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석성산에서 할미산성까지
(2019년 1월 25일)
瓦也 정유순
영동고속도로 인천방향으로 양지터널을 지나 용인 쪽으로 가까워지면 무슨 성채(城砦) 같은 산이 턱 버틴다. 저 산을 어떻게 지날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이 자동차는 마성터널을 지난다. 그 마성터널을 북쪽 산자락에 품고 있는 산이 기흥구와 처인구에 걸쳐 있는 용인의 진산(鎭山)인 석성산(石城山, 471.3m)이다. 또한 산의 형상이 탑 꼭대기 보륜(寶輪) 위에 덮개모양을 하고 있는 보개(寶蓋)를 닮았다 하여 보개산(寶蓋山)이라고도 한다.
<석성산>
이 석성산을 가기 위해 지하철 분당선 기흥역에서 경전철 에버라인선을 타고 용인시청역에서 하차한다. 용인시청 뒤로하여 흙먼지 풀풀 날리는 산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겨울답지 않은 겨울이라 눈도 자주 안 오고 가뭄이 계속되는 것도 기후변화의 영향이 아닌지? 자연의 긴 침묵은 항상 두려움이 따른다. 용인(龍仁)은 1413년(조선 태종17)에 용구현(龍駒縣)과 처인현(處仁縣)이 합쳐지면서 용인현(龍仁縣)이라 처음 사용 하였다.
<용인시청역>
<용인시청>
‘생거진천사거용인(生居鎭川死居龍仁)’이란 말이 있다. 이 설화는 “주천석이라는 사주팔자가 똑 같은 사람이 용인과 진천에 살았는데, 저승사자의 실수로 진천의 주천석을 데려오자, 염라대왕은 다시 용인의 주천석을 데려오고 진천의 주천석을 대신 다시 돌려보내어 용인에서 부자로 잘 살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용인의 자연환경이 수려하고 풍수적으로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설화가 있지만 결론은 용인의 산자수명을 얘기한다. 그런데 진천은 인구가 갈수록 감소하고 용인은 갈수록 증가하는데 이는 무슨 연유인가?
<용인시가지>
옛날 사방(砂防)용으로 심었던 리기다소나무가 우점종을 차지하는 것도 기분은 영 그렇다. 이 숲을 따라 가면 ‘멱조현(메주고개)’이 나온다. 이 고개는 ‘가나한 부부가 콩 농사를 지어 메주를 만들 때 쇠파리 한 마리가 메주에 앉자 부인이 쇠파리를 잡으려고 나무주걱으로 내리쳤으나 피해 달아나자 메주는 엉망이 되었고, 달아난 쇠파리를 쫓아 자기도 모르게 맨발로 멱조현을 넘었다’고 하여 일명 ‘메주고개’라고 한다. 이 고개는 용인 삼가동에서 어정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옛날에는 이곳을 넘어야 수원에 갈 수 있었다.
<석성산 입구>
<멱조현(메주고개)>
몇 번인가 숨을 고르며 통화사 입구에 다다른다. 통화사 표지석을 따라 가는 길옆 담장의 곡선이 아름답다. 길 좌측으로 세 칸짜리 작은 건물이 나타나서 저것이 통화사인가 생각했는데, 용처불명의 건물이었으며 한 구비 돌아 아래로 가람이 자리한다. 산 정상을 향하기 때문에 통화사에는 들르지 못했지만, 이곳은 대웅전 대신 관세음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원통보전이 주 법당이다. 참고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신다.
<통화사 표지석>
<통화사 담장길>
<용처불명 건물>
<통화사>
통화사 뒤로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오르면 석성산 정상이다. 정상 바로 옆에는 석성산 봉수(烽燧)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삼남지방의 봉수가 안성 망이산 봉수에서 집결한 후 용인 건지산과 석성산, 성남의 천림산 봉수를 거쳐 한양의 목멱산(남산) 봉수로 이어지는 직봉에 해당하는 유적지다. 2017년 11월부터 2018년 5월까지 발굴조사 결과 방호벽과 연기와 불빛으로 위급상황을 알리는 연조, 비품과 보관하는 창고 건물 터 등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복원이 진행될 예정이다.
