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동누리길과 오선누리길
(2019년 6월 4일)
瓦也 정유순
1. 고양동누리길(필리핀참전비∼안장고개, 고양누리길12코스 7.1㎞)
지하철 3호선 삼송역에서 통일로를 따라 마을버스를 타고 필립핀참전기념비앞 교차로 최영장군 묘역 입구에서 내려 약2㎞ 이상을 걸어 간다. 묘역 부근에는 조선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령대군(誠寧大君, 1405∼1418)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길목 도중에는 “옛 왕들과 풍수학자들이 인정한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추모공원이 자리한다. 옛날에는 묘 자리의 명당을 풍수지리가 좋은 곳을 잡았으나 지금은 ‘후손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 명당이라고도 한다. 길옆으로는 공릉천의 지천인 대자천(大慈川)이 흐른다.
<성령대군묘역입구 비석>
<추모공원>
1. 황금을 보기로 돌 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라 최영장군
) -->
2. 이 겨레 이 나라 바로잡고자
남으로 왜적을 물리치시고
북으로 오랑캐를 무찌르시니
장하다 그 이름 최영장군
) -->
3. 요동(遼東) 땅 너는 알라 장군의 뜻을
위화도(威化島) 회군의 원한을 품고
조용히 참형으로 돌아가시니
슬프다 붉은 무덤 최영장군
) --><최영장군 노래 가사>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묘역 입구에는 아버지의 가르침인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비석이 자리를 지키고 최영(崔瑩, 1316∼1388)장군 묘는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간다. 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한 위화도 회군파가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하자, 최영은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유언을 하고 최후를 맞이한다. 실제로 무덤에는 오랜 세월 동안 풀이 자라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후손들의 정성으로 1976년부터 풀이 돋기 시작하여 무성하다.
<최영장군 묘역>
동주최씨(東州崔氏)로 강원도 철원출생(일부에서는 충남 홍성출생 주장)인 최영은 1352년(공민왕1)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이후 100여회의 전투에서 승리한 명장으로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와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지역을 회복하였다. 또한 요동정벌을 단행하여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위화도회군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1388년 개경에서 처형되어 아버지인 최원직의 묘소 앞에 안장되었다. 최영이 죽은 뒤 4년 후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하였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최영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안쪽)아버지 최원직 묘, (바깥쪽)최영장군 묘>
언젠가 고조선의 옛 땅인 요동지역을 지나가는데 드넓은 평야에 석유를 캐는 유전(油田)과 송유관이 널려있는 것을 보고 삼국시대 때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김춘추가 미웠고, 원·명 교체기인 고려 말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면서 소위 소중화(小中華)를 꿈꿨던 이성계가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요동지방의 유전-2018.7촬영>
<요동지방의 송유관-2018.7촬영>
최영은 고려의 충신으로 큰 공로를 이룩했으나 직속 부하 이성계에게 배신을 당하고 참수까지 당하게 되는 억울한 생이 부각되어 한국의 무속에서는 그를 장군신으로 좌정시킨다. 최영장군은 임경업(林慶業, 1594~1646)장군 및 남이(南怡, 1441~1468)장군과 함께 한국의 주요 장군신으로 모셔지지만 이 가운데 최영 장군이 가장 널리 숭앙되고 있다. 무속적 세계관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왕이나 장군 및 유명한 공인 등은 무속의 신적 세계관에서 신격으로 추대되고 숭상의 대상이 된다.
<산신제단>
묘역 상단에 있는 ‘산신제단(山神祭壇)’ 옆으로 하여 대자산(大慈山)을 지나 고양향교로 내려온다. 대자산(210m)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과 고양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대자(大慈)’라는 이름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대자사라는 사찰을 준공하고 마을이름으로 붙여진데서 비롯된다. 대자산의 산세는 북쪽으로는 파주시와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공릉천에 닿는다. 정상은 군사시설로 통제되어 있지만, 최영장군 묘역과 고양향교를 비롯하여 성령대군, 경안군, 임창군 등의 왕실묘역을 품고 있다.
<대자산>
경기도문화재자료(제69호, 1985년 9월)로 지정된 고양향교(高陽鄕校)는 1689년(숙종15)에 설립되었으며 조선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교육기관으로 청소년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양민 이상이면 입학할 수 있었으며 시나 문장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공부하는 경학이 주요 교육내용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서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다.
<고양향교 전경>
구조는 일반적인 향교건물 배치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이룬다. 즉 앞의 외삼문 안에는 공부하는 강학(講學)공간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서재를 두었고, 뒤의 내삼문 안으로는 제향(祭享)공간인 공자와 4성현을 제사지내는 대성전과 공자의 제자 및 우리나라 현인을 제사지내는 동·서무를 두었다. 현재는 교육은 담당하지 않고 매년 음력 8월 27일에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만 행한다.
<명륜당>
고양향교 바로 옆에는 중남미문화원부설박물관이 있으나 들르지 않았다. 이 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중남미 관련 박물관으로 홍갑표 이사장이 설립하였다. 30년 동안 코스타리카,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지역에서 외교관 생활을 오래한 이복형 원장 부부가 수집한 3,000여 점의 중남미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곳이다. 제2회 고양 건축문화대상을 받았으며 마야·잉카·아즈텍 문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중남미문화박물관>
향교마을에서 고양일고등학교를 지나 계명산 고개에는 성황당고개와 돌무지 이야기가 있다. 이 성황당고개는 고양동과 선유동 경계에 있는 고개로 선유동누리길 구간 중 가장 높은 곳이다. 본래 이곳은 중국과 한양을 잇는 연행로(燕行路)로 이 길을 왕래하던 사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녔던 옛길이다. 이 고개에는 왕래하는 사람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비는 돌무지를 쌓아 성황당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성항당의 돌을 이용하여 외부세력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냈다고 한다.
