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2코스(2)
(가회동성당∼약현성당, 2019년 9월 8일)
瓦也 정유순
종각역 1번 출구로 이동한다. 지금은 제일은행 건물자리(구 신신백화점)지만 옛날에는 의금부(義禁府) 터다. 의금부는 금부(禁府), 왕부(王府), 집금오(執金吾)라고도 하였으며 순찰 등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지만 주로 왕명을 거역하거나 왕권에 도전하는 경우,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 양반의 범죄행위 등을 처리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때 천주교 신앙을 지킨 증거 터다. 그리고 이곳에 신문고(申聞鼓)가 있었다고 하나 궁궐과 너무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금부 터>
종각역 6번 출구 앞은 전옥서 터다. 전옥서(典獄署)는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미결수를 수감하는 곳이다. 관원이나 양반 출신의 범죄자는 의금부에서 담당하였고, 전옥서는 주로 상민(常民) 출신의 범죄자를 수감하였다. 1405년(태종 5) 형조의 산하 관청이 되었다. 천주교 박해 때는 신자들을 사상범으로 분류하여 이곳에 구금시켰다. 수감대상이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나, 때로는 형조와 의금부 소관인 지도층 신자들도 수감되기도 했다.
<전옥서 터>
전옥서 터 옆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장군의 좌상(坐像)이 있다. 전봉준(全琫準)은 1894년 학정에 항거해 전면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최고 지도자다. 그는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후 서울로 압송돼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됐다. 그 자리가 종로 네거리 영풍문고 자리다.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 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다음날 새벽 2시 동지들인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진다. 동상은 전봉준의 순국 터인 이곳에 2018년 4월 24일에 세워졌다.
<녹두장군 전봉준>
종각역사거리에서 세종대로사거리로 이동한다. 광화문우체국과 동아일보자리는 우포도청 터다. 서울의 서북부를 관할했던 우포도청은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자들이 희생된 곳이다. 충청도 공주지방에서 사목하던 드게트신부와 신자들이 압송되어 와서는 심한 굶주림으로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르, 이용헌 이시도르 등 신도들이 옥중 아사(餓死)하여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신부가 순교를 앞두고 그의 마지막 옥중 서간을 작성한 곳으로 알려졌다.
<우포도청 터>
<동아일보-신문박물관>
세종대로사거리에서 덕수궁 쪽으로 걸어 나오는데, 도로 변에 도로원표(道路元標) 표지석이 보인다. 도로원표는 서울과 전국 주요도시간의 거리를 표시하는 기준점이다. 1914년 도로원표가 마련될 당시의 설치점은 세종로광장 중앙이었으나 1935년 칭경기념비전 옆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1997년 12월에 세종로사거리 중심점에 새로 설치하였다. 처음 설치된 곳하고는 남북으로 약 151m 떨어진 위치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의 도로원표는 도로법에 따라 그 위치를 세종로광장의 중앙으로 못 박아 두었다.
<도로원표>
서울시의회를 지나 덕수궁돌담길로 접어든다. 이 길은 1959년 영국대사관의 임대로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된 지 58년만인 2017년 8월에 개통되었다. 그리고 선원전과 경희궁으로 드나들던 길목이었다. 고종이 붕어하자 일제는 덕수궁을 대폭 축소하는 과정에서 궁역(宮域)의 중간을 잘라 길을 내고 담을 쌓은 것이다. 덕수궁돌담길은 조성 당시부터 ‘사랑의 길’로 유명세를 탔다. “비 내리는 덕수궁돌담길을/무슨 사연 있기에 혼자 거닐까/밤비가 소리 없이 내리는 밤에…♬♩” ‘덕수궁돌담길’노래가 들려온다.
<덕수궁돌담길>
이 돌담길이 끝나면 미 대사관저와 구 경기여고 사이에 있는 ‘고종의 길’로 이어진다. 이 길은 덕수궁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구 러시아공사관까지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당시에 덕수궁을 오갈 때 사용한 길로 추정된다. 그리고 지금은 공터로 남아 있는 구 경기여고 자리는 역대 국왕의 어진이 모셔진 선원전(璿源殿)이었다. 일제는 우리의 지배권을 강탈한 뒤 덕수궁 터를 주로 외국공관에 조직적으로 분할 매각했는데, 이는 궁궐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을 파괴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었다.
<고종의 길>
정동공원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이국풍의 흰색 건물로 주변 환경과 형태가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는 르네상스풍의 이 건물은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한 건물의 일부로 현재는 건물이라기보다는 기념비에 가까운 ‘구 러시아공사관 탑’이다. 1885년 한·러수호조약 체결 후 착공되어 1890년(고종 27)에 준공된 건물로 사적(제253호)이다. 건양(建陽) 원년(1896) 2월, 압박을 가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은 경복궁을 빠져나와 아관파천하여 다음해 2월까지 거주한 곳이다. 본 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
<구 러시아공사관 탑>
계단을 타고 내려와 새문안로를 건너면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다. 경희궁(慶熙宮)은 조선 5대 궁궐의 하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철저하게 훼손된다. 1910년 일제는 경희궁의 전각 대부분을 헐어내고 일본인 학교인 총독부중학교를 세운다. 이 학교는 1915년 경성중학교로 개칭되었다. 이때부터 경희궁의 면적은 절반 정도로 축소되고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던 궁궐은 과거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 학교는 해방 후 서울중·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다.
