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종로의 유적을 찾아서(4-0)
(혜화문∼동묘, 2019년 3월 8일)
瓦也 정유순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에서 내려 혜화문건너편으로 하여 낙산공원 방향으로 성곽 길을 따라간다. 동소문(東小門)으로도 불리는 혜화문(惠化門)은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5년)에 한양도성을 축성하면서 함께 세워졌다. 당시 북대문인 숙정문은 통행이 금지되면서 양주·포천 등 동북방면의 중요한 출입구였던 이 문을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14년)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東門)과 이름이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6년)에 혜화로 고쳤다고 한다.
<창경궁 홍화문>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다가 마지막으로 1684년(숙종10년)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보존되어 왔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홍예(虹霓)만 남겨두고 문루를 헐어 버렸는데, 일제는 돈암동까지 전찻길을 내면서 혜화문의 흔적까지 다 지워 버렸다. 그러다 1975년부터 한양도성 복구 작업이 시작되어 성곽이 완성되면서 1992년에 혜화문이 복원되었다.
<혜화문>
성곽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성벽마다 작은 하얀 점이 두 개씩 찍혀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성벽의 일부구간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성벽의 주저앉음과 기울기 등을 측정하는 점이란다. 주기적으로 두 점 사이의 간격을 측정하여 전에 측정한 값과 비교하여 성벽의 안전을 점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전에 것과 대비(對比)차이가 많이 나면 안전에 위험요소가 많다는 뜻 같다.
<한양도성 측정점>
그리고 한양도성에는 축성(築城) 당시 축성자의 출신지명이나 측성책임 관리와 석수(石手)의 이름을 새긴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있다.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세기)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세기), 축성책임자와 담당자의 실명을 새긴 것(18세기)으로 나누어진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발견되고 있다.
<각자석성(경산시작점)>
<각자석성(흥해시작점)>
그러나 성곽의 색깔이 크게 검은색과 흰색으로 나뉘어 보이는데, 아래는 검은색이고 위쪽은 성을 새로 쌓은 듯 흰색이다. 그리고 아랫부분은 대개 돌의 크기가 고르지 못한데 비해 윗부분은 벽돌을 틀에 찍어낸 것 같이 크기와 모양이 거의 같다. 그 이유는 아랫부분은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돌의 모양에 따라 축성시기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윗부분 흰색은 역사적 고증은 적당히 하면서 성과 위주로 빨리빨리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양도성 성곽>
축성시기에 따른 형태로 1396년 1월과 8월 태조 때의 축성은 ‘산지는 석성,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고, 성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하였다. 1422년 1월 세종 때 도성을 재정비 할 때에는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성돌은 옥수수 알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하였다. 1704년 숙종 때부터는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례 걸쳐 성돌 크기를 가로·새로 40∼45㎝ 내외의 방형으로 규격화하여 성벽이 더 견고해졌다. 1800년 순종 때는 가로·새로 60㎝ 가량의 정방형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 올렸다.
<태조 때 축성 모양>
<세종 때 축성 모양>
<숙종 때 축성 모양>
<순종 때 축성 모양>
낙산(駱山)은 서울의 동쪽을 지키는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한다고 한다.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을 닮았다 하여 낙타산으로도 불리는데, 한양도성의 동쪽 산으로 서쪽의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에 대치되는 산이며 산 전체가 화강암이다. 한양도성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쪽은 전주작(前朱雀)인 목멱산(木覓山, 남산), 북쪽은 후현무(後玄武)인 백악산(白岳山, 북악산)을 포함하여 내사산(內四山)을 석성으로 연결한 도성이다.
