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지리산 숨은 비경 대성골과 서산대사 행선길

와야 정유순 2019. 6. 18. 08:53

지리산 숨은 비경 대성골과 서산대사 행선길

(2019615)

瓦也 정유순

   일찍이 이 땅을 만드신 조물주께서 큰 붓에 먹물을 잔뜩 묻혀 처음 점을 찍어 시작한 곳이 백두산이고 남으로 획을 찍어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내려오며 금강산·설악산·태백산·소백산·속리산·덕유산을 형성한 후 고개를 들어 동해 너머로 바라보게 하고 멎은 산 지리산(1915.4m)!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신하는 곳이라는 지리산(智異山)!

<지리산 의신마을 지도>


   새벽 공기를 가르고 전남 구례를 경유하여 화개장터를 지나 그 유명한 십리 벚꽃 길을 통과하고 쌍계사 다리를 지나 의신마을의 대성골 입구인 지리산역사관 앞마당이다. 이곳에서 여장을 다시 점검하고 가볍게 몸을 푼 다음 대성골 가는 입구로 다가간다. 입구에는 세석탐방로로 표시되어 있다. 아마 세석평전(細石坪田)’으로 가는 길목인 것 같다. 세석평전은 대략 1,500m 고도에 있으며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고위평탄면이다.

<지리산역사관>

 <지리산 의신마을 전경>


   6월 중순 대성골을 진동하는 밤꽃 향의 유혹을 받으며 숲 터널로 빠져든다. 녹음은 짙푸르다 못해 검은색을 띠고, 벼룻길 아래 물 흐르는 소리는 여울을 이루며 지리산 대성골이 살아 있음을 소리로 함창(含唱)한다. ‘대성골은 지리산의 영신봉(1652m)과 칠선봉(1558)의 남쪽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계곡 물이 합류하여 크고 작은 폭포와 소()를 만들어 화개천으로 들어가 섬진강을 타고 남해로 흐른다.

<세석탐방로 입구>

<밤꽃>


   세석탐방로 문을 통과해서 들어선 계곡 길은 밤새 비가 왔는지 조금 촉촉하게 젖어 있다. 바위가 있는 곳은 약간 미끄럽기도 하지만 흙길은 걷기에 아주 상쾌하다. 대성동 주막까지는 약 2.5정도로 걸음 속도가 느린 내 기준으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완만한 오르내리막이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도착한 대성동 주막의 평상에는 미리 자리를 잡은 도반들이 막걸리 잔 을 기울이며 자연과 벗 삼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한다.

<대성골주막>

<대성골계곡>


   대성동주막에서 의신마을로 되돌아 나온다. 들어갔던 문을 빠져나오면 들어갈 때는 보통 묘로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항일투사 17인 의총(義塚)’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1908년 한일병탄 2년 전에 이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온몸으로 저항하며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맞이한 항일 무명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늦게나마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항일투사 17인 의총>


   또한 의신마을 도착 즉시 잠깐 둘러본 지리산역사관에는 원래 이곳에서 살았던 화전민들의 생활상과 지리산 빨치산의 최후를 기록한 전시물들이 있. 대성골은 한국전쟁 당시 포위당한 빨치산(partizan)’들의 최후의 격전지였고,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그들을 대성골로 몰아넣어 대장 이현상(李鉉相, 19051953)을 비롯한 수백 명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계곡에는 이들의 핏물이 며칠간 흘렀던 분단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다.

<화전민촌의 너와집-지리산역사관>


   의신마을에서 산채비빕밥으로 오전을 마무리하고 지리산옛길인 서산대사길로 접어든다. 서산대사(15201604)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은 궁극적으로 일치한다는 통합의 기틀을 마련했다. 서산대사는 의신마을에 위치한 원통암에서 1540년 출가해 휴정(休靜)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로 4.2이어지는 이 길이 바로 서산대사가 출가하기 위해 원통암으로 걷던 바로 그 길이다. 그래서 서산대사길이라고 명명된 것이다.

<서산대사길 입구>

<서산대사길 계곡>


   또한 이 길은 보부상들이 광양 등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해산물을 섬진강 화개나루까지 배로 실어와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지나 의신계곡을 거쳐 지리산의 주능선인 벽소령을 넘어 함양 쪽으로 팔러 다니던 길이자 의신마을 주민들이 산에서 구워낸 참숯을 화개장터에 팔러 넘나들던 옛길은 붉게 핀 석류의 꽃봉오리가 질투의 화신처럼 이글거린다. 그래서 이슬람교 예언자 마호메트는 질투와 증오를 없애려면 석류를 없애라고 했던가?

<석류 꽃>


   숲길로 접어들어 벼룻길을 따라 내려가면 서산대사가 도술을 부린 의자바위가 나온다. 이 의자바위는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쳐들어와 의신사를 불태우고 범종을 훔쳐 가려는데,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서산대사가 도술을 부려 범종을 의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를 본 왜병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갔으며, 그때부터 의신사 범종은 이 길을 지나는 이들의 고단함을 풀어주는 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서산대사 의자>


   내려오는 길옆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파편처럼 남아있다. 자연풍화로 형성된 암석들 사이로 여울을 이루며 흐르다 고인 물은 바로 명경(明鏡)이로다. 하루 종일 신발 속에 갇혀 있던 발은 시원한 물을 보자마자 성급히 빠져나와 물속에 담가진다. 세파에 찌든 오장육부의 찌꺼기가 물에 잠긴 발끝을 통해 빠져나와 자연 속으로 녹아든다. 출렁다리를 건널 때는 동심으로 돌아가 마음마저 출렁인다.

<지리산계곡의 명경지수>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물은 온갖 세상소리를 속삭인다. 독립 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선생도 시국이 어지럽고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할 때마다 서산대사의 오도송(悟道頌)답설야(踏雪野)’를 되새겼다고 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관계가 얽히고설키며 살아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늘 겸손한 마음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며, 올바른 길로 가고자 이 길을 걸으면서 다짐해본다. 나도 누군가가 꽃길로 가는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면서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不須胡亂行, 불수호난행)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서산대사 오도송>

<서산대사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