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1코스(2)
(가회동성당∼명동성당, 2019년 3월 21일)
瓦也 정유순
월근문에서 정조의 효성을 기리며 혜화동에 있는 ‘혜화동성당’으로 들어간다. 성당의 표상 같은 십자가 첨탑(尖塔)은 보이지 않고 전면 좌측으로 사각기둥 같은 건축물 위해 십자가가 있다. 전면 직사각형 화강암 석판 왼쪽에는 “나는 길이요 생명이로라… 요왕복음 14장 6절” 오른쪽에는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변치 아니하리라. 루가복음 21장 55절”이라고 쓰여 있다. 마침 주임신부께서 나오시길 레 왜 “요왕복음”이냐고 물었더니 “처음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올 때는 요한복음을 요왕복음으로 읽었다”고 알려 주신다.
<혜화동성당>
1960년에 완공된 혜화동성당 건물은 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근대 건축물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역사는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곳에는 1909년 독일 ‘성 오틸리엔베네딕도 수도회’회원들이 세운 수도원이 있었다. 1927년 수도원이 함경남도 덕원으로 옮겨가자 천주교 경성교구가 이 땅을 사들여 지금의 혜화동성당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건축물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이희태(李喜泰)교수의 설계로 성당 건축의 정형화된 틀을 깬 양식으로 종교사적·건축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다.
<혜화동성당 내부>
성당의 내부를 둘러보고 카톨릭대학교 교정을 들어가려 했으나, 수업 중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혜화문 건너편에 있는 한양도성 길로 접어들어 낙산공원으로 향한다. 혜화문(惠化門)은 1397년(태조5년)에 한양도성을 축성하면서 함께 세워졌다. 당시 북대문인 숙정문의 통행이 금지되면서 양주·포천 등 동북방면의 중요한 출입구였던 이 문을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14년)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東門)과 이름이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6년)에 혜화로 고쳤다고 한다.
<혜화문>
한양도성은 축성시기에 따른 형태로 1396년 1월과 8월 태조 때의 축성은 ‘산지는 석성,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고, 성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하였다. 1422년 1월 세종 때 도성을 재정비 할 때에는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성돌은 옥수수 알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하였다. 1704년 숙종 때부터는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례 걸쳐 성돌 크기를 가로·새로 40∼45㎝ 내외의 방형으로 규격화하여 성벽이 더 견고해졌다. 1800년 순종 때는 가로·새로 60㎝ 가량의 정방형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 올렸다.
<태조 때 축성 모양>
<세종 때 축성 모양>
<숙종 때 축성 모양>
<순종 때 축성 모양>
낙산(駱山)은 서울의 동쪽을 지키는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한다.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을 닮았다 하여 낙타산으로도 불리는데, 한양도성의 동쪽 산으로 서쪽의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에 대치되는 산이며 산 전체가 화강암이다. 한양도성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쪽은 전주작(前朱雀)인 목멱산(木覓山, 남산), 북쪽은 후현무(後玄武)인 백악산(白岳山, 북악산)을 포함하여 내사산(內四山)을 석성으로 연결한 도성이다.
<내사산 한양도성도-네이버캡쳐>
낙산에서는 북쪽으로 삼각산(북한산)과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길게 병풍을 이루고, 동쪽 멀리 용마산이 보이며, 남산 너머로 관악산이, 인왕산 멀리 덕양산 등이 한양을 방어하는 외사산(外四山)이다. 그리고 이 외사산을 연결한 길이 서울둘레길이다. 한양 도성 중앙 남북으로는 북한산의 정기가 종묘에서 남산까지 연결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세운상가가 자리 잡아 그 맥을 끊어 놓았다. 그리고 서울의 대학로와 마로니에공원이 바로 밑에 자리 잡는다.
<낙산에서 본 북한산 능선>
성곽을 따라 내려오면 끝자락에는 성곽공원(구 이대병원 터)이 자리하고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나온다. 흥인지문은 한양도성 8개 문 중 동쪽에 있는 문으로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른다. 1396년(태조5년) 도성을 지을 때 건립되었으나 1453년(단종원년)에 다시 고쳐지었고, 지금 있는 것은 1869년(고종6년)에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특히 바깥쪽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며,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동대문 성곽공원>
<흥인지문>
종로구 인의동에는 종로성당이 있다. 1955년 4월 10일 명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로 이계중 요한 신부가 부임하였다. 1944년 6월 12일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는 종로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사목과 성화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대지를 매입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본당 설립이 되지 않다가 1955년 임시 성전을 건축하여 본당으로 설립되었다. 1961년 10월 성전을 신축하여 완공하였다가 1987년 5월 성당을 다시 신축하여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종로성당>
좌포도청 순례지를 관할에 두고 있는 종로성당은 2013년 2월 당시 주임이던 홍근표신부의 건의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안드레이) 대주교로부터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 받아 포도청 순교 성인들을 본당 수호성인으로 승인 받았다. 이에 2013년 순교자성월, 포도청(옥터)순교자 현양관을 성당 내에 마련하여 순교자들의 신앙을 소개하고 지속적으로 미사를 봉헌하며, 포도청 순례지를 잇는 순례길을 안내하여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도록 힘쓰고 있다.
