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다섯 번째-1)

와야 정유순 2019. 6. 25. 22:02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다섯 번째-1)

(영월각동리-단양하선암, 201962223)

瓦也 정유순

   영월 땅을 벗어나기 전에 영월군 하동면김삿갓면으로 이름까지 바꾸게 한 김삿갓의 묘소를 둘러본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호는 난고(蘭皐). 1807(순조7)313일 경기도 양주군 회동면에서 출생한 김삿갓은 6세 때 조부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 난에 투항하여 폐족을 당한 후 황해도 곡산, 경기도 가평·광주, 강원도 평창 등을 전전하다 영월 삼옥리(三玉里)에 정착하여 화전을 일구며 살게 되었다.

<김삿갓 묘>


   “홍경래난 때, 순절한 가산 군수 정공의 충절을 찬양하고, 항복한 김익순을 규탄하라.”(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라는 시제(試題)가 떨어지자 약관의 김병연(金炳淵)은 타고난 글재주로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한껏 저주하는 답안을 제출하여 영월의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김병연은 어머니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김익순이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조상을 욕되게 하여 하늘을 쳐다볼 수 없어 삿갓을 쓰고 방랑생활을 하며 벼슬길을 포기하였다.

<김삿갓 석상>


   이때부터 김삿갓은 금강산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다 지친 몸으로 말년에 들른 곳이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이었는데, 그곳 명소 적벽(赤璧)’에 매료되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18635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훗날 그의 차남이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마을로 이장하여 안치하였다. 태백산과 소백산이 이어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 잡고 있는 김삿갓묘는 마대산 줄기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흘러내려 꾀꼬리 둥지같은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김삿갓문학관>


   김삿갓묘역에서 옥동천을 따라 오늘의 시작점인 김삿갓면 각동리로 이동한다. 하동천(下東川)으로도 불리는 옥동천(玉洞川)은 영월군 상동읍 구운산(九雲山, 1,346m)에서 발원하여 태백시와 상동읍의 경계를 이루며 북류하다가 상동읍(上東邑)과 중동면(中東面)의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고봉들 사이를 유유자적하며 영월의 동남부를 흘러 김삿갓면 옥동리에서 남한강으로 합류한다. 옥동천은 길이 54.50km, 유역면적 495.25이다.

<김삿갓문학상 수상자 시비>


   각동리(角東里)는 한겨울에 폭설이 내려도 한나절이면 눈이 녹을 정도로 따스한 곳으로 옛 선인들은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나 천 바위와 만 구렁에 한강이 감돌아가는 길지라고 했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살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북풍은 태화산(太華山)이 막아주고 남풍만 들락거려 골짜기마다 명당 터로 옛날부터 소문이 나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영월지방에서 대나무와 감나무가 유일하게 자라는 곳이라고 한다.

<각동리 595지방도로>

<남한강(각동리)>


   각동리를 지나면 하늘이 내린 살아 숨 쉬는 땅! 강원도를 벗어나 충북 단양군 영춘면 오사리다. 오사리(吾賜里)는 조선시대 때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에 딸린 오사역이라 한데서 오사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생골, 설하동우장터 등이 있다. 생골은 크고 좋은 샘이 있다하여 붙은 이름이며, 설하동은 양지바르므로 겨울에 눈이 빨리 녹는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우장터는 전에 쇠불림을 하였으며 소를 많이 매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오사리마을>

<남한강(오사리)>


   영월의 각동리에서도 많이 보았지만 단양의 오사리에서도 호두나무가 푸른 탁구공만 하게 열려 푸른 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호두나무는 가래나무과의 낙엽교목으로 중국 원산이며 중부 이남에서 재배하고 있다. 높이 20 m에 달하고 가지는 굵으며 사방으로 퍼진다. 여린 잎을 비벼 냄새를 맡으면 향긋한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45월에 꽃이 피고 열매는 둥글고 털이 없으며 핵은 도란형이고 연한 갈색이며 봉선을 따라 주름살과 파진 골이 있다. 가을에 열매를 수확하면 식용으로 이용되며 목재는 가구재로 이용된다.

