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두 번째-1)

와야 정유순 2019. 3. 29. 10:44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두 번째-1)

(정선 임계-정선읍, 201932324)

瓦也 정유순

   전국적으로 흐리고 강원도 산골에서는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와는 아주 다르게 모처럼 맑고 쌀쌀한 날씨로 아침을 맞이하며 정선군 임계면 용산리에서 오늘의 첫 장도를 내딛는다. 서쪽의 우릉산은 붓 끝 같이 뾰족한 필봉(筆峰)을 자랑하고 재 넘어 너른 들판이 펼쳐지는 월탄(月灘)마을은 아침햇살에 평화롭다. 마을 모형이 반달형으로 되어 있어 월탄이지만 남으로 흐르는 골지천이 밤 새 달빛을 받은 여울이 굽이치는 맑은 물은 더 아름답다. 그리고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려졌던 어제는 이미 옛날이로다.

<우릉산>

<월탄마을>


   여울 건너면 임계면 낙천리다. 낙천리(樂川里)는 단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골지천이 휘감아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설내, 광산골, 탑거리, 버당말 등이 있다. 설내마을은 뒷산이 석회암 지대로 자연동굴에서 용출되는 석천수(石泉水)로 수만 평 논에 관개수(灌漑水)로 이용되는 귀중한 물이 나오는 곳이라 마을이름이 혈천(穴川)’으로도 부르며 환경농업보전마을로 지정된 곳이다. 광산골에는 지금도 금·은을 제련하던 제련장이 남아 있으며, 그 당시 우리나라 제2의 금광으로 지금도 매장량이 많이 있다고 한다.

<혈천마을>


   멀리 하천의 퇴적물이 쌓여 섬이 된 하중도(河中島)에 형성된 미락숲을 바라보며 임계천이 흐르는 암내교를 건너 봉산리로 넘어간다. 봉산리는 임계면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태곳적에는 황무지로 잡초만 무성하고 특히 쑥이 많아 봉산(蓬山)’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암내교(岩內橋)는 암내마을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암내는 주변 산세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임계천이 골지천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순 우리말로는 바암니[암내동(岩內洞)]’라고 부른다.

<암내교>


   어떤 형체도 만들지 않고 여울소리만 만들며 낮은 곳으로 흐르는 골지천을 따라 말없이 걷다보니 가랭이교가 나온다. ‘암내가랭이같은 신체에 가까운 용어들이 시선을 끈다. 가랭이마을은 산 밑 강변에 위치한 마을로 절경이 아름다우며 양지바른 곳으로 가양(佳陽)’으로 부르다가 사투리의 시대흐름에 따라 가랭이로 변하였다고 전한다. 이웃에는 가랭이산(547)도 있다. 용어야 어쩌든 눈에 보이는 것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지만 저 아름다운 물 흐름소리를 사진에 담을 수 없어 무척 아쉽다.

<가랭이교>

<골지천>


   가끔 도로를 질주하며 내달리는 자동차들이 걸으며 아름다움을 상상하는 도몽(徒夢)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골이 깊은 준령(峻嶺)사이로 문전옥토(門前沃土)가 펼쳐져 귀한 보석같이 다가온다. 그러나 산골은 역시 골짜기로 굽이굽이 흐르는 맑은 물과 숲이 어우러지는 자연의 조화는 길을 걷는 나그네의 참 벗이다. 먼 산 바라보며 지나온 족적도 생각하고, 저 흐르는 물에 띄워 놓은 마음의 종이배에 사랑을 듬뿍 실어 보낸다.

<산과 강>


   검룡소에서 솟은 물은 자연과 희롱하며 흘러오다가 이곳 봉산리에서 구미정이란 정자와 처음으로 조우한다. 구미정(九美亭)은 말 그대로 아홉 가지의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한 곳으로 조선 숙종(肅宗)  문신인 수고당 이자(守孤堂 李玆+, 16521737)가 당파싸움에 실망하여 1689(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관직을 사직하고 정선에 내려와 은거하던 중 지은 것이며, 인재양성과 시회(詩會)와 강론(講論)을 하던 곳이다. 현판에는 9가지 풍치를 다시 세분한 구미정 18경이 적혀 있다.