<현양관에 전시된 형틀>
종로성당 건너편 종묘광장공원에는 조선왕조의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1337∼1398)을 기리는 시비(詩碑)가 있다. 1995년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해 종묘 창엽문 바깥의 종묘공원 동쪽 끝에 세웠다. 시비에는 새로 건설된 수도 한양의 풍수지리적인 이점을 소개하고 한양에서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이 영위되기를 노래한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와 정도전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한양은 정도전의 구상으로 집 한 칸 한 칸 짓듯이 한양 전체를 완성했다.
<삼봉 정도전 시비>
종묘시민광장을 지나 종로3가역 부근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영화상영한 단성사라는 극장이 있고, 그 자리는 옛 좌포도청 자리다. 좌포도청에서는 서울의 동부·중부·남부 지역과 경기좌도 일대의 순라를 담당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좌포도청의 관할 구역인 경기좌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포도청은 죄인을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나, 주문무신부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문제에 직접 관여했다. 당시 포도청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참고로 우포도청은 지금의 광화문우체국 자리다.
<좌포도청 터 표지석>
포도청은 을묘박해의 계기가 된 북산사건(北山事件)으로 천주교문제에 직접 관여하게 되었으며, 천주교신자들이 가장 많이 순교한 곳이 좌·우포도청으로 순교의 터가 되었다. 1795년 을묘박해 때 좌포도청에서 첫 희생자가 탄생되었으며, 1866∼1880년 병인박해 때 마지막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북산사건은 1795년 북산(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신부의 거처가 밀고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일은 좌·우포도청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단성사 신축건물>
다시 청계천을 지나 서울 중구 장교동 1-5 거리에는 ‘조선광문회 터’표지석이 있다. 조선광문회는 1910년 육당 최남선이 설립한 단체로 신문화의 요람이자 나라를 잃은 지식인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곳이다. 육당은 이곳에서 ‘삼국사기’ ‘동국통감’ 등 많은 고전을 간행하고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청춘’ 등 잡지를 발행하였으며, 또한 1919년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파란 2층 목조의 조선광문회 건물은1969년 도로 확장으로 철거되었다. 최남선은 말년의 친일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조선광문회 터>
광통교를 지나 명동으로 향한다. ‘광교’로도 불리는 광통교(廣通橋)는 원래 토교(土橋)였는데, 큰 비로 유실되자 1410년(태종10)에 태조(이성계)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 옛 터의 병풍석 등 석물을 사용하여 석교로 만들었다. 국내에서 폭이 가장 넓었던 이 다리는 정월 대보름이면 답교(踏橋)놀이로 유명한 곳이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 시 모습을 감추었다. 이곳에는 서울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원형의 4분의 1로 축소하여 광통교 모형을 복원해 놓았다.
<광통교>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부근 외환은행 본점 부근에는 ‘나석주(羅錫疇)의사 의거 터’다. 나석주(1892∼1926)의사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 등을 거쳐 1924년까지 중국군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의열단 단원으로 독립투쟁을 하면서 1926년 12월 일제 경제적 착취의 대표기관인 동양척식회사에 투탄하고 일본경찰과 총격대치 하다가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2천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어라!”고 절규하며 자결한 곳이다.
<나석주의사 동상>
그림자가 길게 옆으로 뻗을 때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 명동성당에 도착한다. 명동성당(明洞聖堂)은 사적 제258호(1977년 11월)로 지정되었으며, 한국 가톨릭의 상징이며 총본산이다. 원래 이 터에는 판서(判書)를 지낸 참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바깥채만 60여 칸이 되는 대형주택을 1883년에 대지를 사들여 처음에는 그대로 이용하였다. 1892년(고종 29) 8월 정초식을 거행하였으나 청일전쟁 등으로 중단되었다가 위돌 박 신부에 의해 1898년 5월 축성식(祝聖式)이 거행, 완공되었다.
<명동성당>
성당 내부 정면 중앙 제대에는 성모 마리아가 모셔져 있고, 그 좌우의 작은 제대에는 예수 성심상과 분도 성인상이 있다. 왼쪽의 예수 성심상은 천주교 전파 초기에 온갖 박해와 시련을 이겨내며 이 땅에 복음을 전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고, 오른쪽의 분도 성인상은 성당 건립 때부터 성당 건축공사를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모신 것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다양한 모습의 사도들 초상과 79성인화가 장식돼 있으며, 지하성당과 지하묘소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명동성당 내부>
명동성당은 성당이 지닌 종교적·건축적 가치와 함께 우리 현대사가 요동치던 고비마다 지성과 양심의 보루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해온 시대사적 의미 또한 높은 곳이다. 지금도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명례방(明禮坊)에 속해 있었다. 명례방은 천주교가 유입된 이후 신도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곳일 뿐 아니라 이승훈이 세례를 주었던 곳이다. 또 1830년(순조30) 이후에는 선교사들의 비밀 선교활동의 중심지였으며, 1845년(헌종11)에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다.
<명동성당>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두 번째-2) (0) | 2019.03.29 |
---|---|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두 번째-1) (0) | 2019.03.29 |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1코스(1) (0) | 2019.03.25 |
강릉바우길-어명을 받은 소나무길 (0) | 2019.03.18 |
서울 궁산과 겸재미술관 (0) | 2019.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