<호두나무 열매>


   오사리에서 영춘면사무소가 있는 상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활고개. 활고개는 태화산자락에 위치한 고개로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태화산(1027)은 영월군과 충북 단양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안산(案山)으로, 남한강이 산자락을 휘감아 흐르고 4억 년의 신비를 간직한 고씨동굴(천연기념물 제76)을 품에 안고 사계절 변화무쌍한 부드러운 능선 길은 아름다운 비경을 보여주어 가족단위 산행지로 최적의 코스라고 한다.

<활고개 쉼터>


   활고개쉼터에서 숨을 고른 후 상리 느티마을 쪽으로 내려오면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남한강가에는 깎아지른 석벽이 녹음 짙은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이곳은 조선 영조 때 영춘현감을 지낸 이보상(李普祥)이 석벽에 북벽(北壁)’이라고 암각 한 것이 명칭이 되어 지금까지 불려오고 있다. 높이는 수십 길이고, 길이는 약 500보에 이른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청명봉(靑冥峰)은 그 형상이 매가 막 날아오르려는 모습을 하여 응암(鷹岩)이라고도 한다. 넓고 웅장한 석벽을 안고 도는 자연환경과 어류서식환경이 우수한 곳이다.

<남한강과 북벽>


   원래 영춘은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었는데, 757(경덕왕16)에 자춘(子春)으로 고쳐 내성군(奈城郡-지금의 寧越郡)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 때 영춘으로 고쳐서 원주(原州)에 속하게 하였다. 1399(정종1) 영춘과 영월이 견아상입지형(犬牙相入地形)이라 하여 그 소속을 맞바꾸어 영춘을 충청도로 이속시켰으며, 1413(태종13) 현감을 두었다. 1895(고종32) 군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단양군에 병합되어 영춘면이 되었다. 소백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군사·교통 상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영춘면 지도>


   영춘면(永春面) 상리는 면사무소가 있는 면소재지다. 본래 영춘면 내 위쪽이 되므로 윗말 또는 상동이라 한데서 상리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둔둘바우, 쉬는들 등이 있다. 둔둘바우는 상리나루 북쪽에 있는 바위로 전에 어느 장군이 가져다 놓았다 한다. 쉬는들은 휴석(休石)이라고도 하며 장터 서쪽 내 건너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온달장군이 쉬어 갔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영춘면에는 천태종의 총본산인 구인사와 온달산성 등이 있다.

<온달관광지>


  소백산구인사(小白山救仁寺)는 대한불교 천태종(天台宗)의 총본산으로 1945년에 건립되었으며, 1966년 현대식 콘크리트로 지은 이색적인 건물이다. 한국 천태종의 중흥조(中興祖)인 삼척 출신의 상월원각(上月圓覺, 속명 朴準東)1942년 중국 티베트 등지에서 곤륜산(崑崙山오대산(五臺山)의 문수도량(文殊道場)과 아미산(峨嵋山)의 보현성지(普賢聖地) 등을 순례하고, 광복 후 귀국하여 1945년 초 소백산에 들어가 구봉팔문의 연화지(蓮華地)를 찾아 천태지관(天台止觀)의 터전을 닦기 시작하여 대가람(大伽藍)으로 급속 발전하였다.

<구인사 가람 배치도>

<구인사 일주문>


   주차장이 있는 동문당(東文堂) 앞에서 일주문을 통해 관성당(觀性堂)과 국내 최대 규모의 청동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는 천왕문(天王門)을 거쳐 인광당(仁光堂)과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삼층석탑을 차례대로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계단의 경사는 변함이 없지만 따라 올라가는 중생은 갈수록 숨이 더 차오른다. 관음전(觀音殿)과 설선당(說禪堂) 등 몇 개의 전각을 거쳐 광명전에 다다르고 숨이 턱 밑에 찰 즈음 맨 위의 대조사전(大祖師殿)에 당도한다. 