<구미정>

<구미정 앞>


   9가지 풍치란, 개울에서 물고기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비상할 때 물 위에 삿갓(통발)을 놓아 잡는 물막이인 어량(漁梁), 밭두둑(전원경치)을 뜻하는 전주(田疇), 하천 안에 있는 넓고 편편한 큰 바위섬인 반서(盤嶼), 층층으로 이루어진 절벽인 층대(層臺), 정자 뒤편 반석 위에 생긴 작은 연못인 석지(石池), 넓고 큰 바위인 평암(平岩), 정자에 등불을 밝혀 연못에 비치는 경치인 등담(燈潭), 정자 앞 석벽 사이에 있는 쉼터의 경치인 취벽(翠壁), 주변 암벽에 줄지어 있는 듯이 뚫려 있는 바위구멍의 아름다움이라는 열수(列峀).

<九美十八景>

<九美 중의 반서(盤嶼)>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빨랫줄을 걸어도 된다는 말이 전해지는 두메산골의 9가지 풍치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 사을기마을이다. 사을기(寺乙基)마을은 낙천2리에 속한 마을로 뒤로는 단봉산을, 앞으로는 구미십팔경(九美十八景)을 자랑하는 구미정(九美亭)이 위치하며, 단봉산 중턱에 있던 사찰의 숲에 새가 많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강변이 아름다워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쉬러 오고가는 곳이기도 하다.

<사을기마을 표지석>

<사을기 앞 골지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나라시절 중국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왕소군(王昭君)이 흉노 땅으로 들어설 때 그녀가 읊은 오언절구다. 춘삼월 하순의 맑은 하늘이지만 맨손으로 걷기에는 손이 시리다. 골지천 응달진 절벽에는 얼음이 봄을 시샘하려는 듯 겨울이 봄을 꽉 부여잡는다. 그러나 오라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찾아오는 계절을 어찌하랴! 이미 물기 오른 산에는 나무들이 더 푸르고 청아하게 흐르는 물소리는 더 맑은 것을

<봄의 빙벽>


   장갑을 끼었다 벗었다 반복하며 반천리에 접어들어 첫 만남이 사랑나무 연리목(連理木)이다. 뿌리가 서로 다른 두 소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 한 몸이 된 것이다. 한 나무가 죽어도 다른 나무에서 영양을 공급하여 도와주는 연리목은 예로부터 귀하고 상서로운 것으로 여겼으며 남녀 간의 사랑, 자녀의 지극효성, 친구와의 돈독한 우정을 상징하며, 이 나무에 소원을 빌면 세상의 모든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연리목>


   반천리(盤川里)를 둘러 싼 산세는 자연이 만들어 준 성채(城砦)이며, 큰 그릇 안에서 쉬어가는 내다. 수수만년 흐르던 물길도 이곳에서는 안식(安息)을 취한다. 세차게 몰아치던 세월의 바람도 여기에 다다르면 세상의 온갖 풍상 다 내려놓고 푹 쉴 것만 같다. 깎아지른 단애(斷崖)의 위는 하늘이고 그 아래 물이 흐르는 땅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이곳이 바로 반천리 어전(於田)마을이다. 이 마을은 돌배나무가 많아 이대곡(梨大谷)이었는데 왜정 때 어전으로 왜곡되었다. 정선군에서는 이 마을을 돌배체험마을로 조성하고 있다.

<단애(斷崖)>

<어전마을>


   어전마을 이웃에는 도장동 느릅나무 숲과 성황당이 있다. 도장동(道長洞)은 마을 형태는 평평한 들판이 아니고 산기슭에 계곡과 길을 따라 깊게 이어져 있다는 의미다. 느릅나무는 낙엽활엽 교목으로 높이는 20m, 지름은 60cm이며,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작은 가지에 적갈색의 짧은 털이 있다. 한방에서는 껍질을 유피(楡皮)라는 천연항생약재로 쓰는데, 치습(治濕이뇨제·소종독(消腫毒) 등으로 사용한다. 목재는 건축재·가구재·선박재·세공재·땔감 등으로 쓰인다.

<느릅나무 숲>


   성황당(城隍堂)은 서낭신을 모시는 곳으로 서낭당으로도 불린다. 성황당은 서낭신의 봉안처인 동시에 거소가 되며, 이 신은 천신과 산신의 복합체로 보인다. 서낭신의 신앙에는 내세관 보다 현실적인 일상생활의 문제가 중심을 이룬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액()질병재해호환(虎患) 등을 막아주는 마을수호와 인간의 현실적인 생계문제 해결에 목적이 있다. 서낭당은 현실적인 문제를 기원하는 곳으로 정초에는 부인들이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가정의 평안을 빌기도 한다.


