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1코스(1)

와야 정유순 2019. 3. 25. 21:27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1코스(1)

(가회동성당명동성당, 2019321)

瓦也 정유순

   “주문 :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310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탄핵하는 당시 헌법재판소장의 목소리가 전국을 강타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20139월 서울순례길 선포 후 5년 만에 아시아 첫 교황순례지로 승인된 길을 따라 가기 위해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가회동성당으로 가는 첫 골목에 대통령을 탄핵했던 헌법재판소가 있다.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는 한 국가 내에서 최고의 실정법 규범인 헌법에 관한 분쟁이나 의의(疑義)를 사법적 절차에 따라 해결하는 특별재판소다.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 뒤뜰에는 수령 600년이 넘는 백송이 있다. 재동은 1453년 수양대군의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단종(端宗)을 보필하던 중신들을 참살하여 그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피비린내가 진동하여 마을 사람들이 집집마다 재를 긁어 나와 유혈낭자한 길바닥을 덮었다는 뜻에서 잿골, 齋洞(재동)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온다또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 홍영식(洪英植)의 노륙(孥戮)을 거쳐 대통령의 탄핵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던 역사의 산 증인이 바로 이 천연기념물(8)로 지정된 백송(白松)이다.

 

<재동 백송>

 

   오늘 첫 방문지는 1949년 설립된 가회동성당(嘉會洞聖堂)이다. 가회동(嘉會洞) 일대는 즐겁고 아름다운 모임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 성당이 위치한 북촌일대는 한국천주교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신부가 179545일 부활대축일에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곳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여 활동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완숙과 함께 순교한다. 2014년 주문모신부를 포함하여 이 무렵 순교한 최인길, 윤유일, 지황 강완숙 등 5명 모두 복자(福者)로 시복(諡福)되었다.

 

<가회동성당>

 

   이들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성당 1층에는 한국천주교회와 가회동성당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특기할 만한 일은 100여 년 동안 천주교를 탄압하던 조선왕실의 마지막 왕족인 의친왕 이강(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5째 아들)195589일 이 성당의 관할구역인 안국동 별궁에서 본당 박병윤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같은 해 814일에는 의친왕비 김숙도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가회동성당 본당>

 

   가회동성당 직전의 주민지원센터 앞에는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선생의 집터 표지가 있다. 의암은 구한말의 천도교(天道敎)지도자이자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다. 1897년에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되었으며,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분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은 3·1운동 거사 전날인 1919228일 다음날 독립선언식 절차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 모였던 곳이기도 하다.

 

<손병희선생 집터>

 

   가회동성당 옆에는 대종교(大倧敎) 중광(重光) 가 있다. 대종교는 반만년 전 단군이 세운 한민족의 고유 종교인 단군교를 이은 것인데 고려 원종(元宗) 때에 와서 단군교의 전통이 일시 끊겼던 것을 조선말 나철(羅喆)이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으로 대종교의 재건·중흥의 의미로 중광이라 했다고 한다. 일제는 1915101일 포교규칙을 시행하여 천주교, 불교, 기독교만 종교로 인정을 하게 되어 대종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들은 유사 종교 단체로 찍혀 수난의 시대를 맞이한다 

 

<대종교 중광 터>

 

   창덕궁길 좁은 찻길을 따라 들어가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구한말에 신학문을 통한 교육구국(敎育救國)과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취지에서 기호지방의 우국지사들에 의하여 1908년에 설립된 고려중앙학원(중앙중·고등학교) 교문에는 소용돌이 근·현대사의 애환을 담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비좁은 터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까치집을 머리에 이고 하늘로 솟는다.

 

<중앙고 교문>

 

<중앙고 교문 은행나무>

 

   이 학교 교문 앞길을 따라 내려오면 석정보름우물이 있다.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에는 우물이 주된 생명수의 공급원이었다. 이 우물은 북촌 석정골주민들의 음수(飮水)원으로 보름동안은 맑고 보름동안은 흐려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79412월 외국인 최초의 선교사였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이 동네 신도 역관(譯官) 최인길(마티아)집과 여신도 회장이었던 순교자 강완숙(골롬바)의 집에 숨어 성사집행을 하며 선교활동을 벌일 당시 이 우물에서 길어낸 물로 영세를 주고 마시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석정보름우물>

 

   계동(桂洞)에는 경우궁 터가 있다. 경우궁(景祐宮)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 17701822)의 신위가 1824년부터 모셔졌던 사당이다. 정조의 유일한 후손 11녀는 수빈박씨와의 소생이며, 자기가 낳은 아들이 왕이 되어 왕의 생모로 대접을 받은 유일한 후궁이다. 또한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이 고종을 이곳으로 오게 하고, 수구파 대신들을 제거하여 혁신 내각을 구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경우궁은 1886년 지금의 옥인동 자수궁터로 옮겼다가 1908(융희2) 육상궁(칠궁)에 합쳐졌다.

