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마장터 지나 새이령 가는 옛길

와야 세상걷기 2019. 7. 9. 22:02

마장터 지나 새이령 가는 옛길

(201976)

瓦也 정유순

   오늘 서울의 최고기온 36.1! 사람 체온과 비슷하다는 기상청의 폭염경보에 사람들은 피서를 떠나려는 걸까? 강원도로 향하는 도로는 꽉 막혀 장사진을 이룬다.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중간에 빠져나와 홍천군 두촌면 철정리 화양강휴게소 뒤편으로 흐르는 홍천강은 제44호 국도와 짝을 이루며 그런대로 여유롭다. 버스는 인제군에 접어들어 속도를 더하고 3·8대교와 원통삼거리를 지나 인제군 북면 용대리 126번지 박달나무쉼터에 당도한다.

<홍천강-화양강휴게소>


   박달나무 쉼터는 마장터를 통하여 대간령, 신선봉, 마산봉으로 오르는 들머리 지점이다. 이 쉼터에서 간단하게 여장을 점검하고 창암계곡의 징검다리를 건너 새이령으로 들어선다. 박달나무는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이며 높이 30에 달한다. 우리나라 건국설화에도 단군왕검이 박달나무 아래서 신시를 열었다고 전해지며, 단군(檀君)도 박달나무라는 뜻이다. 또한, 박달나무는 물에 거의 가라앉을 정도로 무겁고 단단하여 홍두깨·방망이·수레바퀴 등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박달나무 쉼터>


   새이령은 강원도 고성군의 신선봉(神仙峰, 1204m)과 마산(馬山,1052m)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샛령 혹은 새이령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진부령(陳富嶺)과 미시령(彌矢嶺)의 사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이 샛령·새이령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간령(間嶺)이 되었고 큰 샛령(새이령)과 작은 샛령(새이령)으로 구분하여 대간령·소간령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소파령(所坡嶺) 또는 석파령(石破嶺)이라고 불렀는데, 2005NGO단체인 녹색연합에서는 이전의 지명인 소파령으로 지명을 변경할 것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새이령(대간령)지도>


   박달나무쉼터에서 마장터까지의 구간을 소간령이라하고, 마장터에서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까지를 대간령이라 하며 이를 마장터 가는 길이라 한다. 마장터 가는 길은 1600년 전에 생겼다. 동해안의 고성지방 해양산물과 내륙의 인제지방 농산물을 교류하는 보부상들이 왕래하던 고갯길이었다. 그래서 이 길은 이미 천 년 전부터 보부상들의 땀이 젖어 있고, 흙이 페어 땅 밖으로 솟은 나무뿌리는 이 길을 지나다녔던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무게가 깊숙이 스며있다.

<징검다리 건너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마장터가는길인제천리길 7-2구간으로 소간령 상당부분 겹친다. 한 시간여쯤 걸었을까. 등골에 땀방울이 스며들고 좀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 스칠 때 너덜돌샘의 샘물은 오장육부를 씻어주는 약수(藥水)로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찌든 때가 한 순간에 확 달아난다. 그리고 한 모금 적신 물은 핏줄을 타고 모세혈관까지 짜릿하게 전달된다.

<인제천리길 표지판>

<너덜돌샘 약수>


   심산유곡을 지나친다는 것은 아무리 편안한 길이라 해도 자연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이 앞서야 한다. 아마 등짐을 지고 이 길을 거닐었던 보부상들도 쓸데없는 욕심을 다 내려놓고 자연을 큰 스승 삼아 지혜를 얻었으리라. 약수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당산나무 밑 둥에 만들어 놓은 서낭당은 너와로 처마지붕을 만들었고, 그 안에는 작은 소반 위에 간단한 제물이 정성들여 올려 있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설이 있다.

<서낭당>


   허리가 자로 꺾어진 버드나무는 새로운 가지를 뻗어 생명의 질김을 웅변해 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세상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겸손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해야만 소통할 수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외나무다리는 마장터를 연결해 주는 외길이다. 마장터는 영동과 영서지방의 사람들이 말을 이용하여 짐을 운반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들이 여기 이곳에서 고단한 하루를 쉬어 가던 곳으로 조그마한 장터가 형성되어 마장터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ㄱ'자 나무>

<마장터 외나무다리>


   이 마장터는 진부령과 미시령 길이 생기기 전에는 백두대간을 넘는데 가장 용이한 길이었다. 특히 고성과 양양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인제로 가는 길 중간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하는데 이 마장터가 그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한창 장이 북적일 때는 30여 호의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바닥에 깔려 있는 돌무더기들이 이곳을 터를 삼아 화전을 일구며 살던 화전민마을의 집터였음을 알려줄 뿐이다. 외나무다리를 건너 돌아 나올 때 다행이도 장작을 쌓아 놓은 것으로 보아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귀틀집이 있어 반가웠다.