<내사산 한양도성도-네이버캡쳐>
북악산에서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하여 종묘와 연결되는 녹색지대(綠色地帶)가 보인다. 옛날에는 숲이 울창하여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으로 삼청, 인왕, 백운, 청학과 더불어 한양도성의 5대 명승지였으나, 지금은 주택과 아파트 등이 산중턱 위까지 들어서 옛 맛을 찾기 힘들다. 다만 산정에 남아 있는 성벽을 중심으로 서울시의 녹지 확충계획에 따라 낙산공원이 조성되어 역사의식의 함양과 함께 찾아오는 사람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낙산공원>
낙산에서는 북쪽으로 삼각산(북한산)과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길게 병풍을 이루고, 동쪽 멀리 용마산이 보이며, 남산 너머로 관악산이, 인왕산 멀리 덕양산 등이 한양을 방어하는 외사산(外四山)이다. 그리고 이 외사산을 연결한 길이 서울둘레길이다. 한양 도성 중앙 남북으로는 이 푸른 띠가 종묘에서 남산까지 연결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세운상가가 자리 잡아 그 맥을 끊어 놓았다. 그리고 서울의 대학로와 마로니에공원이 바로 밑에 자리 잡는다.
<낙산공원에서 본 삼각산(북한산)>
낙산공원 성 밖으로 조금 내려가면 비우당(庇雨堂)이란 초가삼간(草家三間)이 있다.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이 쓴 기록에 의하면 ‘외가 5대 할아버지며 청백리로 유명한 정승(政丞) 유관(柳寬)이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고 살았다는 초가삼간’이다. 원래 이곳은 ‘서봉정(棲鳳亭) 아래 백여 묘(畝)의 동원(東園)이 그윽하게 펼쳐져 있던 곳으로 흥인문 밖 낙봉(駱峯) 동쪽에 있다.’고 쓰여 있다. 묘(畝)는 전답의 면적단위로 6척(尺) 사방이 1보(步)이고, 100보가 1묘(畝)다.
<비우당>
비우당 뒤뜰에는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연이 깃든 샘으로, 정순왕후가 이곳에서 비단을 빨자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뺏기고 영월로 쫓겨난 단종이 영월의 관풍헌(觀風軒)에서 읊은 자규시(子規時)에서 “피 눈물 뿌린 봄 골짜기엔 떨어진 꽃잎이 붉네(血淚春谷 落花紅, 혈루춘곡 낙화홍)”라고 절규(絶叫)를 했는데, 그 원한이 핏빛으로 물들어 정순왕후에게 전해진 것이 아닌가? 이 샘으로 인해 그 일대는 자줏골, 자주동과 같이 자주색과 관련된 명칭이 많다.
<자주동천>
비우당 뒤로 조금 올라가면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삼각산청룡사(三角山靑龍寺)다. 이 절은 조계사 말사로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왕건의 부친인 왕륭(王隆, ?∼897)에게 고려 건국을 예언하며 향후 새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르기 위해서 3,800개의 비보사찰을 짓게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로 922년(고려 태조5)에 왕건의 명으로 창건되었으며,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능선에 있다고 하여 청룡사라 하였다. 1405년(조선 태종5)에는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위해 왕명으로 중창하였다고 한다.
<청룡사 일주문>
<청룡사 대웅전>
1457년(세조3) 영월에 유배 가던 날 단종과 정순왕후는 청룡사 우화루(雨花樓)에서 애끓는 이별을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자 정순왕후는 이 절 정업원에 머물며 매일 절 뒷산인 동망봉에 올라 영월 쪽을 보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대웅전 앞 우화루 옆 암문(暗門)으로 내려가면 정순왕후가 서인이 되어 머물던 정업원(淨業院) 옛터다. 1771년(영조47)에 영조는 이곳에 와서 ‘淨業院舊基(정업원구기)’라는 비석과 비각을 세우고 절 뒷산을 동망봉(東望峰)이라는 친필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청룡사 우화루>
<정업원구기비각>
영조는 ‘정업원구기’ 비각에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 앞산과 뒤 바위가 어찌 천만년을 가오리)’이라고 우에서 좌로 가로로 쓰여 있고, 좌측에 작은 세로글씨 두 줄로 ‘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신묘년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300년 이상의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사연은 영조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하고도 남았으리라.
