는 성황신을 마을 어귀 등에 모시는 성황당(城隍堂)이 있는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이곳에 성황당 터로 남아 있는 것은 아마 당초에 태기왕을 산신(山神)으로 모신 당집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태기산 주변 주민들에 의해서 태기왕제나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며 마을의 안녕을 빌었던 성황당 자리가 있다. 그 자리에 지금은 큰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아래에는 돌이 쌓여 흔적을 남긴다.

 

<성황당 터>

 

    약수터를 지나 조금 더 내려오면 태기산성 서문(西門) 터가 나온다. 태기산성은 해발 7501,000m 정도 되는 고지에 축성되었는데 산세가 급하고 낭떠러지가 많아 천연 은폐물이 요새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태기왕은 이런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욕을 다짐하며 친히 산성 안의 전답을 개간하여 군량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4년의 세월이 흘러 신라군은 공격이 가능한 지형을 찾아 일제히 공격하니 태기왕은 남은 병사들을 인솔하고 서문(西門)을 통해 지르매재를 넘어 율무성으로 도주했고, 지금은 석축 등 흔적만 남아있다.

 

<태기산성 서문>

 

   서문을 통과하면 청일면 신대리다. 청일면(晴日面)은 섬강의 지류인 유동천과 갑천 유역에서 약간의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더덕·도라지·버섯·복분자 등 수확성이 높은 경제작물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신대리에 지방도 1개 노선이 있을 뿐 교통은 매우 불편하다. 신대리(新垈里)는 태기산과 봉복산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으며, 봉복산 밑에 새로 생기게 된 마을이므로 새 터 또는 신대(新垈)라 부르던 것에서 지금의 신대리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자연마을로는 한남대, 삼성대, 여내, 돌메지, 성골 등이 있다.

 

<신대리 쪽 태기산 계곡>

 

   빗방울은 오락가락한다. ‘태기왕전설길은 총연장 4.5로 약 두 시간 반 동안 태기왕의 발자취를 찾아 볼 수 있는 길이다. 그의 전설들은 20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계곡의 물이 되어 때론 폭포가 되기도 하고, 때론 잔잔한 여울이 되어 신우대, 물푸레나무, 주목과 같은 원시림을 만들어 주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심산계곡의 절정을 이룬다. 특히 풍부한 적설량으로 설경이 아름다운 겨울의 낭만을 연출한다고 한다.

 

태기산길 안내도>

 

   태기산 길을 내려와 청일면 신대리 주차장에서 버스로 갑천면 구방리 횡성호반으로 이동하여 횡성소머리국밥으로 오전을 마감한다. 횡성호수는 11년의 공사 끝에 2000년 완공된 횡성댐을 막아 생긴 호수다. 그러나 횡성호는 횡성군의 발전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수몰민들의 잃어버린 삶을 되새겨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횡성호에 수몰된 갑천면 5개리 수몰민들의 향수는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횡성호수길 5구간>

 

   점심식사 후 망향의 동산에 올라본다. 동산 초입에는 희망의 나래라는 제목의 망향기념탑이 서있다. 전체 형태는 새의 날개를 직선조합으로 구성한 단순화 형태의 표현기법으로 힘차게 비상하는 희망찬 내일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날개의 양면에는 고향의 정취를 담고 있는 나무, , 강아지, , 허수아비 등을 조형적으로 표현하여 망향의 정을 그리고 있다. ‘화성의 옛터 전시관에는 중금리, 부동리, 화전리, 구방리, 포동리 등 갑천면 5개리가 수몰된 농가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망향기념탑>

 

<화성의예터 전시관>

 

   그 옆으로는 중금리 삼층석탑(中金里 三層石塔)이 있다. 강원도유형문화재(9)인 이 탑들의 원래 위치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2.2떨어진 갑천면 중금리 탑둔지의 옛 절터였으나, 횡성 댐의 건설로 탑이 물에 잠기게 되자 19988월 이곳으로 옮겨왔다. 석탑 상륜부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런 경우는 드문 예라고 한다. 신라 석탑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은 탑으로 균형이 잡힌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건립 시기는 9세기 말로 추정되며 탑의 높이는 5.