<경희궁 흥화문>
우선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조계사(曹溪寺)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정각원(正覺院)으로 남아있다.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절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에 돌아왔다. 황학정(黃鶴亭)은 1890년(고종27)에 지었던 정자로, 민간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종로구 사직공원 뒤편에 옮겨져 있다. 그리고 수많은 전각들이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진다.
<경희궁 숭정문>
<경희궁 숭정전>
인근의 강북삼성병원은 일명 서대문으로 불리는 돈의문(敦義門) 터이고, 1949년 6월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이 암살된 경교장(京橋莊)이다. 그 아래로는 자유당정권의 실세였던 이기붕(李起鵬)의 집터에 세워진 4·19혁명기념관이 자리한다. 4·19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正副統領) 부정선거에 저항하여 일어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이 때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붕괴된다. 그리고 그 아래로 대한적십자병원이 자리한다.
<4·19혁명기념도서관>
종로구 평동의 서울적십자병원과 서울충정로우체국 일대는 조선시대에 서대문 밖이었던 지역으로, 경기감영(京畿監營)이 있었던 자리였다. 현재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 서대문역 사거리 3번 출구 쪽 도로변에 이곳이 ‘경기감영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1784년 조선 천주교가 명례방에서 처음 창립된 후 성장해 오던 신앙공동체들은 신유박해(1801)를 기점으로 큰 타격을 받는데, 이 때 경기지역 신자들이 끌려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거 했던 곳이 바로 경기감영이다.
<경기감영 터>
미근동 경찰청 앞과 서소문 고가차도 밑으로 하여 서소문순교역사공원에 당도한다. 서소문은 숭례문 밖의 칠패시장으로 통하는 문으로 새벽부터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어서 사람에게 범죄예방의 경각심을 주기 위해 사형 터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신자에 대한 사형집행은 대체로 신유박해(1801) 때부터로 평신도가 많이 순교한 성지다. 이곳에서 순교하여 이름이 밝혀진 이는 98명이고, 44명은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평신도 지도자였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강완숙 콜롬바, 이승훈 베드로도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기해박해(1839) 때에는 장하상 바오르를 비롯하여 41명의 순교성인과 병인박해(1866) 때에 3명의 성인을 합하여 모두 44명의 성인이 되었다. 그 밖에 수많은 이들이 박해 때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참수 터에서 순교하였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시복식에 앞서 한국의 최대 순교 성지인 서소문순교성지를 찾아 성인들의 삶을 묵상하고 참배했다. 한국천주교회는 평신도의 자발적 신앙으로 성장하여 평신도가 처형된 대표적 장소인 서소문순교성지에 현양탑을 세워 순교영성을 되새기고 있다.
<44명의 성인 부활 상-순교역사박물관>
서소문순교역사박물관을 대충 둘러보고 중림동 약현성당으로 향한다. 염천교 수제화거리 교차로에 있는 ‘고산자 김정호생가비’를 거쳐 마지막 계단을 오른다. 약현(藥峴)은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곳에 있는 고개 이름으로 옛날에는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많았으므로 ‘약초밭이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고, 이를 줄여 ‘약현’이라 하였는데, 점차 고개 부근의 지명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곳에 성당이 들어선 것은 ‘서소문 밖 순교성지’가 발아래 굽어보이기 때문이리라.
<약현성당>
사적(제252호)으로 지정된 약현성당은 1887년 블랑 주교에 의해 시작된 교리 강습소가 이후 약현 공소로 변모하였다.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어 뮈텔 주교의 동의를 얻어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891년 10월 성당 정초식을 거행한 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서울대교구의 두 번째 본당이며 1892년 9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조 건물이 완성되어 1893년 4월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1998년 2월 화재로 첨탑과 성당 내부가 완전히 훼손되었다. 이후 복원 공사를 거쳐 2000년 9월 본당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약현성당 내부>
서소문순교자기념관(西小門殉敎者記念館)은 1991년 약현성당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는데, 약현성당(藥峴聖堂) 내에 있다. 약현성당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에는 서소문 순교자들의 유품과 천주교 관련 고서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순교자기념관 성당의 제대(祭臺) 중앙에는 성인유해(聖人遺骸) 16위(位), 오른쪽 벽면에는 서소문에서 순교한 성인위패(位牌) 44위, 왼쪽 벽면에는 서소문에서 순교한 순교자위패 54위가 모셔져 있다.
<서소문 순교자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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