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종로의 유적을 찾아서
(2019년 1월 29일)
瓦也 정유순
오늘은 서울 도성 안에 있는 근대 유물들을 확인하기 위해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내린다. 서울메트로 소속으로 1985년 10월 18일 개업한 혜화역(惠化驛)은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하지만 동소문(東小門)으로도 불리는 혜화문(惠化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역 주변에 국립서울과학관, 마로니에공원,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서울대학교병원, 서울대학교치과병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창경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병원>
혜화역에서 서울대학병원으로 들어서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다. 이 대학은 1899년 관립으로 설립된 경성의학교로 출발하여 1916년의 ‘경성의학전문학교관제’가 발표됨에 따라 폐지되고 경성의학전문학교로 흡수되어 부속병원을 두고 광복 전까지 운영되다가, 1946년 10월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합쳐져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흡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명칭도 대한의원 교육부-경성의학전문학교-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및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계승되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이 건물 뒤에는 한국의학의 선구자 김익남(金益南, 1870∼1937)의 동상이 서있다. 김익남은 갑오개혁 때 정부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1899년에 도쿄지케이의원[東京慈惠醫院]의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근대식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근대식 의학교육기관인 의학교의 교관으로 1902년 13명, 1903년 13명 등 국내 최초로 근대식 의사를 배출했다. 또한 일제침탈의 국가위기에서도 1904년 대한민국 초대 육군위생병원 원장을 맡았으며, 신분제의 굴레를 벗어나 사회적 성취를 이룬 인물이다.
<한국 의학의선구자 김익남 동상>
그리고 이 동상 바로 앞에는 ‘경모궁 터’다. 경모궁(景慕宮)은 정조(正祖)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 후에 莊祖로 추존)의 묘(廟)가 있던 곳이다. 원래 이곳은 1484년(성종15)에 창경궁을 창건하고, 풍수지리에 따라 궁궐의 동쪽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잡인들이 출입을 막았으며, 1493년(성종24)에는 창경궁에 딸린 후원(後苑)으로 함춘원(含春苑)이라고 불렀다. 장조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맡기도 했으나 유폐되어 죽었다.
<경모궁 석단>
영조는 그를 불쌍히 여겨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1762년(영조 38)에 사도묘(思悼廟)를 건립한 뒤 수은묘(垂恩廟)로 개칭하였다. 1764년(영조40)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를 함춘원으로 옮겨지었으며,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4년(정조8)에는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이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함춘원 옛 터인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이곳의 원래 모습은 사라졌다. 지금은 경모궁터의 석단(石壇)과 함춘문(含春門)만 남아 있다.
<함춘문>
경모궁에서 대한의원으로 향한다. 사적 제248호로 지정된 대한의원(大韓醫院)은 1907년(융희1) 3월 당시 국립의료기관에 해당하는 광제원(廣濟院), 국립의학교육원이었던 의학교(醫學校)와 그 부속병원, 대한국적십자병원이 통합되어 설립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의원이 되었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개설되자 1928년 그 부속의원이 되었고, 해방 후에는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재편되었다.
<초기의 대한의원>
이 건물은 대한의원 본관으로 1908년 10월에 완공되었다. 돔 양식의 둥근 지붕양식을 얹은 네오바로크풍의 시계탑, 르네상스양식의 벽면, 자동차가 진입할 수 있는 현관포치 등 다양한 서양건축양식 어울려 있다. 건물 내부는 속복도형으로 양쪽에 방이 있고 중앙에는 목조계단이 있다. 1911년 동서 날개채가 증축되었는데, 서쪽에는 계단식 임상강의실이었다. 현재는 본채와 동날개채 부분만 남았으며, 2층은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한의원>
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시계탑(時計塔)이다. 대한의원 본관 2층 위에 서있는 시계탑은 그 안에서 다시 3개 층으로 나누어진다.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1층은 천정까지 높이가 약7.5m에 이르는 높은 공간이다. 이는 시계추가 오르내릴 긴 공간으로 한번 추를 감아야 시계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시계가 있는 부분은 3층으로 2층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다락방이다. 추를 한번 감아올리면 약100시간 정도 돌아가므로 4일에 한번 씩 추를 감았다고 하며, 지금은 모형을 만들어 놓고 보여준다.
<시계탑 모형>
대한의원 마당에는 송촌 지석영(松村 池錫永, 1855∼1935 )의 동상이 있다. 지석영은 조선말에 종두법(種痘法)을 처음 도입·보급한 근대의학의 개척자이며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1899년 최초로 설립된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초대교장에 취임하여 이후 10년 간 의학교육 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한글 보급에 힘썼으며, 1909년 옥편의 효시인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적을 남겼다.
