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첫 번째-2)

와야 정유순 2019. 3. 5. 23:14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첫 번째-2)

(검룡소-정선 임계, 2019312)

瓦也 정유순

   광동댐 바로 밑은 삼척시 하장면사무소가 있는 광동리다. 삼척시 북서부에 위치한 하장면(下長面)은 본래 장성면(長省面)이라 하였는데 1738(영조14) ·하장성면(上下長省面)으로 나누었으며, 1842(헌종8) 하장면으로 통합되었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이어지는 정상부인 고원성(高原性) 산악지역을 차지하며, 남한강의 상류인 골지천이 중앙부를 관통하여 북서류(北西流)한다. 밭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주요 농산물은 감자·옥수수이나, 최근 고랭지채소 재배로 높은 소득을 올리며, 한우 사육과 양봉이 활발하다.

<하장면행정복지센터>


  하장면 광동리(廣洞里)의 명칭은 이 지역이 넓고 평지마을이라 하여 넓골이라 부르다가 이를 한자로 광동(廣洞)이라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 경종(景宗) 때 전진량(全眞良), 김한서(金漢瑞), 함상진(咸尙振) 등이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광동삼거리 우측에는 금옥첨원불망비(金玉僉員不忘碑)가 있다. 이 비는 1870(고종7)에 지역의 뜻 있는 인사들이 재물을 희사하여 백성들을 구휼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현재 비석은 1984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하장면 광동리>

<금옥각>


   골지천을 흐르는 물이 광동리를 지나면 골짜기를 따라 길게 뻗은 밭의 장전리(長田里)에 들어선다. 겨우내 얼었던 얼음도 살살 녹으며 봄기운을 더한다.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골지천 언덕 위에는 효자 전체준(全體俊)의 정려(旌閭)가 있다. 전체준은 10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으며,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하여 1903(광무7)에 칙명(勅命)교시로 정려문이 전교되어 1904(광무8) 3월에 정려각을 건립하였고, 19989월에 중건하였다. ‘효는 모든 행동의 근본’(孝百行之本)이라 했던가.

<골지천의 살얼음>

<효자려>


   옛날의 섶다리 대신 콘크리트 다리로 내를 건너 천변으로 가까이 가보지만 이어지는 길이 끊겨 금방 걷기에 불편한 도로로 올라온다. 도로확장으로 발생한 법면(法面)에는 옹벽(擁壁)을 만들어 해동에도 끄떡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정선 고한과 강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길 천변의 소나무도 봄을 기다린다. 장전리 뒷산의 나무들도 물기를 듬뿍 머금는다.

<골지천 콘크리트다리>

<골지천변 소나무>


   칡넝쿨이 무성하여 마을 이름이 갈전리(葛田里)라 불리는 곳에 들어서자 산비탈에 일군 밭만 구경하다가 한강에서 처음으로 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갈전리는 하장면의 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중봉리, 북쪽은 정선군, 서쪽은 토산리, 남쪽은 추동리에 각각 접하며 동서 6, 남북 10. 칠곡, 문왕곡, 방기, 귀수, 평지촌, 탄곡, 노전, 후곡 등의 자연마을이 합쳐진 법정리다. 서쪽에는 선당산, 동쪽에는 교암산 등의 수려한 산이 있다.

<갈전리의 논>


   갈전리에는 천연기념물(272, 1982)로 지정된 삼척갈전리당숲이 있다. 당숲에는 수령 400년 이상 된 느릅나무와 졸참나무, 엄나무, 전나무 등 기타 수목이 군락을 이룬다. 300여 년 전 갈전남씨 조상이 최초로 이곳에 정착한 후 마을 중앙에 100년 된 큰 느릅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전하나 주변 정황으로 보아 여기에서 자라던 것을 보호하여 온 것 같다. 갈전리 서낭제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에 이곳 당숲 느릅나무에서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고 제사를 지내는 민속행사로 치러진다.

<삼척갈전리 당숲>


   당숲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국도 제35호 도로를 따라 물 흐름이 많아진 골지천과 동행한다. 하천 안쪽으로도 제법 경지정리가 잘된 논들이 시야를 넓혀준다. 도로도 뱀처럼 구불구불 흐르는 사행성(蛇行性) 하천이라 도로도 같이 구불거린다. 멀리서 보면 산비탈에 연립건물처럼 보이는 것은 갈전피암터널이다. 즉 갈전리에 있는 낙석에 의한 사고를 막기 위해 콘크리트로 만들어 놓은 지붕[피암(避岩)]’것 같다. 터널 안으로는 차만 다니고 밖으로 사람만 다니게 되었는데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는지 통행에 불편하다.

<경지정리가 된 논>

<갈전 피암터널>


   갈전리를 지나면 하장면 토산리다. 토산리(兎山里)는 하장면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갈전리, 남쪽은 공전리, 서북쪽은 정선군에 각각 접한다. 동서 2, 남북 6이다. 평지촌, 동무지, 장강촌 등의 자연마을이 합쳐진 법정리로, 서쪽에는 망월봉(望月峯), 남쪽에는 감사산(監司山), 북쪽에는 기암산(旗岩山) 등이 각각 있다. 골지천은 마을을 지나 정선군으로 흐른다. 이 지역은 본래 토산(土山)이라 불리다가 서쪽의 작은 산봉우리 모양이 토끼를 닮았다 하여 옥토망월(玉兎望月), 즉 토산(兎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토산교>


   여울소리를 들으며 은치교를 건너면 정선군 임계면 문래리이다. 임계면(臨溪面)은 정선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이다. 원래 강릉군에 속하였다가 1906(광무10)에 정선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직현리(稷峴里임계리·송계리(松溪里낙천리(樂川里봉산리(蓬山里용산리(龍山里문래리(文來里덕암리(德岩里고양리(高陽里반천리(盤川里봉정리(鳳亭里)11개 동리가 속하였다. 그 중 낙천리는 미락리(美樂里)와 혈천리(穴川里)에서 한 글자씩 따와 만든 지명이다.

