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첫 번째-1)

와야 정유순 2019. 3. 4. 18:31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첫 번째-1)

(검룡소-정선 임계, 2019312)

瓦也 정유순

   “그곳에 서있노라면 모든 세상의 욕심은 사라지고 숙연해 진다. 어떤 미움도, 내 마음의 오욕의 찌꺼기도 다 끄집어내어 깨끗하게 씻어 준다. 태초의 속삭임이 기쁜 눈물이 되어 가슴으로 스며든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마저 잠든 영혼을 일깨운다. 우리민족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정유순의 보석보다 더 귀한 물중에서> 가끔 검룡소에 올 때마다 읊어보는 나의 독백(獨白)이다. 

<검룡소>

 

   검룡소(儉龍沼)는 한강의 발원지이다. 태백시 창죽동(蒼竹洞) 금대봉 기슭에 있는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 물골의 물구녕 석간수와 예터굼에서 솟아나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이곳에서 다시 솟아난다. 물이 솟는 입구는 약2이며 깊이는 알 수 없다. 일 년 내내 9의 수온으로 하루 2,0003,000톤씩 석회암반을 뚫고 솟아 20의 폭포를 이루며 쏟아진다. ()의 이름은 물이 솟아나는 굴속에 용()이 살았다고 해서 검룡소로 붙여졌다. 일설에는 조선의 나라를 세운 국조(國祖) 단군왕검(檀君王儉)의 검()자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검룡소 표지석>


   폭포는 아주 오랜 옛날에 서해에서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고 싶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태백산 검룡소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느라고 생긴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으나, 석회석 암반 위를 흐르는 검용수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녹고 깎여 형성되었으며, 중간 중간의 소는 하천력(河川礫)에 의해 마모되어 페인 구멍이다. 이유야 어떻든 한반도의 문화를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온 한강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질 우리의 핏줄이다.

<검룡소 안내판의 용>


   검룡소는 1987년 국립지리원에 의해 최장 발원지로 공식 인정되었다. 이전에는 오대산(五臺山, 1563)에 있는 우통수(于筒水)를 한강의 발원지로 했었다. 그러나 검룡소가 발견되면서 다툼을 벌이다가 태백산과 오대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합쳐지는 강원도 정선군 나전(羅田)을 기점으로 실측한 결과 오대산 우통수까지는 62, 금대봉 검룡소까지는 94로 거리가 더 먼 검룡소가 한강의 발원지로 공식화하였다. 처음에 이 소를 발견한 사람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다가 지금은 용 속으로 사라졌다.

<검룡소의 첫 출발>


   검룡소에서 흘러내린 시냇물이 천 삼 백리(514) 긴 여정의 첫 내()를 이루는 곳이 골지천이다. 암반 위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면 2016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백산 검룡소분소가 나온다. 천년병화(千年兵火)가 들지 않는 영산(靈山) 태백산(太白山, 1567)198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오다가 승격되었다. 또한 백두산에서 뻗어 나온 백두대간의 줄기를 서쪽 소백산으로 방향을 틀어 지리산으로 연결해 주고, 남으로는 낙동정맥을 부산 몰운대까지 이어주는 분기점(分岐點)이다.

<태백산국립공원 검룡소 분소>


   봄부터 야생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태백줄기의 대덕산(大德山, 1307)은 언제나 포근한 어머니 가슴이다. 주차장을 지나면 암반이 없는 곳에서는 물은 땅속으로 숨어들어 흐르다가 다시 고개를 내민다. 검룡소 지역은 빗물에 잘 녹는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서 땅속에는 동굴이 잘 만들어진다. 이곳을 흐르는 냇물은 지하통로로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표면으로 고개를 들어 흘러가기도 한다. 검룡소의 솟아나는 물의 양은 엄청나지만 흘러 내려가면서 양이 줄어드는 것은 일부의 물이 지하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대덕산>


   이렇게 명맥을 유지하며 창죽마을공원을 지나 제35호 국도와 평행하는 삼수령(三水嶺, 920)에서 내려오는 다른 물줄기를 맞이하여 검룡수는 처음 합수를 한다. 삼수령은 태백시 적각동에 있는 한강·낙동강·오십천의 분수령이다. 이곳에 떨어지는 빗물이 북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동쪽으로 흘러 오십천으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가 붙여진 이름이다. 또 하나의 이름은 삼척지방 백성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理想鄕)으로 알려진 황지로 가기 위해 이곳을 넘었기 때문에 피해오는 고개라는 뜻으로 피재라고도 한다.

<골지천 상류>


  창죽동을 지나면 태백시 원동이다. 원동은 태백시 삼수동의 법정동이다. 원동의 큰터(大基)는 삼척에서 정선 지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고려시대에 관리들이 출장 중에 묶어가던 죽현원이라는 원()이 있어서 원동(院洞)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삼척군지역이었다가 1994 1226일 태백시로 편입되었다. 예전에는 금···석회석을 캐는 광산업이 성했던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고랭지채소와 산나물채취로 소득을 올린다. 원동의 어느 밭에서 정오(正午) 31100주년을 맞이하여 묵념과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본다.

