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울종로의 유적을 찾아서(3-0)

와야 정유순 2019. 2. 28. 01:59

서울종로의 유적을 찾아서(3-0)

(2019226)

瓦也 정유순

   오늘은 칠궁(七宮)을 가기 위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출발하여 통의동과 효자동을 경유하고 우당기념관을 잠시 둘러본다. 종로구 통의동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어 1962123일 천연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백송(白松)이 있었다. 키는 16이고 밑 둥의 둘레가 5로 땅 위에서 바로 6갈래로 갈라졌다. 1990 7월 폭풍으로 쓰러졌고 고사(枯死)하여 1993323일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되었다.

<서울 통의동 백송 터>


   당시 노태우대통령은 청와대 옆에서 나무가 죽는 것은 불길한 징조라 하여 서울특별시에 지시하여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보호했고, 경찰관으로 3교대 보초를 세웠지만 결국 고사되었으며 나무도 잘려 나갔다. 한편 이 지역 주민들도 백송회생을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여러 그루의 어린 백송을 심어 정성껏 가꾸고 있다.

<어린 백송>


   통의동(通義洞) 부근의 골목은 비좁다. 이곳에서 좁은 길을 건너면 창성동(昌成洞)이다. 좁은 골목의 담벼락은 치자(梔子)색으로 도색된 골목이 나고, 이 골목에는 문이 굳게 닫힌 한옥에는 성경루(聖境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성경루는 재단법인 세계정교유지재단이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로 무슨 종교 같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 간판 위에는 세스팔다스 게옴마루라는 국적불명의 용어도 보인다. 아마 담장의 치자색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궁금증만 더한다.

<성경루>

<치자빛 골목>


   칠궁 입장 예약시간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신교동에 있는 우당 이회영기념관에 잠시 둘러본다.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1932)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10대 손으로 영의정을 9명이나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집안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 18351906)과 동래정씨 와의 사이에서 7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세 형인 건영, 석영, 철영이 있고, 아래로는 동생인 시영과 여동생 2명이 있으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다섯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은 바로 밑의 동생이다.

<우당기념관>


   이회영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6형제와 함께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상하이에서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211월 상하이에서 만주로 가던 중 체포되어 고문으로 중국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우당 이회영 흉상>


   우당기념관(友堂記念館)은 이회영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98510월 우당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19909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에 우당기념관을 준공하였고, 2001615일 지금의 위치에 기념관을 신축 개관하여 이전하였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자취를 기념하는 전시관은 모두 6개 코너로 이루어져 있으나 1층에서 설명만 듣고 나와 궁정동 무궁화동산으로 향한다. 눈에 띠는 전시물 중 여섯 형제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망명 직전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인상적이다.

<우당 6형제의 결의>


   칠궁의 입장수속을 밟는 곳이 있는 궁정동의 무궁화동산은 옛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전가옥 터에 마련된 시민휴식공원이다. 본래 이곳은 청와대 구내로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이었으나 1993년 청와대 앞길이 개방된 뒤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태극무늬로 무궁화를 심었으며, 중앙에 궁정동을 상징하는 우물 정()자 분수대가 놓여 있다. 주변에 자연석으로 성곽을 만들고 240m의 산책로 주위에는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화단에는 전국 각지의 야생화를 비롯하여 무궁화와 소나무 등 수목 131,500여 그루를 심어 놓았다.

<무궁화동산>


   사전예약 후 신분증으로 개별신분을 확인한 다음에야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입장이 가능한 칠궁은 청와대 옆에 붙어 있어서 보안상 절차가 좀 까다롭다. 옛날 권위주의 정부시절에는 입장은 고사하고 주변에 접근이 불가능한 시절도 있었다. 1968121일에 발생한 소위 김신조사건이후에는 칠궁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경우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조차 칠궁이 어떤 곳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을 정도로 신비에 쌓인 비밀의 장소로만 알았다.

<칠궁 외삼문>

<칠궁 배치도>


   인왕산을 등지고 외삼문으로 들어선다. 칠궁(七宮)은 조선시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아들을 낳은 후궁 일곱 분의 신위를 모신 묘당(廟堂)이다. 원래 이곳에는 육상궁(毓祥宮)만 있었는데 1908(순종 융희 2)에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이 육상궁 경내에 합사(合祀)됨으로써 육궁(六宮)이 되었다가,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칠궁이 되었고, 조선시대 왕실사당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매년 10월 넷째 주 월요일에 칠궁제를 지낸다.