<은치교>


   문래리(文來里)의 원래 이름은 골지리(骨只里)였다. ‘골지리의 뜻은 뼈만 남았다는 의미가 담겨있고, ‘골치 아프다또는 꼴지라는 부정적 의미의 어감으로 주민들이 꺼려왔다. 따라서 정선군은 주민들의 자긍심과 역사성 회복을 위해 2009111일 주민투표 100%찬성으로 문래리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골지천은 이 골지리(骨只里)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원래 골지리는 고기원(高基員)과 문래리(文來里) 또는 고계리(高溪里)로 정선의 옛 지명에 나와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골지리가 되었다.

<문래1리 경로당>


   골지천을 이루는 원류부의 하나는 두타산 남쪽 댓재(竹峙)에서 발원한 번천(番川)이고, 다른 하나는 검룡소에서 발원한 물이다. 이 두 하천이 하장면 숙암리의 광동호에서 만나 다시 출발한 물은 고적대(高積臺, 1354 m)에서 발원한 하천을 삼척군 하장면 토산리에서 받아들여 정선군 임계면 문래리로 들어가게 된다. 골지천이 지도에 처음 표기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임계면 골지리가 문래리로 이름이 바뀐 것처럼 골지천도 역사와 문화가 스며있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꿔주는 것이 일제청산(日帝淸算)의 작은 시발점이 될 것 같다.

<문래리의 골지천>


  문래리에는 특이하게도 모자(母子)가 열녀와 효자가 되어 정려(旌閭)를 받은강릉김씨 열녀각과 정선 함재환 효자각이 나란히 있다. 효자각(孝子閣)함재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이다. 함재환은 가난한 가정에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로 형편이 어려워지자 어려서부터 강릉을 왕래하며 날품팔이 행상(行商)을 하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묘를 살피었다. 비각은 마을 주민들이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36년에 건립하였으며, 1991년에 보수하였다.

<효자각(좌)과 열녀각(우)>

<함재환효자정려비>


   열녀각(烈女閣)함병태의 부인 강릉최씨(江陵崔氏)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강릉최씨는 함병태의 부인이자 함재환의 어머니로, 시부모님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딸기를 구하려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결국 산속을 헤매다 탈진으로 쓰러지자 그 효심에 감동한 호랑이가 집까지 물어다 주었다고 한다. 1955년에 비각을 세웠으며, 1992년에 보수하였다.

<강릉최씨열녀정려비>


   지금까지 협곡(峽谷)을 빠져나온 하천은 시야가 다소 넓어진다. 하천의 폭이 넓어지고 너른 수중보가 보이기도 하며 제법 넓은 전답(田畓)을 거느린 들판도 보인다. 오늘 내내 도로만 걷다가 모처럼 하천 둑으로 걸어본다. 이미 봄은 소리 없이 발밑으로 다가와 따사롭게 속삭인다. 얼마를 걸었을까. 머리에 고랭지배추를 이고 서있는 장승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이 나무장승은 음지마을의 이정표였으나 마을표시는 떨어져 나갔으며 앞뒤로 양면(兩面)을 하고 있어 발길이 멈춰진다.

<음지마을 장승>


   또한 문래리 국도변에는 감자개량저장고가 눈에 들어온다. 정선군에서 해마다 임계면 감자축제8월에 열리며, 정선군을 전국적인 감자특산지로 부각시키고 감자의 다양한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 추진된 축제이다. 임계면체육회 주관으로 1997년부터 매년 8월 열린다고 한다. 감자 캐기, 감자 깎기, 감자 정량달기, 감자 많이 먹기, 감자요리대회 및 시식회 등 감자를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감자저장고>


   문래리를 지나면 용산리(龍山里). 옛날에 용소에서 용이 등천하였다고 해서 유래가 된 용산리는 골지천이 마을 중심을 굽이굽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달탄, 중구평, 위령이 등이 있다. 달탄은 마을 모양이 반달형으로 되어 있다하여 달탄 혹이 월탄이라 부른다. 중구평은 논으로 된 평지 들판과 밭으로 된 경사가 진 언덕 들판으로 마치 계단식처럼 형성되었는데 옛날에는 들판 중간의 언덕 기슭으로 지나다니게 되었으므로 들판 사이 길이란 의미란다.

<골지천과 용산리>


   멀리 임계면 용산리 산에서는 산봉우리의 피복을 짐승의 가죽을 벗긴 것처럼 속살을 내놓고 신음한다. 혹시 시멘트를 만들기 위해 석회석(石灰石)을 채취하기 위한 국토의 훼손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연(自然)은 수많은 사람들이 할퀴고 다녀도 아프다는 말이 없다. 그 긴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잔잔한 파장의 의미마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무덤 같이 조용한 고요함이 지닌 뜻도 모르고 있다. 다만 내 살가죽이 벗겨 나간 것처럼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피복이 벗겨진 산>

<용산리 산 160-1 지도>


   강을 따라 걷다보면 간혹 정면으로 큰 산이 앞을 가로 막는 경우가 있어서 흐르는 물이 어떻게 저 산을 비켜갈까? 하는 우문(愚問)이 머리를 스칠 때가 있다. 그러나 물은 아무 말 없이 실천으로 현답(賢答)한다. 앞을 가로 막는다고 절대로 성내지 아니하면서 스스로 길을 찾아 아래로 흘러간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自然觀)이다. 그래서 흐르는 물에 마음의 종이배를 띄워 천 삼백리 길 한강의 첫 여정을 함께했다.

<골지천과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