 

<경우궁 터>

 

   계동길을 빠져나와 현대사옥을 막 돌아서는 화단 구석에는 나무에 가려진 제생원 터(濟生院 址)’라는 표지석이 있다. 제생원은 조선 초의 서민의료기관으로 극빈자의 치료와 미아의 보호를 맡았으나 세조 때 혜민서(惠民署)에 병합되었다. 조선말에는 이곳에 계동궁(桂洞宮)이 들어섰다. 계동궁은 흥선대원군의 조카이자 고종의 사촌 형인 이재원(李載元. 18311891)이 살던 집이다. 갑신정변 때 고종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강요로 경우궁에서 계동궁으로 거처를 잠시 이동하기도 하였다.

 

<제생원(계동궁) 터에 자리잡은 현대계동사옥>

 

   창덕궁 돈화문 앞 건너에는 서울돈화문국악당이 있다. 창덕궁의 얼굴인 돈화문의 이름을 딴 이 국악당은 전통문화 지역인 창덕궁 일대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창덕궁 맞은편 주유소 부지를 서울시가 매입하여 국악전문 공연장으로 조성하였으며, 현재 세종문화회관이 위탁 운영하고 있다. 전통 한옥과 현대 건축 양식이 혼합된 공연장은 자연음향으로 국악을 감상할 수 있는 실내 공연장과 야외공연을 위한 국악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어 관객들이 연주자와 함께 호흡하며 우리 전통의 멋을 쉽게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서울돈화문국악당>

 

   율곡로를 따라 창경궁으로 이동하는데 창경궁과 종묘사이에는 자동차가 왕래할 수 있는 율곡로(栗谷路)가 있다. 이 도로는 현재 도로구조 개선사업 공사 중으로 복도 같은 길을 따라 걸어간다. 이이(李珥)의 호를 따서 명명된 율곡로는 1931년 일제강점기 때 당시 서로 맞붙어 있던 창경궁과 종묘의 담장을 허물어 버리고 그 자리에 건설한 도로다. 풍수지리상 북한산의 주맥이 창경궁에서 종묘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이 정기를 끊어 민족혼을 말살시키기 위해 일제(日帝)가 도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율곡로 인도>

 

   순례길에 잠시 짬을 내어 둘러본 창경궁(昌慶宮)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었다. 1483년에는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궁궐을 크게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하나의 생활공간으로 정원과 후원도 공동으로 이용하였으며, 두 궁을 합쳐서 동궐(東闕)로 불렀다. 궁궐은 남향이 원칙이지만, 창경궁의 중심부분만 왕실 동산인 함춘원(含春苑)과 낙산(駱山)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 명정전 배치도>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등 크고 작은 화재로 수난을 당하면서도 궁궐의 위상을 지켜왔으나 1907년 순종 즉위년에 일제는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1909(융희3)에 개원하였다. 그리고 내친김에 1911년에는 궁궐의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어 궁궐이 갖는 왕권과 왕실의 상징성을 격하시켰다. 또한 중궁전인 통명전 북쪽 언덕, 즉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이 있던 터에 일본풍의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해방 후에는 1970년대까지 일반인에게 개방된 유원지로 이용되었다.

 

<창경궁 춘당지>

 

<창경궁 백송>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는 공사는 1984년부터 시작되었다. 창경원에 있던 동물원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겼고, 일제가 고의적으로 심어놓았던 벚나무도 뽑아내었다. 1986년에는 명정전 회랑과 문정전 등 일부 전각을 복원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시대 왕실의 도서를 관리하던 장서각의 이름으로 남아 있던 자경전 터의 박물관은 그 기능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넘겨준 뒤 1992년 헐리고 지금은 녹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창덕궁에 속한 부용지 일대까지 아우르던 후원 영역에는 일제 때 세워진 식물원이 남아 있다.

 

<창경궁 후원의 주목>

 

   영춘헌과 집복헌 왼쪽 너럭바위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창덕궁 후문 쪽으로 조성된 화단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11과의 한국 특산식물 미선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아 미선나무로 불리는 관목이다. 1919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후 유럽과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금은 여러 나라에서 훌륭한 조경수로 귀한 대접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나무이다. 미선나무의 종류는 흰색 꽃이 피는 것이 기본종이지만, 분홍색 꽃이 피는 것 등 여러 종이 있으며,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되어 있다.

 

<영춘헌과 집복헌>

 

<분홍미선나무 꽃>

 

   창경궁 후원에는 성종태실비(成宗胎室碑)가 있다. 이 태실비는 경기도 광주시 경안면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왕실의 태 54위를 서삼릉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는 성종의 태실을 연구목적으로 창경궁에 이전하였다고 한다. 성종태실은 태항아리를 묻은 석종(石鐘)형 부도처럼 생긴 태실과 이력을 적은 비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주위를 둘러 싼 난간 석이 있다. 태를 보관하던 태항아리는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성종태실비>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오른쪽에 있는 월근문이 있다. 이 문은 1779(정조3)에 건립하였다. 정조는 초하룻날마다 이 문을 통해 경모궁(敬慕宮)을 참배한다는 뜻으로 월근문(月覲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경모궁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헌경왕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창경궁 맞은편 동산인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에 터가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정조가 이 문을 거쳐 한 달에 한 번씩 전배하러 다니며,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내 슬픔을 풀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홍화문>

 

 <월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