<송촌 지석영 동상>
서울대학병원을 빠져나와 좁은 골목으로 종로구 연건동 121번지에 있는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옛집을 찾아간다. 이곳은 소월이 1925년 그의 유일한 시집<진달래꽃>이 간행된 매문사(賣文社) 자리다.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출생한 소월의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으로 현대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산유화, 초혼, 엄마야 누나야 등 서정시를 남겼으며, 고향으로 내려가 동아일보 지국 등을 경영하였으나 운영실패로 33세의 젊은 나이로 음독자살하고 만다.
<연건동 김소월이 살았던 집>
대학로의 ‘연건119안전센터’ 주변에는 ‘남이장군(南怡將軍)집 터’가 있다. 남이(1441∼1468)는 남이 장군의 할아버지는 조선 개국공신이며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이고, 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며 어머니는 태종의 4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장인은 세조 때의 권신 권람(權擥)이다. 1457년(세조3)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승승장구하여 28세에 병조판서까지 오른다. 그러나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으로 처형된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가는데 다 없애고(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사나이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누가 후세에 대장부라 칭하겠는가.(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유자광은 남이(南怡)의 시 3련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을 男兒二十未得國(남아이십미득국)으로 고쳐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한다. 1818(순조18)에 관작이 복구되었고 1910년(순종3년)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조선전기의 무신(武臣)으로,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자만, 억울한 죽음으로 인하여 민간과 무속신앙에서는 장군신의 하나로 추앙된다.
<남이장군 집터>
종로구 연건동 이화사거리 부근의 홍익대학교 대학로캠퍼스 앞에는 조각가 김영원(1947∼ )의 <그림자의 그림자(홀로서라)> 우뚝 서있다. 김영원은 광화문의 세종대왕상 등을 설치한 한국 최고의 조각가다. 인체조각 <그림자의 그림자>는 인간의 몸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하면서도 수직단절의 추상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시각예술을 넘어 공연과 영상, 융합예술을 제시하는 작품이다.<작품해설판에서>
<김영원 작 그림자의 그림자>
이화사거리 건너 효제동에는 인조가 즉위하기 전에 머물던 잠저이며, 효종(孝宗, 1619∼1659)이 태어난 어의궁(於義宮) 터가 있다. 이곳은 효종이 태어나서 성장하여 왕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어의궁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며, 인조에 이어 효종까지 임금이 된 궁이라 하여 용흥궁(龍興宮)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낙산 서쪽에 있어서 아침볕을 잘 받는다 하여 조양루(朝陽樓)라고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왕실의 가례를 거행했던 대표적인 별궁이다.
<어의궁 터>
지금의 연동교회와 구 정신여자고등학교가 있었던 곳은 종로구 연지동이다. 연지동(蓮池洞)의 이름은 이곳에 도성의 동·서·남쪽의 연못 중 동지(東池)가 있던 연못으로 ‘연지’가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연동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소속된 교회로 1894년 현재의 위치에 초가 한 채를 매입하여 교회를 열었다. 1898년 연동소학교를 설립하였고, 1900년 게일(James Scarth Gale)이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성장기를 맞았다.
<연동교회 표지석>
1907년에는 ‘소아회’라는 명칭으로 최초로 주일학교를 탄생시켰으며, 일제 강점기에 많은 민족지도자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선교와 독립운동, 민족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94년 <연동교회 100년사>를 펴냈으며, 11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게일 이후 담임목사는 함태영(咸台永)·전필순(全弼淳)·백리언(白理彦)·김형태(金炯台)·이성희(李聖熙) 등으로 이어졌다. 함태영은 제3대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
<연동교회>
정신여고(貞信女高)는 1887년 미국 북장로교의 주관으로 정동에서 창립하였다. 1895년 10월 20일 연지동으로 이전하고 연동여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이날을 개교기념일로 한다. 1909년 대한제국정부로부터 사립 정신여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애니 엘러스(Annie J. Ellers)가 설립자다. 1933년 정신여자학교로 조선총독부의 지정을 받았으나, 1939년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재단이 해체되었다. 1947년 7월 정신여학교로 재인가 받아 개교하였으며, 1978년 12월 서울시 송파구 잠실동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구 정신여자고등학교 교정>
당시 지하조직을 통하여 3·1운동을 전개하였던 애국부인회 회장에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인 김마리아가 선출되었고, 그 본부가 정신여학교에 설치되자 일제의 탄압은 극에 달하였다. 1939년 국어말살정책과 신사참배에 대한 거부로 교장이 해직되고 재단법인은 해체되어 이후 친일 한인에게 경영권이 형식적으로 승계되었다가 1945년 3월 풍문학원(豊文學園)에 합병되기도 했다. 교정의 회화나무는 일경들이 수색 등을 나올 때, 나무의 갈라진 틈새에 기밀서류 등을 은폐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신여고 회화나무>
종로구 인의동에는 ‘이현궁 터’가 있다. 이현궁(梨峴宮)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 지냈던 잠저(潛邸)다. 이현궁이 있던 고개를 속칭 배고개, 즉 이현(梨峴)이라고 불러서 이현궁이라 했다. 1623년(인조1)에 계운궁으로 고치고 그의 어머니인 연주부 부인을 모시었다. 숙종 때는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최동이)가 기거하게 되면서 이현궁은 숙빈방으로 되었다가 1711(숙종37년)년에 연잉군(영조)의 저택이 됐다. 1787년(정조11)에는 장용영(壯勇營)이 되었다가 1888년(고종25)에 통위영이 되어 속칭 동별영이라 불렸다.
