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바우길-어명을 받은 소나무길
(2019년 3월 16일)
瓦也 정유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중국 한나라 시절 중국의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왕소군(王昭君)이 흉노 땅으로 들어설 때 그녀가 읊은 오언절구다. 따사한 봄 날씨가 반짝이다가 어제 진눈개비 흩날리며 꽃샘추위가 시샘하더니 오늘 ‘강릉바우길-어명을 받은 소나무길’ 가는 길목 영동고속도로 횡성휴게소는 경칩을 지나 춘분을 불과 6일 남겨 놓고 겨우내 참았던 하얀 사랑을 쏟아내어 춘설(春雪)이 되었다. 남쪽 섬진강변에는 매화가 만발한데, 백두대간 태백준령에는 설화(雪花)가 산하를 덮었도다.
<횡성휴게소의 설화>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을 터널과 하늘에 매달린 고가다리를 통해 단숨에 통과하여 도착한 곳은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보현사 들어가는 길목이다. 보현사(普賢寺)는 영동 지방에서 가장 오래 된 사찰이다. 경내에 남아 있는 낭원대사의 부도비를 비롯한 보물급 문화재와 150년 전에 중수됐다는 고색 짙은 대웅전이 있다지만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은 절을 피해 먼발치로 입구만 확인하고 계단을 따라 산으로 오른다. 좌측으로 선자령 풍력발전기와 흰 눈, 그리고 우측으로 강릉과 동해가 멀리 함께하는 멋진 산행이다.
<영동고속도로 고가>
<보현산과 보현사 입구>
<얼리 강릉시내와 동해>
대관령 동쪽 기슭에 자리한 보현산(普賢山, 975m) 자락을 잡고 올라가는 길은 소나무 중의 소나무인 금강소나무가 도열한다. 금강소나무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동해안 방향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역의 산 사면과 능선에 자라는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늘 푸른 바늘잎나무다. 줄기가 굽지 않고 곧게 자라 궁궐이나 도성의 재목으로 이용한다. 소나무와 기본적인 형태가 같으나 소나무에 비하여 줄기가 좀 더 붉고 마디가 길게 자란다. 송이(松栮)는 금강소나무 잔뿌리에서 자라는 버섯이다.
<금강소나무>
얼마나 산길을 따라 올라 갔을까? 눈 쌓인 임도가 나오고 길모퉁이에는 어명정(御命亭)이 나온다. 이 정자에 오르면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으며, 유리 밑으로 2007년 11월 29일 벌채되어 광화문복원에 사용 된 금강송의 그루터기가 보인다. 이곳 금강소나무는 광화문 복원을 위해 벌채를 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교지를 받은 후 산림청장과 문화재청장이 산신과 소나무에 위령제를 지낸 곳으로 역사적인 산림 문화와 자연을 후손들이 볼 수 있도록 어명정을 건립 하였으며, 주변에는 어린 묘목들을 심어 놓았다.
<어명정>
<어명정 바닥유리-네이버캡쳐>
<금강송 그루터기>
어명정에서 다시 산길을 따라 숨 가쁘게 오른다.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소나무는 봄소식에 기지개를 피다가 움츠러들었고, 산길을 따라 수북이 쌓였다. 봄 날씨에 녹는 눈으로 질퍽이는 산길을 걸을 때는 휴정 서산대사(休靜 西山大師)의 시가 떠오른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 갈 때는(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그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 마라(不須胡亂行, 불수호난행) 오늘 내가 남기는 발자취는(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라며 오도송(悟道頌)을 남기지 않았던가. 이는 후에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독립운동 정신이기도 했다.
<눈 덮힌 금강소나무>
<임도>
어렵게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진흙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옛날 지난 뉴스가 떠오른다. 광화문 보수용 금강송을 당시 대목장이 빼돌려 재판에서 벌금형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는데, 혹시 이곳에서 베어나간 금강소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수북하게 눈 쌓인 술잔바위는 바위 위에 술잔 같은 구멍이 패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나쁜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 이런 찰나에 곡차(穀茶)라도 한 잔 했으면 좋으련만 갈 길은 녹록치 않다.
<술잔바위>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임도삼거리로 나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까지 내려온다. 강원도기념물(제12호, 1971년)로 지정된 명주군왕릉은 명주군왕으로 책봉된 김주원(金周元)의 묘(墓)다.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6대손으로 785년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때마침 경주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 있다가 홍수로 알천(閼川)이 범람하여 건너올 수 없게 된 김주원 대신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그가 38대 원성왕(元聖王)이다.
<명주군왕릉>
이 일로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한 김주원은 명주(溟州, 강릉)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원성왕은 786년(원성왕 2)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봉하고 동해안 일대의 강릉·통천·양양·삼척·울진·평해 등을 식읍(食邑)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후 김주원은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었는데 강릉김씨의 효시이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원래의 묘는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 조선 명종때 강릉 부사와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손 김첨경에 의해 다시 복원된 것이다.
<능향전>
<명주군왕 비>
계단식으로 구성된 묘역에는 2기의 봉분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봉분에는 사각형으로 대리석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모서리를 석조 건물의 기둥처럼 처리하였다. 그 앞에는 ‘溟州郡王金周元之墓(명주군왕김주원지묘)’라고 세긴 비석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그의 공적과 생애를 기록한 신도비(神道碑)가 따로 서 있다. 비석 앞에는 상석(床石)과 향로석을 놓고 그 아래로 좌우 한 쌍인 망주석, 동자석, 문인석 등이 각각 세워져 있다. 매년 음력 4월 20일 강릉김씨 종중이 능향전(陵享殿)에 모여 명주군왕제를 올린다.
<재실-숭의재>
내홍살문을 지나 왕릉에서 정문 쪽으로 내려오면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을 모시는 숭의재(崇義齎)란 재실이 있고, 바로 옆에는 김주원의 5대조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위패를 모신 숭렬전(崇烈殿)이 자리하며, 1978년에 준공하였다. 그 아래에는 김주원의 23세손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 청간사(淸簡祠)다. 매월당은 생육신의 한 분으로 1769년에 종중에서 지은 목조건물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54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김춘추와 김시습은 이곳에서는 매년 춘분일에 제향을 모신다고 한다.
<숭렬전>
<청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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