<태백시 원동에서 '대한민국만세'>


   원동을 지나면 태백시 상사미동(上士美洞)이다. 골지천을 따라 도로를 걷다보면 좌측 산기슭에는 조성된 지 얼마 안 되는 자작나무군락지가 나오고 아치형 좁은 다리가 걸쳐있으며, 그 옆에는 권춘섭집앞버스정류장이 있다. 다리 아래로는 장마철 외에는 얼마든지 통행이 가능할 것 같아 선심성예산의 낭비가 아닌 가하는 생각도 해보며 다리 위도 올라가 본다. 마을이라고는 한 가구 주택만 보일 뿐 이용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자작나무 숲>


   그러나 이 정류장에는 가슴 찡한 사연이 있다. 원래 정류장 이름은 권상철집앞이었다. 농사를 짓던 권상철은 1999년 아내가 암으로 병원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거리가 먼 이웃정류장까지 걸어 왕복하는 아내를 보며 가슴 아파하다가 태백시에 건의하였고, 태백시는 주민과 버스회사를 설득하여 버스정류장을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딱히 대표할만한 건물이 없어서 권상철집앞으로 하였다. 그러던 중 부부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 권춘섭이 그 집에 남아 농사를 이어가자 명칭을 대물림하게 되었다고 한다.

<권춘섭집앞 버스정류장>


   아스팔트길만 걷다가 파릇파릇 봄기운이 물오른 보리밭을 거닐 때는 마음도 몸도 가뿐해진다. 봉오리가 곧 터질 듯한 버들강아지를 보며 봄노래라도 부를 가 했더니 앞산의 숲은 머리 깎는 기계로 다 파먹었다. 식목일 행사를 위해서 멀쩡한 나무들을 다 베어 버리고 그곳에 무엇을 심을 것인가? 아니 그 속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대를 이어 살아가던 뭇 생명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베어낸 나무들을 옆에 쌓아 놓았는데 홍수가 지면 물길을 막아버려 주변의 피해가 커질 것이 뻔한데

<보리밭>

<민둥산>


   다시 제35호 국도(백두대간로)로 접어들어 상사미1교를 건너면 치매안심치료를 전문으로 돌보는 태백시 사조보건진료소가 맞이한다. 상사미동과 하사미동은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와 경계를 이루는 덕항산(德項山, 1,071m) 자락의 고지대에 자리 잡은 마을로, 태백시 삼수동의 법정동이다. 허목(許穆)<척주지(陟州誌)>에는 현재의 하사미동과 상사미동을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옛날 이 지방에서 인삼을 공물로 상납하는 삼공(蔘貢)이 있다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후에 ()’사미(士美)’로 변형되었다.

<태백시 사조보건진료소>


   나뭇가지에 메달아 놓은 심밭골가는길이정표가 심마니들의 숨결을 이어주는 삼공(蔘貢)의 표시 같다. 고향 같은 평화스럽고 포근한 마을에는 사람의 훈김이 빠져나가 금방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은 빈집이 짠하다. 옛날 같으면 더없이 반가웠을 장승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맥이 풀린 듯 기운이 없어 보인다. 어린학생들이 재잘거리며 희망을 속삭이던 초등학교도 눈에 띄는 대로 폐교상태다. 이대로 시골은 젊음이 사라지고 고향도 묻히는 것일까?

<심밭골가는길>

<폐가>

<장승>


   딱딱한 포장길 언덕을 넘을 즈음 그래도 길옆에는 봄의 전령인 복수초가 환하게 맞이해 준다. 복수초는 우리나라 각처의 숲 속에서 자라는 다년생 초본이다. 생육환경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와 습기가 약간 있는 곳에서 자란다. 키는 1015이고, 꽃대가 올라와 꽃이 피면 꽃 뒤쪽으로 잎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꽃은 46이고 줄기 끝에 한 송이가 달리고 노란색이다. 열매는 67월경에 별사탕처럼 울퉁불퉁하게 달린다. 관상용으로 쓰이며, 뿌리(복수초근)를 포함한 전초는 약용으로 쓰인다고 한다.

<복수초>


   고개 너머에는 인심 많은 조탄마을이 기다린다. 조탄동(助呑洞)은 삼수동의 법정동으로 태백시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삼척시 하장면 숙암리와 경계를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골지천 상류부의 중봉산과 청옥산과 함백산 일대에 양질의 금강소나무가 많아서 1553(명종 8)에 경복궁에 화재가 났을 때나 1865(고종 2)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도 이곳의 소나무가 동량재(棟粱材)로 쓰였으며, 뗏목을 만들어 서울까지 운반할 때 이 골지천을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조탄마을 표지석>


   태백시계를 벗어나면 삼척시 하장면 숙암리다. 숙암리(宿岩里)는 하장면의 동부에 위치하며 산간마을이다. 서쪽에 높고 험준한 지각산(地角山, 904)이 위치하며, 태백시 검룡소로부터 흐르는 내는 번천(番川)과 합하여 광동댐으로 흘러 태백시 등에 용수를 공급한다. 지운, 평지촌 등 5개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옛날 마을 동쪽에 있는 바위 아래에 시장이 있었으므로 장바위라는 시암(市岩)이라 하였던 것이 속전되어 잘바위라는 숙암(宿岩)이 되었다고 한다. 강원도기념물 61호인 삼척숙암리고분군이 있으나 모르고 지나친다.

<숙암삼거리>


   1988년에 준공된 광동(廣洞)댐은 태백시·삼척시·정선군·영월군 등지에 생활용수·공업용수·하천유지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삼척시 하장면 광동리 일대의 골지천을 막아 건설한 댐으로 발전시설은 없다. 댐의 규모는 높이 39.5m, 길이 292m, 총저수량 1,313, 유역 면적 125이다. 광동댐은 남한강 최상류에 입지한 관계로 해마다 반복되는 가뭄과 기후변화로 댐 하류에 용수부족현상이 빈번하여 골지천 하류의 건천화 방지와 함께 광동호의 부영양화(富營養化)에 대비한 환경개선이 요구되는 곳이기도 하다.

<광동저수지>

<광동댐 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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