<석성산 정상 올라가는 길>
<보수 중인 봉수대>
석성산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이 확 트인다.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려 희미하게 보이지만 동쪽으로는 이천(利川)이요, 남쪽으로는 안성(安城)이고, 서쪽으로는 수원(水原)이며, 북쪽으로는 경기도 광주(廣州)가 손 뻗으면 닿을 것 같다. 자연이 만든 성채요 천혜의 요새(要塞)로다. 동으로는 영동고속도로가 길게 선을 그리고 북으로는 에버랜드 놀이시설이 보인다.
<석성산정상>
<영동고속도로>
천혜의 요새이지만 석성산은 석성이 있던 산이다. 석성(石城)의 축성연대는 475년으로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남하하면서 축성한 것으로 추측한다. 길이는 약2㎞며 자연석성은 성곽의 동문이 있었던 것으로 흔적이 남아있으며, 올라온 반대방향으로 급경사를 타고 내려오면 말 그대로 칼 능선으로 천혜의 성벽이다. 좌우로 숲이 우거져 감각으로 느끼기에는 좀 무디지만 나무들이 없었다면 아찔함이 더 컸을 것으로 느껴진다.
<석성산 정상부>
산자락을 내려와 마성IC가 보이는 곳에는 석성산과 할미산성으로 이어지는 아치형 보도교(步道橋)가 놓여있다. 이 다리는 1971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으로 단절되었던 한남정맥(漢南正脈)을 겨우 연결해 놓았다. 그러니까 사업비 48억을 투입해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581-7와 기흥구 동백동 산15-1 구간을 잇는 길이 168m 폭 3미터의 보도교량 공사를 2017년 1월에 착공하여 2018년 12월에 준공한 것이다. 이 다리의 이름은 ‘성산교’다.
<마성요금소>
<에버랜드 원경>
한남정맥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한 획으로 뻗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뻗어 나와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七長山)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뻗어 김포시의 문수산(文殊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이름이다. 이 정맥을 이루는 주요 산은 <산경표>에 구봉산(九峰山)·석륜산(石倫山)·석성산(石城山)·광교산(光敎山)·오봉산(五峰山)·수리산(修理山)·오자산(五子山)·소래산(蘇來山)·주안산(朱安山)·원적산(元積山)·경명산(鏡明山)·북성산(北城山)·가현산(歌絃山)·약산(藥山)·문수산 등으로 기록되었다.
<성산교(정면)>
47년간 단절되었던 한남정맥의 정기(精氣)가 이 다리 하나로 과연 통할 수 있을까? 하나의 백두대간(白頭大幹)과 1정간(正幹), 13정맥(正脈)이 우리국토의 골격을 형성하여 백두산호랑이의 이동통로였다. 그리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물을 가르지 못한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 우리조상들의 지리개념이었다. 갈 수 없는 북녘 땅을 제외하고는 각종 도로와 철도 그리고 송전탑과 위락시설 등이 그 맥(脈)을 단절시켜 놓고 있으며 그 수와 양조차 파악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성산교(측면)>
성산교를 걸어 나와 데크를 따라 할미산성으로 올라간다. 이 산성은 할미산(349m)의 정상과 그 남쪽 능선 일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일제가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자료(朝鮮寶物古蹟資料)에는 “석루 둘레가 약 4백 칸이고 전부 붕괴되었으며, 고려시대 한 노파가 하룻밤에 쌓았다고 하여 노고성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전설로 ‘할미산성’으로 부른다. 성벽의 전체둘레가 651m로 북쪽의 높은 위치와 남쪽의 낮은 위치 사이에 별도의 석축이 있어서 이 부분의 길이가 180m나 된다.
<할미산성>
1998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에 의해 조사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삼국시대부터 신라후기시대의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2005년에는 경기도박물관의 조사결과도 신라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城) 내부시설로는 수구지, 토광, 건물지 등이 확인 되었으며, 유물로는 철제류 일부와 신라계 토기류가 주로 채집되어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시기인 6∼7세기 초에 축조되어 한정적으로 사용된 성으로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성이 인정되어 경기도기념물 제215호(2006년 11월)로 지정되었다.
<할미산성 정상>
할미산성에서 용인시 동백동 영동고속도로 지하도를 빠져나오니 땅거미는 길게 옆으로 뻗는다. 오후 1시에 용인시청역을 출발하여 멱조현(메주고개)을 지나 통화사입구를 경유하여 석성산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끊어졌던 한남정맥을 연결한 성산교를 건너 할미산성을 점고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4시간이 소요되었다.
<할미산성(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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