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2코스(1)
(가회동성당∼약현성당, 2019년 9월 8일)
瓦也 정유순
오늘 첫 방문지는 1949년 설립된 가회동성당(嘉會洞聖堂)이다. 가회동(嘉會洞) 일대는 ‘즐겁고 아름다운 모임’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 성당이 위치한 북촌일대는 한국천주교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신부가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곳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여 활동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완숙과 함께 순교한다. 2014년 주문모신부를 포함하여 이 무렵 순교한 최인길, 윤유일, 지황 강완숙 등 5명 모두 복자(福者)로 시복(諡福)되었다.
<가회동성당>
1949년 9월 명동성당에서 분리된 가회동성당은 한국 전통의 한옥과 현대 성당 건물인 양옥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건물로, 본 성당 건물은 양옥으로, 들어가는 입구 건물은 한옥으로 되어 있다. 2016년에는 그해 처음으로 시작된 ‘서울 우수한옥’ 후보 심사에 올라 13곳의 다른 한옥과 함께 우수한옥 인증을 받았다. 그리고 가회동성당은 매년 혼인 예식을 접수받는데, 접수 시에는 교적증명서(교적본당 발급, 신자에 한함), 예약금(50만원, 현금)을 지참하여 혼인당사자가 직접 방문해야 한다.
<주문모신부와 최인길, 강완숙 복자>
가회동성당을 나와 서울의 북촌거리를 누빈다. ‘북촌(北村)’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의미다. 조선조 당시로써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구로 유명하였다. 곳곳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몇 채의 한옥들은 이때의 명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러 채의 한옥이 지붕처마를 잇대고 벽과 벽을 이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풍경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따뜻한 정과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준다. 북촌 지역을 걷다보면 이어진 처마선의 아름다운만큼이나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북촌마을>
북촌로 11길에 들어서면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 1360∼1438)의 집터가 있다. 고불은 고향에 효자문이 세워질 정도로 효자였으며, 성격이 청렴결백하여 공사를 분별한 결과 청백리(淸白吏)의 본이 되었으며, 퉁소를 즐겨 불었고 그가 지은 시조 ‘江湖四時歌(강호사시가)’는 연시조의 효시(嚆矢)라고도 한다. 지금의 건물에는 ‘고불서당(古佛書堂)’ 편액이 걸려 있다. 북촌거리는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나, 오래된 와가(瓦家)들의 보수(補修)도 중요한 것 같다.
<고불서당>
좁은 북촌거리를 지나 아래로 내려오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나온다. 원래 이 자리는 조선시대에는 종친부가 있었던 자리였고, 해방 후에는 한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력을 휘둘렀던 보안사와 구 수도육군병원이 있던 자리였는데, 두 기관이 모두 이전하고 2013년에 들어섰으며, 미술관 뒤편으로 종친부 건물인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이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인 정독도서관으로 1981년에 이전했던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우물터는 1984년에 발견하여 복원했다.
<정독도서관 정문>
<종친부 우물>
종친부는 왕가의 족친(族親) 관계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하나로, 역대 선왕(先王)의 어보(御譜)와 어진(御眞)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였다. 종친부는 최고 왕족들의 사무를 처리하던 경근당과 고위관리들의 집무처인 옥첩당, 하급 낭인들의 집무지인 이승당으로 이루어졌으나 경근당과 옥첩당만 현존한다. 이승당은 일제 때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신축하면서 뜯겨나가 터만 남아있다. 종친의 정원은 두지 않았으나 대군(大君:王嫡子)·군(君:王庶子)·영종정경(領宗正卿)·판종정경(判宗正卿:정2품) 등 품계를 두었다.
<경근당>
<옥첩당>
경복궁교차로 동십자각과 유물발굴 중인 의정부 터를 뒤로하고 광화문광장으로 나온다. 광화문광장에는 시복(諡福)터가 있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천주교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미사를 집전한 곳이다. 시복미사를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된 것은 한국교회의 중추적인 초기인물들이 옥고를 치루고 순교한 형조 터, 우포도청 터, 의금부 터, 서소문성지 등이 광화문 인근에 위치해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당시 시복미사에는 천주교 신자 20여만 명이 참석했다.
<광화문>
<천주교순교자 124위 시복 터>
정부광화문청사 앞의 세종로 거리는 조선의 관청 육조(六曹)가 있었던 곳으로 형조도 세종문화회관 부근에 있었다. 형조(刑曹)는 재판·법 집행·노비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천주교 초기신자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특히 명례방(중구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1751∼1787) 토마스 집에서 예배를 보던 이승훈과 정약용 형제들이 포졸들에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되어 왔으나, 양반신분인 사람들은 즉시 풀려났고 중인신분인 김범우는 혹독한 고문후유증으로 1년 만에 죽음으로써 조선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가 되었다.