<이현궁 터>
부근에는 한성부동부관아(漢城府東部官衙) 터가 있다. 조선이 1394년 한양으로 천도 한 뒤 1396년 한양을 동·서·남·북·중부 등 5부로 하고 그 밑에 52방으로 구획하고 관리하였는데 <도성지(都城志)>에 의하면 동부 (東部)는 동부 연화방에 있었다. 각 부(部)의 책임자는 현감(종6품) 보다 높은 종5품인 관령(管領) 이고, 종9품인 도사(都事)1명과 아전으로 서원(書員) 4명, 사령(使令) 8명, 대청직 1명, 군사 2명이 있었다. 그 뒤 <경국대전>에는 책임자를 영 (令)이라고 하고 방(坊) 책임자를 관령(管領)이라고 하였다.
<한성부 동부관아 터>
종로4가사거리에는 ‘두산그룹 발상지’ 기념 터가 있다. 이곳은 1896년 8월 1일 두산그룹의 모태이자 우리나라 근대기업의 효시인 ‘박승직상점 터’다. 박승직(朴承稷)은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1885년 부보상으로 출발, 1896년 서울의 배오개시장(지금의 종로4가)에 포목상 ‘박승직상점’을 개설하였다. 또한 구한말 관직에도 진출, 1900년 성진감리서(城津監理署) 주사가 되었으며, 그 후 정삼품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1905년 한국 최초의 경영인 단체인 한성상업회의소가 설립되자 1906년 상임의원에 피선되었다.
<두산그룹발상지>
기념 터 바닥 중앙에는 두산 100년의 역사와 관련된 각종 문물 1천여 점을 넣은 타임캡슐이 묻혀 있으며, 창립 200주년을 맞게 될 2096년 8월 1일 두산의 후계자들에 의해 개봉될 것이다. 또한 타임캡슐 위로 우뚝 솟은 기념탑은 첨단 정보화시대를 상징하는 컴퓨터디스크 쌓아 미래를 향한 두산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터를 조성할 당시인 1996년에는 컴퓨터디스크가 최첨단이었으나 지금은 사양화되는 것으로 보아 변혁의 속도가 엄청 빨라졌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두산그룹 기념탑>
종로5가 광장시장은 국내 최초의 상설시장으로 1904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일본인들이 남대문시장 등 서울상권을 장악하고, 경제침략 정책 등으로 조선의 경제를 위협하자 조선 상인들이 이에 맞서 세운 시장이다. 고위 관리였던 김종한과 종로의 거상인 박승직(두산 창업주), 장두현 등 3인의 발기인이 토지와 현금 10만 원으로 발족시켰다. 광장(廣長)이란 뜻은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다하여 광장으로 명명한 것으로, 1905년 7월 시장의 명칭을 동대문 시장으로 확정했다가 나중에는 광장(廣藏)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장시장 외부>
광장시장은 100년 넘게 한복 원단, 양복지, 양장지, 커튼, 침구류 등 직물 도·소매상들이 많은 시장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최근에는 마약김밥, 빈대떡, 회 등 특색 있는 먹을거리로 더 유명해졌다. 이 먹거리장터들은 본래 야간 장사를 하는 직물 상들과 새벽에 물건을 떼러 오는 소매상들이 식사를 해결하는 장소로 출발했는데, 최근에는 일반인들의 맛 집 장소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광장시장 내부>
오늘날 광장시장의 2∼3층은 구제품(舊製品) 상가로 유명하다. 광장시장 전체에서 보면 큰 규모는 아니지만 단골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이곳에서 팔리는 90%는 헌 옷, 즉 구제품들이다. 외국 유명브랜드를 비롯하여 상점마다 구제 상품들이 손님을 유혹한다. 구제시장을 비롯하여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녹두빈대떡과 육회로 입맛을 다신다면 멋진 나들이가 될 것 같다.
<광장구제시장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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