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4코스

와야 정유순 2019. 6. 20. 22:42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4코스

(합정역삼성산, 2019618)

瓦也 정유순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4코스는 합정역에서 출발한다. 합정역은 19845월 서울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면서 처음 개업하였고, 2000126호선이 개통되면서 환승역이 된다. 역명은 합정동 동명에서 유래했으며, 합정은 과거 조개우물로 불렀던 우물이 있어 붙여졌다. ‘합정(合井)’은 원래 한자로 蛤井이라 쓰였다. ‘잠두(蠶頭)이라 불렀던 절두산(切頭山)에서 조선시대 망나니들이 칼춤을 추기 전에 칼을 갈고 물을 뿜기 위해 양화진 앞에 우물을 팔 때 민물조개가 많이 나와 조개우물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합정역>


  합정역 3번 출구로 나와 홍대 앞 골목을 경유한다. 아침나절이라 그런지 홍대 일대의 카페와 미술작업실 등은 조용하기만 하다. 홍대는 홍익인간의 실현을 위해 설립된 홍익대학교의 준말로 용산에 있던 홍익미술대학이 이곳으로 이전해 오면서 홍대거리라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고,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외국인들이 몰려들면서 명실상부한 서울 서부지역 최대의 번화가가 되었으며, 지금은 합정동과 상수동, 연남동 등 주변일대로 문화권이 확대 형성되었다

<홍익대학교>


   홍대 뒷산이며 19704월 부실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진 와우산(臥牛山, 101.8)을 우회하여 창전삼거리를 지나면 경의중앙선 서강대역이 있고, 서강대학교가 나온다. 1948년 한국가톨릭교회 발의 및 교황 비오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을 추진하여 19604월 개교하였다. 교훈은 진리에 순종하라. 1964년 사립학교법에 따라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을 개편하였고, 1970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지금은 8개 학부와 12개 대학원으로 약 8천여 명의 학생들이 수학한다.

<서강대학교>


   서강대학교가 안주한 곳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노고산(老姑山, 106)자락이다. 서강대학교 교정이며 노고산자락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조선에 들어와 전교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참수된 3인의 프랑스 신부의 유해가 묻혔던 곳이다. 세 사람은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앵베르[17971839, 한국명 범세형(范世亨)]주교와 모방[18031839, 한국명 나백다록(羅伯多祿)]신부 및 샤스탕[18031839. 한국명 정아각백(鄭牙各佰)]신부다.

<앵베르 주교>


   이들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시신이 한강변에 20여 일 동안 방치되어 있는 것을 신자들이 몰래 수습하여 이곳 노고산에 표시도 묘비도 없이 남의 땅에 매장 하였던 곳이다. 4년 후 박 바오로는 자신의 선산인 관악구 삼성산으로 이장하고 자신도 절두산에서 순교하게 된다. 서강대학교 정문 안 좌측에는 앵베르주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 3인을 기리는 현양비가 있다.

<현양비>


   현양비를 뒤로하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시성(諡聖)된 성() 이냐시오(Ignatius)관이 나온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는 예수회의 설립자로 스페인 북부 비스크지역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는 기사로 출세하려 했으나,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훌륭한 동료들을 만났고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로마에서 예수회를 창설하여 인가를 받는다.

<성 이냐시오 관>


   그 당시에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로 이를 집약하면 예수회 주제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함이다. 이러한 이념을 가진 예수회가 전 유럽에서 수도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세운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서강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노고산기슭에는 로욜라 언덕이 있고, ‘이냐시오 데 로욜라성인의 동상이 있다.

