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광교산에 오르며

와야 정유순 2019. 2. 20. 14:34

광교산에 오르며

(2019218)

瓦也 정유순

   광교산(光敎山, 582)은 겨울철의 설경(雪景)도 빼어나 광교적설(光敎積雪)’이라 하여 수원8경의 하나로 꼽히는 산이다. 엊그제 내린 눈을 보러 경기대학교 정문 입구에 있는 반딧불이 광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반딧불이 광장은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가 개최되는 것을 계기로 수원시에서 반딧불이화장실을 설치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중 이용시설인 공중화장실은 그 지역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얼굴이며 한나라의 경제 수준뿐만 아니라 문화와 교육 수준에 비례한다. 그래서 음악이 흐르고 그림이 걸려있는 곳이다.


<광교산-형제봉에서>

<반딧불이화장실>


   좀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완만한 능선이 나온다. 능선너머에는 경기대학교 수원캠퍼스가 자리한다. 경기대학교는 1947년 조양보육사범학교로 설립하여 1955년 경기여자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57년 손상교(孫祥敎, 19221975)가 재단법인 경기학원을 설립하여 인수하였으며, 남녀공학인 경기초급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2경기실업초급대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1963124년제 정규대학으로 승격하여 경기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79년 수원캠퍼스를 조성하고, 1984105일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였다.

<경기대학교 수원캠퍼스-네이버캡쳐>


   이 능선은 6·25한국전쟁 당시 1951131일부터 210일까지 국군1사단과 미25사단, 터키여단 1개 대대가 칠보산광교산관악산을 연하여 전투를 했던 역사적인 장소다. 육군 제51사단은 20097월부터 20106월까지 국군전사자 유해 5구와 유물 111점을 발굴하여 국립현충원에 모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아직도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흔(傷痕)의 치유와 동족상잔(同族相殘)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빌어본다.

<6·25한국전쟁 유해발굴지>



   몇 번의 약간 숨 가쁜 오르막이 있었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형제봉을 향한다. 원래 형제봉(兄弟峰, 448)을 오르는 바위에는 밧줄을 잡고 기어오르는 70도 경사의 암벽코스로 기어오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밧줄을 잡고 오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암벽 옆으로는 439개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계단으로 오른다. 형제봉 정상에 서면 동쪽은 용인시이고, 서쪽은 수원시여서 두 형제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두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여 가슴이 확 트인다.

<439계단>

<형제봉>


   형제봉 정상의 좁은 자리는 뒤에서 올라오는 사람에게 양보하고 광교산 정상을 향해 또 오른다. 낙엽 밟히는 소리에 취해 무념의 상태로 한참을 오르다가 <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金俊龍將軍 戰勝地·)> 안내판이 나온다. 경기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이 비는 병자호란(1636121637 1) 때 광교산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친 김준룡장군(15861642)의 전승지에 비 모양으로 암반에 글자를 새긴 것이라고 하며, 이곳의 지명이 청군이 항복한 계곡이라 하여 호항곡(胡降谷)이다.

<김준룡장군전승비-네이버캡쳐>


   김준룡은 전라병마절도사로 재임 시 1636(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친병을 이끌고 13일 만에 수원 광교산에 이르러 청군을 맞아 혼전을 벌인 끝에 청태종의 부마(駙馬) 양고리(楊古利) 외 두 대장을 사살하고 대승하였다. 전하는 말로는 수원성을 쌓을 때 석재(石材)를 구하러 갔던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축성책임자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이 이 사실을 새기게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세로 135, 가로 40이다. 채제공은 73세의 나이로 1793(정조17)에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오른다.

<김준룡장군전승지.비 안내문>


   조금 더 앞으로 나가면 비로봉으로 불리는 종루봉(鐘樓峰)이다. 종루봉이라 부르는 것은 신라 때 대학자 최치원이 이곳을 찾았을 때 종과 종루를 보고 종대봉이라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최치원은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많은 공부를 하고 돌아왔지만 신라에서는 말단 6두품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상을 은거하던 중 광교산 종루봉에 오르니 종은 있지만 울릴 사람이 없고, 종과 자신의 신세가 같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종루봉정상의 망해정>


   종루봉에는 종 대신 망해정(望海亭)이란 팔각정이 있다.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서해가 보여서 붙인 이름 같다. 그 안에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나옹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 이곳 풍광과도 잘 어울린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山中好友林間鳥 世外淸音石上泉(산중에 좋은 벗은 숲속의 새요, 세상에서 가장 맑은 소리는 돌 위에 흐르는 샘물소리)”라는 글귀를 무봉(霧峰)’의 이름으로 서각(書刻)되어 있다. 이곳에서 두 글귀를 보며 사해를 바라보니 신선의 경지가 따로 없다.

<망해정의 서각>


   갈수록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내 감각으로 산을 오를 때 보면 목적지에 89부 능선을 지날 때가 제일 힘들다. 처음에는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뒤돌아온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다 왔구나하는 다짐을 갖게 한다. 우리가 사는 인생살이도 마지막 고비에는 더 큰 어려움이 따르는 것 같다. 돌 틈으로 난 길을 더듬다가 마지막 계단이 끝나는 지점이 광교산(582) 정상이다. 광교적설(光敎積雪)’은 북쪽을 향한 능선에만 잔설이 조금 있을 뿐이다.

<광교산정상 부근의 소나무>

<광교산 정상 계단>


  광교산은 수원의 북쪽에서 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수원의 주산으로 본래 명칭은 광악산(光嶽山)이었는데, 928년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평정한 뒤 이 산의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을 때 산 정상에서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부처가 가르침을 내리는 산이라 하여 광교(光敎)’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고기동, 의왕시의 일부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정상은 떡시루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시루봉이다.

<광교산 정상>


   그리고 광교산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갈라진 한남금북정맥의 끝인 안성 칠장산(七長山)에서 시작되어 서북쪽으로 김포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는 한남정맥(漢南正脈) 산줄기의 중심 산이다. 한남정맥은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13개 정맥 중의 하나로 칠현산(七賢山백운산(白雲山석성산(石城山광교산(光敎山사근현(沙斤峴오봉산(五峰山수리산(修理山소래산(蘇來山주안산(朱安山경명산(鏡明山북성산(北城山가현산(歌絃山약산(藥山문수산 등으로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山經表)에 기록되었다.

<광교산에서 본 관악산>

<고기리계곡>

<백운산>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우리 조상들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으로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산맥개념이며, 한반도를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산줄기 이름으로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까지 약1,490km에 달하는데 우리나라 모든 강의 발원지가 되고, 강의 경계(境界)를 만들어 준다. 백여 년 이상 우리 지리교과서의 안방을 차지했던 산맥(山脈)고토분지로(小藤 文次郎)’ 라는 일본사람이 1900년을 전후로 우리나라 땅을 조사하여 만든 것으로, ‘인위적으로 가공된 지질학적인 선이다.

<백두대간 지도>


   정상에서 북으로 관악산(冠岳山)이 병풍을 이루고 용인의 고기리계곡 끝으로 청계산(淸溪山)이 맥을 형성한다. 동으로는 용인의 석성산(石城山)에 뻗어 나온 산줄기가 끊어질 듯 하면서 손을 내밀어 이어준다. 서쪽으로는 백운산(白雲山)이 수리산(修理山)으로 연결해 준다. 서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통신탑이 하늘을 찌르고, 그 밑에 있는 노루목대피소는 나그네의 안부를 물어본다. 억새밭 계곡 오크통약수터에서는 수원천(水原川)이 발원(發源)하여 수원화성을 가로질러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서해로 들어간다.

<노루목대피소>

<약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