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와야 정유순 2019. 6. 30. 09:36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

(2019629)

瓦也 정유순

   3·1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돌연 192810월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촉탁으로 들어가고, 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계몽운동가요 민족의 지성이었던 육당은 하루아침에 변절자로 전락한다. 그 무렵 어느 날 길거리에서 육당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을 만났다.

 “만해, 오랜만이오.”

 “당신이 누구요?”

 “나요. 육당 최남선이요

 “,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래된 고인이요

육당은 만해로부터 길거리에서 당한 치욕적인 수모는 그의 변절에 대한 당연한 댓가였던 것이다.

   한용운의 나이 41세 때 3·1만세운동이 있었는데, 그는 백용성(白龍城)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만해는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두고 최남선과 의견이 충돌했다. 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어서 자신이 직접 선언서를 작성하겠다고 자청하였으나, 선언서는 이미 최남선에 의해 기초가 마무리된 단계여서 행동강령인 공약삼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공약삼장(公約三章)

(하나)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유의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마지막 한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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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또한 어느 해 한용운은 모 사찰 대법당 강연에서 전국에서 모인 중진 승려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게 똥이고, 똥 보다 더 더러운 게 송장 썩는 것이고, 썩은 송장 보다 더 더러운 게 일제의 어용정책에 수용하는 대가로 감투와 재산을 챙긴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라고 뇌성벽력 같은 목소리로 꾸짖으며 법상(法床)을 내리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법당에서 나가버렸다. 당시 일제 치하의 조선 불교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에 의거 어용화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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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났다.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14살에 결혼하였으나 갑오경장 등 격변기를 거치며 18세 때 무단가출하여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하며 불교의 기초지식을 익히면서 선()수행에 정진한다. 그 후 오세암에서 나온 한용운은 개화문물과 사회에 대한 호기심으로 만주와 시베리아 등으로 돌아다닌다.

   방랑 생활을 하며 독서로 불교와 동·서양의 철학을 깨친 후 27세 때 다시 입산해 설악산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불문에 든다. 백담사에서 독학으로 대장경을 익히며 불경들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여 1913년에 펴낸 <조선 불교 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은 한국 불교의 전반에 걸친 개혁 방안을 제시한다. 이 책은 교계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일본 불교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공포해 불교 통제를 강화하던 시기에 나와 더욱 주목받는다.

<심우장 입구>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하였고, 1927년 한용운은 좌우 합작 노선에 따라 결성된 신간회발족에도 앞장서 3·1만세운동 이후 33인 민족대표 대부분이 탄압과 회유에 넘어가 변절하였으나 그는 지조를 꿋꿋이 지켜 당시 조선 청년들의 존경을 받았다. 3·1만세운동의 주모자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옥하는 날, 환영 나온 동지들에게 환영하러 나올 것이 아니라 환영받는 사람이 되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출옥 이후 일제와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철저히 비타협주의를 고수하였다또한 독립운동세력의 이념과 노선 통합을 역설하면서 1926 6·10만세운동과  1927 좌우합작 단체로 결성된 신간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이에 신간회  발기인중앙집행위원경성지회장으로 추대되어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증폭시키기 위한 민중대회에 참여하였고식민지 교육제도인 한일공학제도를  반대하고 조선인본위교육을 주장하였다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상무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심우장 대문>


   또한 민족과 국가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며 이를 남녀관계에도 적용하여 여성해방운동을 펼쳤다. 1930년대 중반에는 신문 연재소설 <흑풍(黑風)> 통해 여성해방운동의 이론과 강령을 제시하였다이와 함께 소작쟁의 등 농민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30년대 들어 경제적 불평등의 실체를 이해하고 이를 타개할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특히 근대적 경제개념에 입각한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운동 제시는 앞서가는 사회사상이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2에 있는 만해의 유택(遺宅)인 심우장은 1933년 만해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손수 지은 집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이다. 이는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당시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으로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6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규모는 총 112.99평의 대지 위에 17.8평의 건평으로 단층 기와 팔작지붕이다. 집의 구조는 정면 4간 측면 2간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형태다. 만해가 죽은 뒤에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대사관저가 이 곳 건너편에 자리 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이 집은 만해사상연구소로 사용해 왔다.

<심우장>


   심우장(尋牛莊)심우(尋牛)’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선종(禪宗)의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사적 제550(201948)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처음 쓴 것은 잃어버렸고, 일창(一滄) 유치웅(兪致雄, 19011998)이 다시 써서 걸었다.

   한용운은 일생에 걸쳐 징용이나 보국단 또는 이른바 황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한때 독립 운동에 앞장서기도 한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변절하고 말았지만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아예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는 등 일제의 어떤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심우장 마당에 홀로 서있는 낙락장송은 만해의 기개와 풍상을 그대로 안고 있다.

 

<심우장 현판>


<만해동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