<성 이냐시오 관 예배당>


   서강대학교에서 나오면서 바로 경의선 숲길로 들어선다. 경의선 숲길은 경의선 및 공항철도가 지하에 건설되면서, 그 상부에 조성된 공원이다. 지하 약 1020m 아래에 경의선을 복선으로 건설하고, 그보다 더 아래인 지하 약 3040m에 공항철도를 건설하여 공원부지를 마련하였다. 철도부지의 소유권자인 철도시설공단 측과 서울시는 앞으로 무상으로 공원부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그동안 지역적 단절요소로 남아있던 철길이 새로운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경의선 숲길 커뮤니티센터>

<경의선 숲길>


   숲길 대부분이 철로를 철거하고 나무 등을 심어 녹색공간이 흐르는 공원화를 하였으나, 일부 구간은 철로를 그대로 남겨 놓아 옛날의 추억을 불러 올 수 있게 만들었다. 마포구 신수동대흥동공덕동도화동으로 이어지는 경의선 옛길은 그동안 단절되었던 이웃과의 소통을 열어주었고, 도시인들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러나 공덕동 지역에서는 상업적 개발을 반대하는 천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일부에서는 경의선 부지를 상업적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있는 것 같다.

<경의선 옛철길>

<경의선공유지 개발 반대 쉼터>


   숲길에는 새창고개라는 푯말이 있다. 용산구 효창동에서 마포구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고개 부근 효창동 213번지 일대에 조선시대 선혜청의 별도창고인 만리창을 이곳에 새로 지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신창고개라고도 하였는데, 인근 마을을 새창마을이라고 하였다. 만리창의 창고 규모는 진휼청에 소속된 창고가 35, 해서 소속 3, 호남 소속 20문 등 모두 58문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군의 혼성여단이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청일전쟁 수행의 주요거점으로 삼았다 한다.

<새창고개>


   공덕동오거리와 용산구 도원동을 지나 산천동에 들어서면 용산성당이 나온다. 용산성당은 1920년경 약현본당(현 중림동 본당)의 삼호정(三湖亭)공소로 출발하여 1942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일제는 한국 교회의 교구장 자리에 일본인 주교를 임명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당시 제9대 서울대목구장 라리보주교의 노력으로 인해 노기남신부가 제10대 서울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용산성당>


   이후 라리보 주교는 거처를 용산신학교로 옮겨 용산의 성모성심성당에서 성사를 집전하였으며, 노기남주교의 인정 하에 당시 약현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용산본당으로 설립되었다이후 일제가 용산본당을 대공포진지로 사용하면서신학교 내의 예수성심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려야 하는 시련도 있었다. 광복 이후 훼손된 성당을 복원하였고, 1954125일 성당을 완공하여 노기남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용산성당 예배실>


   특히 이곳에는 초기 사제들과 무명 치명자 등 70여 기의 유해가 안장된 교구 성직자 묘지가 있어서 전국의 성직·수도자들과 신자들이 찾아오는 준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또한 2010년 로마 리베리오 교황 성모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모 순례지 전대사(全大赦) 특전을 부여받아 용산성당을 순례하는 이들에게도 로마 리베리오 교황 성모 대성전을 순례한 것과 동일한 전대사가 수여된다고 한다.

<용산성당 묘역>


   용산성당에서 한강 쪽으로 맞은편에는 성심여자고등학교 교정이 있고, 후문으로 들어가면 옛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이 있다.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학교와 그 부속성당이었다. 지금도 꽤 높은 언덕인 이곳은 원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함벽정(涵碧亭)이 있던 곳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887년 한·불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이 땅을 매입했는데, 이곳은 기해박해(1839) 때 교도들의 순교 현장이었던 당고개와 병인박해(1866) 때 성직자들이 참수당한 새남터가 가까이에 있다.

<성심여자고등학교 후문>


   용산신학교의 역사는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등평리에서 1885년에 개교한 예수성심신학교가 1887년에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전 후 초기 교육은 한옥에서 이루어지다가 신학교 신부들이 뜻을 모아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인 용산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용산신학교는 18915월 정초식을 갖고 18926월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감독을 총괄했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했다.

<옛 용산신학교>


 ​  그 뒤 1928년 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옮겨가면서 이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로 이용되었는데 1956년 한국에 진출한 성심수녀회의 수녀원에 양도되어 지금까지 수녀원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용산신학교 건물은 현재 원효로성당과 성심중학교, 성심여고와 일군을 이루고 있는데 각 건물은 독립된 공간으로 존재하면서 유기적으로 연계돼 있고, 또한 건물의 외형이나 공간 구성이 안정된 개성을 유지하고 있어 주변의 혼잡한 풍경과 대비되는 평온한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다.

