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서오릉

와야 세상걷기 2019. 7. 5. 02:04

가깝고도 먼 길-서오릉

(201973)

瓦也 정유순

   서오릉!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동쪽 구리시에 동구릉이 있다면 서쪽 고양시에는 서오릉이 있다. 동구릉은 1408년 조선 태조가 건원릉의 터를 잡으면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후비포함)가 잠들어 있는 곳이고, 서오릉은 동구릉 다음으로 큰 능역(陵域)으로 덕종(德宗 추존), 예종(睿宗), 숙종(肅宗) 등 세 분의 왕과 왕비(후비포함) 5개의 능이 있는 곳이다. 이 서오릉을 가기 위해 경의중앙선 수색역을 출발하여 봉산(烽山)을 경유한다.

<서오릉 지도>


   수색역은 디지털미디어시티역과 화전역 사이에 있다. 19084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수색이라는 지명은 일명 물치 또는 무르치라는 옛 이름에서 유래한다. 우리말인 무르치는 수색역 앞에서 서쪽으로 뻗어있는 넓은 들 건너편에 위치한 마을로 장마철만 되면 마을과 벌판 등이 온통 물 일색으로 변해버린다고 하여 무르치가 되었고, 이를 한자화하여 수색(水色)이 되었다. 19588월 준공된 구 역사터에 2006년 신 역사가 완공되었으며, 200971일 수도권 전철 경의선이 개통되었다.

<수색역>


   수색역 큰 길 건너 주택단지를 지나고 산길로 접어들어 봉산 능선으로 올라선다. 서울둘레길 7코스에 해당되는 봉산(烽山, 209)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과 경기도 고양시 경계에 있는 산이다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산(烽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산에는 여러 나무들이 어우러져 녹음이 짙어지지만 팥배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능선이며 북쪽에는 효경산(孝敬山)이 있고 남쪽에는 증산(繒山)이 있다. 봉산은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봉산공원(烽山公園)이 조성되었다.

<봉산정>

<봉수대>


   조선 세조의 아들이며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懿敬世子)1445(세종 27)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지고, 1455(세조 1)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2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1471(성종 2)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 봉산 동쪽 기슭에는 수국사(守國寺)라는 절이 있는데 세조가 맏아들 의경세자가 갑자기 요절하자 효경산(孝敬山)에 묻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서울 구산동과 고양시 경계>


   약 두 시간여 봉산 산행 끝에 당도한 서오릉(西五陵)은 덕종(德宗)의 경릉(敬陵)을 시작으로 서울 서쪽과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덕종의 동생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昌陵),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을 합쳐 부르는 명릉(明陵),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弘陵)이 들어서면서 서오릉이라 불렀다.

<서오릉 안내도>


   서오릉엔 그밖에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공빈 윤씨(恭嬪尹氏)가 묻힌 순창원(順昌園)이 있고,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를 신촌에서 옮겨온 수경원(綏慶園),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대빈묘(大嬪墓)가 있다. 서오릉은 1970년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었다.

<서오릉 입간판>


   매표소에서 입구를 통해 입장하면 우측으로 명릉이 나온다. 명릉에는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가 쌍릉에 나란히 누워 있고, 2계비 인원왕후가 이들을 내려다보면서 왼편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숙종(16741720 재위)은 경희궁 회상전에서 현종과 명성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곱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열네 살에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했다. 그 후 47년간 집권하다 60세에 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했다.

   숙종 때 당쟁이 가장 심했다. 심지어 북벌론을 둘러싼 명분논쟁까지 당파의 분쟁은 끊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숙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혼란하던 사회를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 실시했음은 물론 북벌정책의 일환으로 압록강 변에 2진을 설치하고 5군영제를 확립, 군제를 개편했으며, 사육신과 단종을 복위하는 등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새로운 평가·정리 작업 등도 시도했다. 상평통보를 시행하였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명릉>


   이곳에 함께 묻힌 인현왕후는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이다. 여흥 민씨 민유중의 딸로 예의바르고 덕성이 높아 자상한 국모로 추앙받았으나 후사가 없었다. 아들을 낳아 득의에 찬 희빈 장씨의 간계로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되었으나 1701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여기에 묻혔다. 인현왕후 폐비사건과 장희빈의 일을 기록해놓은 전기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숙종 능 위편에 홀로 잠든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이다.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로 간택됐으나 소생 없이 살다가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는 평소 숙종과 함께 묻히기를 소원해 미리 명릉에서 400여 보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아두었으나 인원왕후의 소원대로 하자니 정자각을 각각 세워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영조는 지금의 위치대로 능을 쓰고 한 정자각의 제사를 받게 했다고 한다.