<영조 어필>
청룡사를 나와 동망봉(東望峰)으로 오른다. 올라가는 숭인동 좁은 골목은 600여 년 전 정순왕후가 영월 땅을 바라보며 매일 조석으로 단종의 명복을 빌며 내 쉰 한숨보다 더 답답한 것 같다. 성북구 보문동6가와 종로구 숭인동에 걸쳐 있는 동망봉은 청룡사 동쪽에 솟은 산봉우리이다. 지금은 주민들의 체육공원으로 조성되었지만, 1771년(영조47)에 정업원구기비를 세우고, 이 봉우리 바위에 ‘동망봉(東望峰)’ 석자를 친필로 새겼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구 중앙청 건물석재로 채석을 하면서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망봉올라가는 골목>
<동망봉 정상>
동망봉 정상에는 산수유 꽃망울이 눈물을 머금듯 하늘거리고 정상 옆에는 동망각(東望閣)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성북구 보문동6가 209-192에 있었으나 ‘보문제3구역주택재개발사업’으로 철거되고 2017년 1월 지금의 자리(보문동6가 209-225)로 이전하였다. 현재 보문동지역 주민들은 매년 길일을 택하여 동망각에서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며, 마을주민들의 무사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고 한다.
<동망각>
그 밖에도 후대에 동망봉을 기리기 위해 동망정(東望亭)이란 팔각정을 지었고, 정순왕후가 궁에서 나와 흥인문 밖에서 궁핍한 생활을 할 때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부녀자만 드나들 수 있는 채소시장을 만들어 도왔다. 조선시대에는 남자들만 시장에 다니던 때라 이 시장을 ‘여인시장’이라 불렀으며, 일제강점기 때까지 열렸다고 한다.
<동망정>
정순왕후는 1440년(세종22)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에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15세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3년 뒤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짧은 궁궐생활을 끝내고 흥인문 밖에서 머물다가 1521년(중종16) 82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단종과 생이별한 후 정업원에서 지내면서 동망봉에 올라 단종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고, 조정에서 내어준 집과 식량까지도 거부하며 인근 백성들의 도움을 받아 염색일 등을 하며 청룡사 승방스님으로 눈물겨운 삶을 살았다.
<산수유 꽃망울>
동망봉에서 동묘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낙산묘각사(駱山妙覺寺)가 있다. 이 절도 정순왕후와 무슨 연관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 관련이 없다. 종로구 숭인동 낙산 기슭에 있는 묘각사는 대한불교관음종(大韓佛敎觀音宗)의 총 본산이다. 관음종은 1945년 김정운(金正雲)이 조직한 대승불교법화회가 계속해서 분열하는 과정에서 1965년 이홍선(李泓宣)이라는 사람이 독자적으로 종단을 구성하여 대한불교불입종으로 이어오다가 1988년에 대한불교관음종으로 변경하고 1989년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낙산 묘각사>
묘각사는 1942년 이홍선(1905∼1979)이 창건하였고, 대웅전에 해당하는 전각은 2층으로 1층은 원통보전(圓通寶殿), 2층은 대불보전(大佛寶殿)이다. 대불보전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원통보전에는 42관음상과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그 외 범종각과 요사채가 있으며 석조관음보살좌상과 산신각 및 대불아미타불 입상을 모시고 있으며, 문살의 꽃모양은 아름다움을 더한다. 또한 대중포교를 위해 서울불교대학과 낙가선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낙산 묘각사 전각>
<낙산 묘각사 꽃문양 문살>
<42관음상>
<아미타불 입상>
오늘의 발걸음은 소년왕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流配) 가던 발걸음과 권력에 의해 생이별을 해야 했던 정순왕후의 한이 서린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삼국지의 영웅 관우(關羽)를 모신 동묘(東廟)는 내부 공사 중으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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