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종로의 유적을 찾아서(2-2)
(2019년 2월 8일)
瓦也 정유순
조계사 길 건너에 있는 농협 종로금융센터 건물은 ‘구 조선중앙일보’의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는 1931년 11월 27일에 창간된 민간신문으로 동아일보·조선일보와 함께 3대 일간지였다. 그러나 1936년 8월 13일자 신문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이 말썽이 되어 동아일보와 함께 9월 5일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재정악화와 허가기간 만료로 1937년 11월 5일 폐간되었다.
<구 조선중앙일보-현 농협 종로금융센터>
이곳의 바로 이웃에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있다. 이 전시관은 구 공평빌딩을 리모델링한 26층짜리 센트로폴리스 건물 지하에 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한양의 골목에서 조선을 보다’라는 부제가 붙은 전시관으로 지금까지 보았던 청진동 일대의 조선시대 흔적과 공평동 일대를 재개발하는 과정과 한양에서 근대 경성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골목길과 건물터를 온전하게 보존해 놓았다. 이 지역 유적 발굴시 전시관 조성과정과 당시 건축물 모형, 등을 각종 시청각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내부>
서울역사박물관의 별관으로 구성된 이 전시관은 주로 16∼17세기의 집터, 골목길, 생활유물 등 1,000여점의 전시물이 보존돼있는 공간이다. 투명 강화유리를 통해 옛 조선시대 건물터와 골목길을 살펴보며 관람을 할 수 있다. 또한 빌딩 건설과정에서 발굴당시 15세기 조선 초기 건물들과 도로부터 일제강점기 유물들까지 여러 시대동안 누적된 다양한 시대의 유물을 함께 만날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 가옥을 실제 크기로 재현하여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느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능성구씨 가옥과 이문>
<골목길 집터>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내부>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인사동 쪽으로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태화빌딩이 있다. 이 빌딩은 1910년 3·1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태화관(泰和館) 자리다. 태화관은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인 명월관의 별관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인 구수영(具壽永)이 살았고, 당시 이곳에는 태화정(太華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 김흥근(金興根)과 헌종(憲宗)의 후궁인 경빈(慶嬪) 김씨의 순화궁(順和宮)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이완용(李完用)의 소유로 넘어갔다.
<태화빌딩>
1918년 벼락이 떨어져 이 집에 있던 고목이 둘로 갈라져 넘어지자 이에 놀란 이완용이 팔려고 내놓은 것을 마침 화재로 없어진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安淳煥)이 인수해 명월관의 별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태화정이 있는 곳이라 하여 이름을 태화관(太華館)이라 하였다가 뒷날 태화관(泰和館)으로 고쳤다. 안순환은 궁내부주임관(奏任館)과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궁중에서 순종(純宗)의 요리를 담당하던 부제조(副提調)로, 궁중에서 나온 뒤 명월관을 설립하였다.
<삼일독립선언유적지-태화빌딩>
이후 2층 건물인 태화관은 크고 작은 방이 많아 서울의 부호와 조선총독부 관리 등 친일파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특히 3·1운동 때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무렵 민족대표들은 주인 안순환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미리 전화를 걸게 하여 이곳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축배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어 출동한 80여 명의 일본 경찰이 포위한 가운데 이종일(李鍾一)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한용운(韓龍雲)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나머지 민족대표들이 제창한 뒤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다.
<충정공 민영환 순국 터>
태화빌딩 주변에는 충정공 민영환이 순국한 집터(공평동 2)가 있고, 바로 옆의 하나로빌딩에는 ‘서울중심점 표지석’이 있다.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은 1896년 한양(서울)의 중심 지점을 나타내는 표지석이다. 표지석은 사각형의 화강암으로 가운데 돌이 한양의 중심을 나타내고 주위 4개 돌은 각각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 등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동서남북 내사산을 의미한다. 원래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5의 하나로빌딩 바깥 서쪽 화단에 놓여 있었으나, 현재는 하나로빌딩 1층 로비 안으로 옮겨 보존 관리하고 있다.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네이버 캡쳐>
종로 2가에 있는 서울YMCA는 고종의 하사금과 존 와나메커의 희사금과 국내 유지의 의연금으로 1907년에 기공하여 1908년에 처음 완공하였다. 민족운동체로서 창립초기 을사늑약의 반대, 고종양위의 반대, 2·8독립선언과 3·1독립만세운동의 근원지였고 물산장려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을 펼쳐 독립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하였다. 주춧돌에는 당시 황태자였던 영친왕(英親王)의 친필글씨인 一千九百七年(일천구백칠년)이 새겨져 있다.