<옛 용산신학교와 그 주변>


  원효로성당 건물은 189969일 착공하여 1902414일 축성식을 올렸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지형을 이용하여 전면 일부는 언덕 아래에 3층으로 언덕 위는 단층으로 되게 하여 작은 건물이지만 당당한 외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부의 천장구성과 장식은 고딕 양식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고 소박하지만 커다란 장엄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원효로성당은 용산신학교와 함께 사적 제255호이다.

<원효로성당 내부>


   성심여고 후문으로 나와 약3쯤 떨어진 용산구 용산동5가에 있는 왜고개성지로 도보 이동한다. 서울용산우체국 옆 한강대로 변에 있는 왜고개는 조선시대 500여 년간 기와와 벽돌을 공급하던 와서(瓦署)가 있던 곳으로 명동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도 이곳 벽돌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왜고개성지는 1846년 병오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신부가 미리내 성지에 묻히기 전 잠시 머물었던 곳이다.

<왜고개성지 표지석>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 성 도리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 등은 현재 절두산 성지에, 시복이 되지 않은 프티니콜라 신부와 푸르티에 신부는 용산 성심신학교에 이장되었다가 현재 명동성당 지하에 안치되었다. 또한 같은 병인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도 이곳에 43년간 묻혀 있다가 1909년 명동성당을 거쳐 현재 절두산성지에 모셨다.

<왜고개에 묻혀던 열 분의 순교자>


   따라서 왜고개는 순교한 성인들이 머물고 간 장소로서 교회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으로, 순교자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왜고개성지에는 군종교구주교좌성당과 함께 순교자 현양비, 십자가의 길 14, 십자고상, 기도처 등이 마련되어 있다.

<군 종교구 주교좌성당>


   왜고개성지에서 서울 관악구에 있는 삼성산성지로 이동하기 위해 한강대로로 나와 KT용산지사 정류장에서 152(수유동경인교대) 버스를 이용한다. 버스는 한강대교를 건너 관악구청 앞과 장승백이를 지나 신림동로타리 등을 경유하여 한 시간 쯤 지나서야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 삼성산성당으로 들어서면 두 팔을 벌려 맞이하는 예수님 상과 눈 맞춤을 하고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로 올라간다.

<삼성산성당 예수님 상>


   삼성산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노고산에 묻혔던 세 분이 1843(헌종9)에 박 바오르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박씨의 선산인 이곳에 안장되었다. 앵베르는 1837년에 제2대 조선교구 주교에 임명되어 1838년 조선에 들어와 전교활동하다 수원에서 체포되었다. 모방신부는 1836년 조선에 들어와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선교사로 여겨지는데 충청도 홍성에서 체포되었다. 샤스탕신부는 앵베르주교를 따라 서울에 잠입하여 전교활동하다 충청도 홍성에서 체포되었다.

<세 성인의 묘역>


   ‘삼성산(三聖山)’이란 명칭은 본래 고려 말 명승 나옹·무학·지공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으나, 이곳에 세 선교사의 유해가 안장되고 그들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오름에 따라 천주교회 안에서는 삼성산세 명의 성인 유해가 안장된 성지로 설명하게 되었다. 현재 삼성산 성지는 삼성산 본당에서 관리하고 있다.

<천주교 삼성산성지 표지석>


   삼성산성지를 순례하고 관악산둘레길을 따라 서울대학교 앞 관악산공원까지 종주한 후 일정을 마무리 지면서 1838년 앵베르 주교 번역한 내용을 마음 속 깊게 조용히 읊어본다.

마리아 지극히 정결하신 성모여

내 마음과 몸을 조촐케 하시고

나를 도우사 사욕을 이기어

모든 죄를 멀리 떠나게 하소서

<앵베르주교 번역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