<도장동성황당>


   오후에는 느릅나무 숲 언덕에서 출발하여 구룡소를 바라보며 노일마을로 들어선다. 강물이 파래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단애의 절경이 빼어났으나 나뭇가지가 가려 사진으로는 잡을 수가 없다. 다만 눈으로 잡히는 푸른 강물은 능히 용이 승천하고도 남을 만한 공간이다. 훤히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라도 만들어 놓았으면 하는 욕심도 생긴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푸른 물은 용이 살고 있는 것 같고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如意珠)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구룡소>


   이곳에서 고개를 넘으면 노일마을이다. 노일(魯逸)마을은 반천리의 중심마을로 고양리로 가는 길목이며, 산천경계가 절경을 이룬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골지천은 선유(仙遊)에 으뜸가는 곳으로 옛 선비나 나그네들이 절경에 도취되어 어리석은 사람처럼 그날그날을 편안하고 한가롭게 보내던 어린 시절을 상기하게 하기 위하여 노일(魯逸)이라 칭한 것 같다.

<노일마을>


   노일마을을 지나 반천교를 건너 골지천을 따라가는데 북쪽 산마루에는 태양광발전시설이 흉물처럼 보인다. 해발 600가 넘는 산에 피복을 까고 태양집열판을 꼭 설치해야 했을까? 생태계를 파괴하면서까지 태양열발전을 구상한 사업자도 그렇고 이를 허가해 준 행정청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청정한 대체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해도 무수한 생명들이 터를 잡고 살아갔을 그 곳에 어떻게 저런 무식한 행위를 했을까? 돈 앞에는 생명의 존엄도 없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산 정상의 태양광발전소>

<반천리 산 153>


   하늘도 노했는지 맑은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눈발이 휘날린다. 아무래도 봄을 시샘하는 겨울의 마지막 발악 같다. 골지천 절벽의 바위도 노기(怒氣)를 머금는다. 처음의 눈보라는 하늘을 유영하더니 점차 서풍이 불어와 눈보라를 가슴에 안고 가는 게 여간 힘들다. 영상의 기온이라 땅바닥에는 눈이 쌓이지 않지만 산과 초목에는 춘설이 쌓인다. 겨우내 참았던 사랑이 기어이 참지 못하고 시샘의 분노가 되어 뺨을 세차게 어루만진다.

<골지천의 바위얼굴>


   임계면 반천리를 지나면 여량면 봉정리다. 정선군의 북쪽에 위치한 여량면(餘糧面)은 구한말 시대에 북면과 여량면이었던 것을, 여량면을 북면에 통합하고 면사무소를 북평에 두었다. 19154월에 리·동을 통합하여 9개리로 확정하고 면사무소를 남평리로 이전하였다가, 1932년에 현 면사무소를 여량리로 이전하였다. 그 후 200951일 단순한 방위표시로 지역의 특수성 표현이 부족했던 면 명칭을 북면에서 여량면으로 변경하였다.

<여량면 이정표>


   봉정리(鳳停里)1989년 임계면 관할에서 여량면으로 편입되었다. 옛날에는 옛골이라고도 불렀으며 황새가 즐겨 찾는 정자나무가 군락을 이뤄 봉정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1895(고종32)에 정선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지경리와 여촌을 통합하여 봉정리가 되었다. 동쪽으로는 임계면 반천리, 남쪽으로는 임계면 고양리, 북쪽은 고양리, 서쪽은 여량리, 남곡리와 접해 있고 골지천이 마을 앞을 흘려 여량리로 유입된다.

<눈 덮힌 봉정리>


   산을 세로로 금을 긋듯 위에서 아래로 한 줄기 월화(月花)폭포가 흰 눈과 함께 쏟아진다. 아무리 봐도 자연으로 형성된 폭포는 아니다. 산마루에서 쏟아질 물도 없거니와 어색하기 그지없다. 눈발을 맞으며 한 시간쯤 걸은 후에야 의심의 실마리가 잡힌다. 새치교를 건널 때 우측으로 정선소수력발전소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력발전을 위해 양수(揚水)하는 과정에서 물을 흘러 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월화폭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