<칠궁 외삼문 안>


   처음 들어선 곳은 풍월헌(風月軒)과 송죽재(松竹齋)라는 현판이 동서로 나란히 걸린 재실(齋室)이다. 재실은 제례를 준비하는 건물이며, 연결채로 이어진 뒤편에는 삼락당(三樂堂)이 있다. 삼락당과 풍월헌은 1753(영조29)에 영조가 육상궁에 예를 올렸다는 기록들이 처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재실 마당에는 누구든 이곳에 오면 말에서 내려야 하는 하마대(下馬臺)가 설치되어 있다.

<재실-풍월헌, 송죽재>

<하마대>

   재실 동쪽으로 돌아 중문으로 들어서면 육상궁이 나온다. 육상궁은 영조의 어머니이자 숙종(肅宗)의 후궁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사당이다. 1725(영조1)에 경복궁 북쪽인 지금의 자리에 숙빈묘(淑嬪廟)를 세웠다. 1744(영조20)에 묘호를 올려 육상묘라 하였고, 1753(영조29)에 묘()를 궁()으로 승격하여 육상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육상궁은 1882(고종19)에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이듬해에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른다.

<육상묘 현판>

<육상궁과 연호궁 감실>


   연호궁(延祜宮)은 추존왕인 진종(眞宗:효장세자)의 어머니이며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사당이다. 효장세자(孝章世子)1725(영조2) 왕세자에 책봉되나 즉위하기 전 나이 10세에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진종으로 추존하면서 정빈이씨의 경복궁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사당을 연호궁이라 하였고, 1870(고종7)에 육상궁 건물 안에 합사되어 고부(姑婦)의 신위가 같이 있으며, 왼쪽이 육상궁이고, 오른쪽이 연호궁이다. 순화방은 경복궁 서북쪽에 있는 지금의 효자동·궁정동·창성동 일대다.

<연호궁-육상궁>


   육상궁의 서쪽 문을 열고나서면 냉천(冷天)이란 샘이 있고, 냉천정(冷泉亭)이 있다. 영조는 재위기간 중 200여 차례 넘게 육상궁을 찾았는데, 그 때마다 냉천정에 머물면서 이 우물 맛을 보며 감회를 우물 벽면에 오언시로 새겨 놓았다.

昔年靈隱中(석년영은중, 옛날에는 영은산에 있더니)

今日此亭內(금일차정내, 오늘에는 이 정자 안에 있다)

雙手弄淸漪(쌍수농청의, 두 손으로 맑은 물을 어루만지니)

冷泉自可愛(냉천자가애, 냉천이 절로 사랑스럽구나)

<時强圉協洽丙月上浣也(시강어협흡병월상완야, 정미17273월 상순에)>

御墨雲翰(어묵운한, 임금이 글을 새기다)

()는 때를 가리키며 강어(强圉)는 천간(天干)의 정()을 의미하고, 협흡(協洽)은 지지(地支)의 미()를 의미하기 때문에 정미년(丁未年)이고, 병월(丙月)3월을 의미하며 상완(上浣)은 상순(上旬)을 의미한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 영조 재위 3년째인 1727(정미년) 3월 상순에 이곳에 와서 우물을 마셨고, 물맛에 감탄하여 이시를 남겼다는 뜻이고, 영은(靈隱)은 중국 항주(杭州)에 있는 산으로 영은과 냉천은 소동파가 시를 읊었던 고사(故事)에서 따온 것 같다.

<냉천>


   냉천의 앞에 있다하여 이름이 된 냉천정(冷泉亭)은 영조가 어머니의 제삿날에 이곳에 와서 몸을 정갈하게 하여 제사를 준비하던 집으로 칠궁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1725년에 육상궁과 더불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2칸은 온돌방 동편 1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는 영조의 어진(御眞)이 모셔져 있었다. ‘냉천정의 현판 상단 좌우에는 어필(御筆)’이라고 새겨 있는 것으로 보아 임금이 직접 썼다는 표시다. 앞마당에는 냉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모아 만든 자연(紫淵)’이라고 새겨진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도 있다.

<냉천정>

<냉천정 현판>


   냉천정의 서쪽 문을 지나 깊숙이 들어가면 다섯 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있다. 좌측에 있는 저경궁(儲慶宮)은 추존왕인 원종(元宗)의 어머니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사당이다. 인빈은 선조의 후궁으로 인조(仁祖)의 아버지인 정원군을 낳았으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하였다. 1755(영조31)에 인빈의 신위를 원종의 옛집인 송현궁(松峴宮, 현 한국은행)으로 옮기고 저경궁으로 개칭하였다. 1870(고종7)에 수빈박씨의 사당인 경우궁 안 별궁으로 옮겨졌다가 1908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저경궁>


   중앙의 대빈궁(大嬪宮)은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사당이다. 궁녀로 들어와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희빈으로 강등되었으며, 1701(숙종51)에 사사(賜死)된 후 신위를 정동에 모셨다가 1722(경종2)에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면서 경행방(慶幸坊, 현 종로23가 부근)에 사당을 세웠다. 1870(고종7)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졌으나 1887(고종24)에 경행방으로 다시 갔다가 1908년에 돌아왔다. 대빈궁의 기둥은 다른 궁과 달리 원형(圓形)기둥을 사용했다.