<구인사 삼층석탑>

<구인사 가람>


  대조사전은 1976년에 창건주인 상월 대조사의 금동 좌상을 조성하여 삼보당에 봉안하였다. 2000년 경내 맨 위쪽에 대조사전을 짓고, 상월좌상을 봉안하였다. 대조사전 뒤쪽 산에 있는 상월 대조사의 묘소는 적멸궁이라 칭하고 있다. 이 천태종단은 염불(念佛) 중심의 의례종교를 탈피하고, 생활 속에 자비를 실현하는 애국불교·대중불교·생활불교를 지향하며, 주경야선(晝耕夜禪)으로 자급자족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절에는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법당, 135평의 목조강당인 광명당(光明堂) 50여 채의 건물이 있다.

<구인사 대조사전>

<구인사 대조사전 마당>


   “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나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이다라고 설법하는 구인사에서 온달관광지로 이동하여 온달산성으로 오른다. 온달산성 가는 길은 경사가 매우 급해서 오르기가 숨 가쁘다. 도중에 만나는 사모정에서 잠시 강줄기 내려다보며 숨을 고른 후 온 만큼 다시 올라가면 성벽 끊어진 틈으로 들어간다. 이곳이 온달산성의 북문 자리이다. 성의 둘레는 683m로 그리 크지 않으며 남서쪽으로 치우친 봉우리와 북쪽으로 흘러내린 비탈을 에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온달산성 전경>


   <삼국사기>에는 영양왕 1(590)에 온달이 왕에게 신라가 우리 한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나 그곳 백성들이 통한하여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 하고 아뢰고 계립령(지금의 충주시 지릅재 일대)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출정하여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내용이 있다.

<온달산성 북벽>


   사적 제264호로 지정된 온달산성은 온달이 배수진을 치고 신라군과 싸우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져왔다. 그러나 남한강 건너 북서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의 위치나 북서쪽에만 문이 없고 성벽도 특히 높은 점 등은 신라가 북쪽의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축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즉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비하여 신라가 강 건너 북쪽을 노려보며 전초기지로 쌓은 것 같다. 그래서 온달은 이 성을 쌓았다기보다 이 성을 치려다 전사한 것이 아닌 가 여겨진다.

<온달산성 서벽>


   어쩌든 온달의 전설이 살아 움직이는 온달관광지로 다시 내려와 향산여울이 일렁이는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삼층석탑으로 이동한다. 이 석탑은 신라 눌지왕 19(435)에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呼子)가 깨달음을 얻은 이곳에 향산사를 처음 건립하였는데 묵호자가 죽은 뒤 제자들이 탑을 건립하고 사리를 모셨다. 향산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고 삼층석탑만 남아 있었는데, 1935년 사리가 도굴꾼에 의해 도난당하고 완전 해체된 것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향산리 삼층석탑>


   향산리에서 남한강 여울을 따라 다시 하류로 걸어간다. 강 건너 가곡면 가대리마을 앞에는 가대여울이 물살을 가른다. 가대리 문화마을 뒤로 우뚝 솟은 노갈봉은 노인이 갈잎으로 만든 도롱이를 쓰고 남한강 물에 낚시를 드리운 산세를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너른 여울엔 쏘가리, 누치, 피라미 등의 자원이 풍부하여 견지낚시와 루어낚시꾼들이 진을 친다.

<가대리 문화마을>

<남한강(가대리)>


   일 년 중 낯이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 저녁햇살은 가곡면 사평리를 길게 비친다. 저녁이면 양쪽으로 벌어졌던 잎이 가지런히 합장을 한다고 하여 금술 좋은 부부나무로 불리는 자귀나무도 닭 벼슬 같은 꽃잎을 반짝인다. 자귀나무는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나무로 합환수(合歡樹) 등으로 불린다. 이런 연유로 산과 들에서 자라는 나무를 마당에 정원수로 많이 심었다. 자귀대의 손잡이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나무였기 때문에 자귀나무라고 하며 소가 잘 먹는다고 소쌀나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자귀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