<성황당돌무지>
계명산 끝자락에는 잘 정비된 이직(李稷, 1362∼1431)의 묘역이 있다. 이직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헌했으며,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4등)이 되었다. 주자소를 설치하여 동활자 계미자를 만들었다. 성산부원군으로 진봉되었고 세종 때 영의정과좌의정을 지냈다. 대표적인 시로는 <오로시(烏鷺詩)>가 있으며 문집으로는 <형재시집(亨齋詩集)>이 있다.
<이직 묘역>
<오로시(烏鷺詩)>
가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형재 이직(亨齋 李稷)-
<오로시비>
2. 오선누리길(안장고개∼오금상촌공원, 고양누리길13코스 5.7㎞)
이직묘역을 지나 선유동 입구인 안장고개에서 오선누리길 산길로 접어든다. 오선(梧仙)누리길은 고양시 선유동과 오금동을 연결하는 누리길이며, 길 이름은 오금과 선유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붙인 것으로 산과 마을, 하천, 공원, 논과 밭을 함께 볼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한적한 시골길이 펼쳐지고 산길을 올라 한북누리길과 연결된다.
<오선누리길 이정표>
산길을 빠져나오면 지금은 폐선이 된 교외선 철길을 지나면 공릉천(恭陵川)이다. 양주시 챌봉(516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공릉천은 고양시 오금동과 선유동 사이를 흘러 파주시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제1지천이다. 공릉천은 파주에 이는 조선 8대 임금 예종(睿宗)의 원비인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1461)의 무덤인 공릉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장순왕후는 한명회(韓明澮)의 딸로 1461년(세조7) 12월 5일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1472년(성종3) 왕후로 추존되었다.
<공릉천>
공릉천을 가로지르는 신선유교에서 바라보이는 북한산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북한산은 산의 최고봉인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국망봉)의 높은 세 봉우리가 높이 서있어서 삼각산으로도 불린다. 세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백운대는 해발 836.5m로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서 전망이 무한히 넓고 한양(서울)의 진산이다.
<북한산(삼각산)>
공릉천을 건너 등나무터널을 빠져나와 고양시 아쿠아스튜디오를 지나친다. 이곳은 수상, 수중, 특수촬영 전문 스튜디오이다. 20여년 방치되어 왔던 폐정수장을 리모델링하여 특수촬영이 가능한 수조형스튜디오로 탈바꿈시킨 성공적인 도시재생사례로 손꼽힌다. 영화<명랑>의 바다회오리 장면, <국제시장>의 흥남부두 철수 장면과 최근에 개봉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감독의 <기생충>의 반 지하 집 동네 장면이 이곳 세트장에서 촬영되었다.
<신선유다리>
<등나무터널>
<고양아쿠아스튜디오>
다시 산길로 접어들어 성황당고개를 넘는다. 이 고개는 오금동 당곳말과 큰골 사이에 위치하며 성황당이 있어서 ‘당곳(재)말 성황당고개’라 부른다. 고개가 낮고 지름길 역할을 하여 오금동마을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당곳말 고개’는 산길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을 따서 붙였다.
<당고(재)말 성황당고개>
고개를 넘어 오금동 산자락에는 조선 전기의 명필가이며 문신인 박아무게의 묘 및 신도비가 있다. 안내문에는 상당한 반상의 반열에 있었으며, 석물 등 묘역을 정비해 놓은 것으로 보아 제법 있는 집안으로 보이는데 묘단 위의 봉분 하나가 풀 한포기 없는 적분이다. 아마 좋은 날 잡아 더 좋은 봉분을 만들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약간 흉물스럽다. 신도비의 비문은 이제신(李濟臣)이 지었고 석봉 한호(石峯 韓護)가 글씨를 썼으며 남응운(南應雲)이 전자(篆字)하였다.
<박아무게 묘역>
바로 밑에는 조선 제2대 임금 정종대왕의 빈궁인 숙의(淑儀) 해평윤씨(海平尹氏) 묘가 있다. 숙의 윤씨(1368∼1417)는 정종의 여섯 번째 후궁으로 4명의 왕자와 2명의 옹주를 낳았다. 묘는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딸 인천옹주(仁川翁主)의 묘 바로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봉분이 퇴락하고 묘비도 밑 부분의 좌대석만 남아 있던 것을 후손들이 봉분을 다시 쌓고 위토를 마련하여 묘역을 재정비하였는데, 지금도 공사 중이다.
<숙의 해평윤씨 묘도비>
숙의 윤씨 묘역을 나와 실개천 주변으로 조성된 오금상촌공원에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고 산막골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철 3호선 지축역으로 이동한다. 지축역(紙杻驛)은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에 있는 일산선과 서울 지하철 3호선의 지하철역이자, 서울 지하철 3호선의 기점이다. 따라서 지축역은 두 개의 역사(驛舍)가 있다. 동부역사는 서울메트로의 서울지하철 3호선 역이며, 서부역사는 코레일에서 운영하는 일산선 역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한 지붕 두 가족이 운영하지만 운영주체는 서울메트로다.
<지축역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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