<대빈궁>


   우측은 선희궁과 경우궁이 함께 있는 건물이다. 선희궁(宣禧宮)은 추존왕 장조(莊祖: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사당이다. 영조는 1764(영조40)에 영빈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사당을 의열묘(義烈廟)라 하였으며, 정조가 1788(정조12)에 묘호를 선희궁으로 고쳤다. 1870(고종7)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 왔다가 1897(고종34)에 순화방으로 원위치 했으며, 1908년에 다시 육상궁으로 돌아왔다.

<5궁의 감실>


   경우궁(景祐宮)은 순조(純祖)의 어머니이며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사당이다. 1822(순조22)에 수빈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창경궁 도총부 안에 신주를 모시고 현사궁(顯思宮)이라 하였고, 1824(순조24)에는 북부 양덕방(陽德坊: 桂洞 전 휘문고교 교정)에 별묘를 세워 경우궁이라 하였다. 1886(고종23)에 인왕동(玉仁洞)으로 옮겨지었다가 1908년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여기에 모신 후궁 중에 아들의 왕위에 오른 것을 직접 보았으며, 왕으로부터 효도를 받은 분은 수빈박씨 뿐이다.

<경우궁-선희궁>

 

   뒤돌아 나오면 바로 덕안궁(德安宮)이다. 덕안궁은 영친왕(英親王)의 어머니이며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엄씨(純獻貴妃嚴氏)의 사당이다. 순헌귀비는 1897(광무1)에 영친왕을 낳은 뒤 귀인으로 책봉되었고, 고종이 엄씨가 거처할 궁을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 안에 지어 경선궁(慶善宮)이라 하였다. 1900(광무4)에 순빈(淳嬪)에 봉해졌으며, 1910(융희4) 순헌귀비(純獻貴妃)로 진봉(進封)된다.

<덕안궁>


   순헌귀비엄씨(純獻貴妃嚴氏)8세에 입궐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된 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시중을 들다 총애를 받아 황후까지 오를 뻔 했으나 숙종이 장희빈 사건으로 영향을 받아 앞으로는 궁녀 중에서는 왕비를 할 수 없다는 어명으로 황후(계비)가 되지 못하고 황귀비가 된다. 양정의숙·진명여학교·명신여학교(현 숙명여중·)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 여성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11년 세상을 떠나자 경선궁을 덕안궁으로 개칭하였고, 1929년에 육상궁으로 옮겨 칠궁이 된다.

<백악(북악)산>


   덕안궁에서 삼문을 빠져나오면 1768(영조44)에 심어진 느티나무가 창공으로 높이 솟는다.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전통 가구재인 오동나무·먹감나무와 더불어 3대 우량목재로 꼽는다. 궁궐에서는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나란히 들어오는 것을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바깥쪽에 가깝게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칠궁의 느티나무>


   이곳에도 냉천정 앞에는 수복방(守僕房)이 있다. 이곳 수복방은 원래 육상궁에 딸린 시설이었으며, 1753(영조29)에 육상묘가 육상궁으로 승격되면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수복방은 조선시대에 종묘, 왕릉 등을 관리하거나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지내던 곳을 말한다. (((능침(陵寢(殿)에서 청소하는 일을 맡아본 사람을 고려시대 이래 상소(上所)라 하였다가 1438(세종20)<주례(周禮)>에 따라 수복(守僕)으로 변경하였다.

<수복방>


   항상 궁금했던 퍼즐을 풀고 들어갔던 문으로 되돌아 나와 출입증을 반납한 후 청와대 정문 앞으로 하여 경복궁역으로 회군한다. 지금은 청와대 앞을 개방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자유로워졌으며, 그 앞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이나 또는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농성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러한 모습들을 인왕산의 치마바위가 굽어본다. 치마바위는 인왕산의 넓고 평평하게 생긴 바위로 중종의 첫째 왕비였다가 쫓겨난 후 1739(영조 15)에 다시 왕후로 복위(復位)된 단경왕후신씨(端敬王后愼氏)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청와대 정문>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중종이 되자 그 부인 신씨(愼氏)는 친정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 때 피살되었는데 반정을 주도해온 공신들이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하며 반대하자 인왕산 아래옛 거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중종은 부인을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으며, 신씨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간절한 뜻을 보였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인왕산 치마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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