<서울YMCA>
<영친왕 글씨>
서울YMCA를 거쳐 인사동 137에 있는 서울승동교회로 향한다. 승동교회(勝洞敎會)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소속교회로 189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무어(Moore, S. F)와 16명의 교인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 승동(공단골)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무어는 봉건사회의 잔재인 계급제도 타파에 관심을 가지고 전도사업에 노력한 결과 백정들이 많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어 한때 백정교회라고도 불렸다. 1905년 8월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항일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9년에 이 교회에서 설립된 조선신학교는 오늘날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이다.
<승동교회>
승동교회 언저리에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가 살았던 집터 표지석이 있다. 율곡은 아버지 이원수(李元壽)와 어머니 사임당신씨(師任堂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강릉에서 태어난 율곡은 친가인 파주군 율곡리에서 자랐으며, 8세에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한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금강산에 입산하여 중이 되기도 하였으나,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조15년(1582) 이조판서에 임명된 후 1584년 서울 대사동(大寺洞, 현 인사동)에서 49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이율곡선생이 살던 집터>
인사동 큰길을 건너 탑골공원 서문으로 들어서면 팔각정이다. 팔각정은 1902년(광무6) 이 공원에 지은 정자로 3·1운동 당시 33인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시민들과 학생들만 이곳에 모여 만세를 외쳤으며 학생 대표 정재용 열사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곳이다. 이 정자는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전통과 근대의 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沈宜碩, 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탑골공원 팔각정>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는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이다. 고려시대 흥복사가 있던 자리에 1465년(세조11)에 원각사라는 절이 세워졌으나 연산군 때 폐사되었고, 중종 때 건물이 모두 철거되면서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7년(고종34)에 총세무사로 와 있던 영국인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의 건의와 설계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1920년 파고다공원, 탑동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탑골공원>
공원 내에 유리창으로 갇혀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은 원각사가 준공되고 2년 후인 1467년(세조 13)에 완성했다. 지금은 10층 석탑이지만 사료에는 13층탑[窣覩婆(솔도파:스투파 stūpa)]을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층층이 아름다운 기와집을 모각하여 기둥, 난간, 공포, 지붕의 기와골까지 섬세하게 조각하였으며, 옥신에는 부처상과 보살상, 구름, 용, 사자, 모란, 연꽃 등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이는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인도에서 불법을 구해오는 과정이라고 한다.
<원각사십층석탑>
정문(남문) 쪽으로 나오다보면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가 있다. 이 비는 1471년(성종2)에 세조(世祖)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등 위에 연잎을 새긴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을 만들고 몸돌과 머릿돌[이수(螭首)]을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494㎝이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앞면은 김수온(金守溫)이 글을 짓고 성임(成任)이 글을 썼으며, 뒷면은 서거정(徐居正)이 글을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글을 썼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대원각사비>
정문 바로 뒤에는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년∼1922년)의 동상과 독립선언문 탑이 3·1운동의 현장을 증명해 준다. 의암은 한말 천도교(天道敎)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천도교 제3세 교주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며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의암 손병희 동상>
3·1독립선언문은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했다. 한용운이 독립운동에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으나, 이미 선언서의 초고가 완성되어 손질이 끝난 뒤였다. 지금 전하는 독립선언서 끝에 있는 공약 3장(公約三章)은 후에 한용운이 추가한 것이라고도 한다. 1,762자로 된 독립선언서에는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 독립의 전개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 세계에서 보기 드문 명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삼일독립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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