<마장터 귀틀집>


   마장터는 설악산국립공원 북단(北端)에 머무는 곳으로 공원구역 밖이다. 여기서부터 고성의 청간정까지 이어지는 길이 대간령(大間嶺, 새이령)이다. 선조들이 다니던 옛길을 걷는다는 것은 역사의 숨결을 따라 걷는 순례의 길이다. 또 재 넘어 동과 서로 넘나들며 살아왔던 삶의 무게가 켜켜이 집적(集積)된 길이다. 이 마장터를 지나면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다. 모자 차양으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소리마저 영롱한 구슬처럼 만든다. 계곡의 명경지수(明鏡止水) 옆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한다.

<새이령계곡의 명경지수>


   다시 울창한 숲길을 따라 새이령을 걷는다. 높이 641 m. 백두대간의 안부(鞍部)에 해당하며 옛날에는 진부령, 한계령과 함께 동서교통의 주요통로였다. 그러나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간성읍(杆城邑)으로 넘는 진부령과, 용대리에서 속초시(束草市)로 바로 넘는 미시령이 포장되면서 이 고개는 옛날의 소로(小路)에 그치고 있지만 길섶에는 주막 터도 나온다. 그리고 신선봉은 금강산 일 만 이천 봉 중 남쪽의 제1봉이다.

<새이령 넘어가는 길>


   이 주막 터에는 참샘물내기라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 물맛이 아주 좋고 이 샘물에 술을 빚으면 술맛이 좋다는 소문이 인근지역에 퍼져 있었다. 이곳을 통행하는 사람이 많아 농수산물을 물물교환 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길손들이 다리쉼을 하며 각지의 소식을 풀어 놓았던 주막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주막 터>


   마장터를 지나 새이령 내려오는 길은 낭떠러지 같은 급경사가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 민가가 있는 임도까지 이어진다. 마사토가 깔린 길바닥은 엉덩방아를 찧기에 안성맞춤이다. 그 무거운 봇짐들을 지고 넘나들었던 고난의 길이었으리라. 보부상들이 고개를 넘을 때는 다리가 없는 바지게를 지고 몸이 고단할 때마다 언덕진 곳에 지게와 함께 기대어 쉬었다고 하는데 긴 설명이 없어도 이 길을 내려오면서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낭떠러지 길>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하면서 내려온 도원리 임도(林道)는 차량교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하다. 짙푸른 녹음에 감싸인 산들의 기운을 느끼며 빨간 새색시 볼처럼 붉은 산딸기를 희롱할 때 평탄한 길을 따라 발걸음도 가볍다. 임 마중하며 우는 뻐꾸기 소리는 생동하는 자연의 큰 호흡이다. 가끔은 휴일을 맞아 가족단위로 놀러온 차량들도 도로를 달린다. 임도 옆 계곡 속에 숨은 선녀폭포에는 선녀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임도>

<선녀폭포에서의 족탕>


   선녀폭포(仙女瀑布)는 일명 신방소()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이 근처에 신방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과 폭포 근처에 있는 화강암바위의 여자신발 모양 무늬자국이 선녀의 발자국이라 하여 선녀폭포라 한다. 이 바위를 중심으로 소()와 계곡에다 발을 담그고 속세의 속절없는 푸념들을 다 씻어버린다. 다가오는 삼복더위도 저만큼 밀어낸다. 소문에는 겨울 얼음 속에서 흘러 떨어지는 낙수소리가 일품이라고 한다.

<선녀폭포 전경>

<선녀폭포의 소(沼)>


   도원리(桃院里) 마을은 새이령을 넘나드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한 때는 북적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도원 저수지를 끼고 자리 잡은 농촌이다. 마을의 속칭명은 향도원이라 하는데 전해 내려오는 유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다. 19688월 도원저수지 신축공사 때 현재의 저수지 자리에 살던 주민들은 도원1리와 도원3리로 분산 이주했다. 고성군에서 운영하는 향도원산림힐링센터는 옛 명성을 찾으려는 양 새롭게 단장하며 내일을 기다린다.

<향도원산림힐링센터>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도원리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어느 카페의 건물은 옛 보부상들이 항아리등짐을 바지게에 지고 있는 모양으로 디자인하여, 근원도 모르는 건물보다는 새이령 풍경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모습이 정겹다.

<보부상의 항아리 카페-네이버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