 

<중금리 삼층석탑>

 

   망향의 동산에서 내려와 호수 길로 가기 위해 운동장으로 들어서는데 코뚜레조형물이 반긴다. 그러고 보니 횡성은 명품 한우의 고장이다. 산간지역이면서도 논농사가 발달해 먹이인 볏짚 구입이 용이한데다 일교차가 뚜렷한 청정 환경 등 한우를 사육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마블링이 촘촘하게 박혀 육즙이 풍부하고 감칠맛 나는 최상의 쇠고기를 선보이면서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소 코뚜레 상>

 

   횡성호수에는 6개 구간 총30의 호수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오늘은 그 중 5구간인 가족길을 걷기로 한다. 이 길은 4.5구간으로 호수 가운데의 산자락을 한 바퀴 돌아보는 구간으로 수몰민들의 애환이 가장 많이 서려있는 곳이다. 시멘트포장 길을 조금 걷다 보면 갑자기 길은 멈춰버리고 지게를 진 아버지, 함지박을 머리에 인 어머니, 꼬리치며 따라 나선 강아지와 함께 아이들의 정겨운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바로 수몰된 마을입구 풍경이다. 나그네의 마음도 막막한데 당사자들의 향수(鄕愁)는 어찌할까?

 

<수몰마을 입구>

 

   횡성호 북쪽으로는 어답산이 멀리 보인다. 횡성군 갑천면에 있는 어답산(御踏山, 789)은 진한의 태기왕을 쫓던 박혁거세가 이 산에 들렀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고, 태기왕 자신이 이 산을 밟았다고 해서 어답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태기왕이 이곳에 와서 평상(어탑)을 놓고 앉았다 하여, 어탑산(御榻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횡성현읍지>에도 어탑산이라고 나온다. 또 산 모양이 어탑모양이라 어탑산이라 불렀다는 지명유래를 설명하고 태기왕 관련 설화를 덧붙이고 있다.

 

<횡성호와 어답산>

 

   길 곳곳에 포토 존을 만들어 아름다운 풍광을 사진에 담도록 하였고, 나무로 조형물과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걸을 때 오기 쉬운 지루함을 달래준다. 그리고 나비의자, 서로 사랑을 약속하는 사랑의자 등이 오색 꿈길로 접어들게 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준다. 이 호수길 5구간은 전체가 거의 평탄한 길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든 가족처럼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라 가족길이라 명명한 것 같다.

 

<나비의자>

 

<사랑의 약속>

 

<나무인형의자>

 

 

   계속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중에 풍수원성당으로 이동한다. 풍수원성당은 강원도에서 처음 지어진 성당으로,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경기도 용인에 살던 신태보(베드로)를 중심으로 40여 명의 신자들이 8일 동안 피할 곳을 찾다 정착한 곳이 풍수원이다. 그리고 박해를 피해 이곳에 더욱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이게 된다. 그때부터 80여 년 동안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1888년 프랑스 르베르신부가 파견되어 본당을 창설하고 초대신부로 임명되었다.

 

<풍수원성당 표지석>

 

   르베르신부가 본당의 터전을 닦은 후 예수성심학교 출신으로 첫 사제로 서품된 정규하(아우구스티노)신부가 취임하여 194381세로 선종하기까지 평생을 풍수원 본당 신부로 사목하였고, 그는 1906년 자신의 돈과 교우들의 헌금으로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당시 초가성당을 높이 5, 건평 120평의 연와조성당 건립을 착수하여 1년만인 1907년에 준공 봉헌하였다. 따라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최초의 성당이고 강원도 최초의 성당이며,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성당으로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68)로 지정되었다.

 

<풍수원성당>

 

   1896년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인 신부로 서품 받은 정규하신부가 이곳으로 부임하면서 성당 건축이 시작되었다. 신자들이 직접 나무를 패고 벽돌을 만들어 지었다고 한다. 이 성당은 처음 지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옛 모습 그대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1920년 이래 거의 매년 성체현양대회가 열렸으며 MBC미니시리즈 16부작 러브레터가 촬영되어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코스로도 각광 받기도 했다.

 

<풍수원성당 내부>

 

<풍수원성당 예수님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