<조선 육조관아 배치도>
<형조 터>
‘서울 걷자’ 축제가 열리는 광화문광장을 가로질러 종로입구에는 광화문사거리 ‘비각’으로 더 알려진 ‘고종즉위40년 칭경기념비’가 있다. 사적 제171호로 지정된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高宗卽位四十年稱慶紀念碑頌)는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고 보령이 51세가 되던 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다. 비신 맨 위쪽의 전서(全書)는 ‘대한제국이황제보령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大韓帝國李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이라고 사면에 둘러 새겼는데, 황태자(뒤에 순종)의 글씨다.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전>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에서 하늘에 제사 올리고 황제가 되었으며 나라 이름을 ‘대한’이라 하고 연호를 ‘광무’라 한 사실과 1902년이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자 보령이 망육순(51세)이 되는 해이므로 기로소(耆老所)에 입사한 사실을 기념하여 비석을 세운다” 하였다. 기로소란 나이 일흔이 넘은 정2품 이상의 고위 관원을 예우하기 위해 경로(敬老)의 예로 모셨던 것인데, 조선시대 왕들은 대부분 장수하지 못하여 51세에 기로소에 들었다고 한다.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후면>
교보빌딩 뒤 중학천(中學川) 길을 따라 ‘탐관오리를 처형했던 혜정교(惠政橋)터’와 ‘중학천 석축 유구(遺構)’를 건너 종로구청에 당도했는데 오늘이 일요일이라 출입문이 모두 닫혀다. 이곳은 삼봉 정도전의 집터가 있던 자리다. 바로 이웃에는 ‘목은선생영당(牧隱先生影堂)’이 이고, 주변에는 구한말 대표적인 민족 언론인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와 독립군 양성교육기관이던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 받은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터’, ‘숙명여학교 옛터’ 등이 모여 있는 ‘수송공원’이다.
<중학천 석축유구>
<목은선생영당>
수송공원 옆에는 조계종 조계사다. 조계사 대웅전은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127호, 2000년 9월 10일)로 지정되었다. 1935년 한용운·박한영·송종헌 등이 중심이 되어 불교 총본산 건립운동을 추진하던 중, 1936년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해체되는 민족종교인 전라북도 정읍의 보천교(普天敎) 법당으로 쓰이던 십일전(十一殿)을 경매를 통해 사들여 1937∼1938년 이건(移建)하였다.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서울 ‘수송동의 백송(白松)’이 있다.
<조계사 대웅전>
조계사 옆에 있는 우정총국(郵征總局)은 조선 말 우체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다. 1884년 4월 22일 고종의 왕명으로 개설하여 그해 11월 18일부터 근대 우정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으나,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폐지되고 17일 만에 우편업무가 중단된다. 이후 이곳은 한어학교, 중동학교 등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분류되어 철거될 위기에서 1956년 당시 체신부(遞信部)가 매입하였으며,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우정총국-2019.2촬영>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조계사 경내에는 충정공 계정 민영환(桂庭 閔泳煥, 1861∼1905)의 집터가 있다. 민영환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서울에서 호조 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의 총애로 여러 관직을 수행하였고,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인천을 떠나 상해·동경·뉴욕·런던·독일 등지를 거쳐 모스크바 행사에 참여하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같은 해 10월 하순 귀국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다 좌절되자 1905년 11월 30일 자신의 청지기 집(현 공평동)에서 자결한다.
<민영환 동상>
<민영환이 자결한 곳>
그가 순국할 때 큰 별이 서쪽하늘에서 떨어지고 까치가 떼로 몰려와 울었다고 한다. 순국 후 피 묻은 옷과 칼을 상청(喪廳) 마루방에 걸어 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고 보니 대나무 4줄기가 마룻바닥과 피 묻은 옷을 뚫고 올라온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血竹)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민영환이 순국할 때 나이가 45살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솟아 난 대나무 잎 개수가 역시 45개였다. 유족이 보관해 오던 혈죽은 1962년 고려대박물관에 기증되어 보관 중이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혈죽-고려대박물관소장>
공평동으로 건너와 ‘삼일독립선언유적지’인 태화관(현 태화빌딩)을 확인하고 ‘공평도시유적전시관’으로 향한다. 이 전시관은 구 공평빌딩을 리모델링한 26층짜리 센트로폴리스 건물 지하에 있다. ‘한양의 골목에서 조선을 보다’라는 부제가 붙은 전시관은 지금까지 보았던 청진동 일대의 조선시대 흔적과 한양에서 근대 경성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골목길과 건물터를 온전하게 보존해 놓았다. 이 지역 유적 발굴시 전시관 조성과정과 당시 건축물 모형, 등을 각종 시청각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태화빌딩 앞 삼일독립선언유적지>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입구>
서울역사박물관의 별관으로 구성된 이 전시관은 주로 16∼17세기의 집터, 골목길, 생활유물 등 1,000여점의 전시물이 보존돼있는 공간이다. 투명 강화유리를 통해 옛 조선시대 건물터와 골목길을 살펴보며 관람을 할 수 있다. 또한 빌딩 건설과정에서 발굴당시 15세기 조선 초기 건물들과 도로부터 일제강점기 유물들까지 여러 시대동안 누적된 다양한 시대의 유물을 함께 만날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 가옥을 실제 크기로 재현하여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느껴볼 수 있도록 하였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 한옥>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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