<명릉정자각>


   명릉 옆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묘인 수경원(綏慶園)이다. 원래는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구내에 있었으나 1970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1899(고종 36)에 정자각과 비각을 새로 신축하고 비석도 새로 세웠는데 정자각과 비각은 연세대학교 구내에 그대로 남아 있어 비각과 비석이 서로 떨어져 있다영빈 이씨(16961764)는 영조의 후궁 가운데 가장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후궁 가운데 으뜸의 격식으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서오릉 소나무숲>


   수경원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익릉이다. 익릉(翼陵)은 서오릉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다. 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열 살 때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된다. 1680(숙종 6) 천연두를 앓아 발병 8일 만에 세상을 뜬다. 이때 왕비의 나이 겨우 스무 살, 어느새 세 딸을 두었으나 두 공주는 벌써 어미의 죽음을 앞질렀으니 인경왕후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했다.

<익릉>


   순창원을 뒤로하고 오솔길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순창원(順昌園)은 명종(明宗)의 장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와 세자빈인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합장묘다. 원래는 순회묘라고 하였으나 그 뒤 순창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조선 왕실의 무덤은 품격에 따라 능, , 묘로 구분하였으며 이 가운데 원은 왕의 생모나 왕세자, 빈의 무덤을 가리킨다. 봉분 주변으로 정자각과 문인석, 여러 석물 등이 배치되었으나 비각과 비석은 남아 있지 않다

<서오릉 순창원 모형도>


   숨 가쁘게 올라간 세 갈래 길에서 숨을 고르고 더 올라가는 서어나무길을 피하고 좌측으로 소나무길을 택한다. 그런데 소나무길도 마지막 고개는 그리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좌측 능선 너머에 있는 창릉과 홍릉을 지나치고 만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예종(14681469 재위)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가 잠든 능이다. 예종은 겨우 14개월 동안 왕으로 있던 짧은 동안 직전수조법을 제정하고 삼포에서 왜()와의 사무역을 금했으며, 반포는 못했지만 <경국대전(經國大典)>도 편찬했다.

<조선왕릉 역사문화관>

   홍릉의 주인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16921757).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태어나 170413세에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뒤에 영조)과 혼례를 치렀다.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자 연잉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세자빈에 봉해졌다. 18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으나 후사 없이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해 이곳에 묻혔다. 생전에 영조가 들어갈 자리를 미리 만들어 놓았으나 후에 들어가지 않아 왕후의 옆자리는 지금도 비어있다.

<서오릉 고개길>


   소나무 고갯길 넘어 아래로 내려오면 대빈묘가 나온다. 대빈묘(大嬪墓)는 숙종의 넷째 부인이며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禧嬪張氏, 16591701)의 묘다. 1970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서 옮겨왔다. 43세를 일기로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죽임을 당한 희빈 장씨의 묘는 터도 봉분도 곡장도 석물도 초라하고 옹색하기 이를 데 없다.

<대빈묘>


   대빈묘에서 출구 족으로 쭉 나오다 보면 서오릉의 효시가 된 경릉이 자리한다. 경릉(敬陵)은 추존왕 덕종(德宗)과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잠든 곳이다. 홍살문에서 참도로 들어서며 올려다보면 세조 때부터 시행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쌍릉이 보인다. 정면에 정자각이 있고 오른쪽에 비각이 있다. 경릉에 올라서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앞에서 바라보아 왕은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눕는 게 보통인데 경릉은 반대로 덕종이 오른쪽에 잠들어 있다.


<경릉>


   덕종은 세조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세조는 즉위와 함께 능제와 장례의 간소화를 주장했고, 이에 세조의 능제 간소화정책에 처음으로 적용된 게 덕종릉이다. 더구나 덕종은 당시 추존(1478, 성종 9)되기 전이어서 대군묘제도를 적용했으니 초라할 수밖에 없다. 덕종으로 추존된 뒤 왕릉제로 바꾸려했으나 대왕대비 소혜왕후가 손대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나 소혜왕후릉은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된 뒤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세상을 떠나 왕릉의 예를 따랐다.

<경릉 참도와 정자각>


   소혜왕후 한씨는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로 세조 원년(1455)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월산대군과 성종 형제를 두었으며, 성종이 즉위한 뒤 왕비로 추존되면서 소혜왕후가 되었는데 1504(연산군10)68세로 승하하였다. 특히 불경에 조예가 깊었으며,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친 내훈(內訓)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모두 신장이 매우 크고 당당해보이도록 제작되었는데 현재 마모가 심해 윤곽만 알아볼 수 있다.

<경릉모형도>


서오릉에선 특히 한 많은 궁중 여인네들의 처연한 삶을 많이 만난다. 여기에 묻힌 열두 분 중 임금은 세 분이며 나머지는 왕비를 비롯한 비빈(妃嬪) 들이다. 세 분 임금 중 덕종은 추존(追尊)되었고, 예종은 14개월 재위 하였으며, 숙종만 47년간 제대로 임금 노릇하였다. 나머지 비빈들은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구중궁궐(九重宮闕)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간혹 수렴청정(垂簾聽政) 등으로 정치권력의 일선에 머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여인들은 외롭고 고단한 삶을 보내야 했다. ()의 눈물을 삼키며

<서오릉 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