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종로의 유적을 찾아서(2-1)
(2019년 2월 8일)
瓦也 정유순
오늘은 1919년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한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종로구에 산재해 있는 유적을 추적하기 위해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를 통해 kt광화문빌딩을 경유하여 수송동에 있는 종로구청으로 향한다. 이곳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며 국가의 틀을 짠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의 집터가 있던 자리다. 과연 조선 최고의 건국공신답게 당시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정문 앞은 육조거리가 조성되었으며, 이 육조거리 바로 뒤에 자신의 집터를 정한 것이다.
<삼봉 정도전의 집터 지도-네이버캡쳐>
삼봉은 태조의 최측근이었고 사실상 조선의 국가이념을 수립했지만, 조선개국 6년 후 제1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삼봉의 신권정치(臣權政治)와 이방원의 왕권정치(王權政治)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삼봉은 측근들과 ‘남은(南誾)의 첩’ 집에서 술자리를 하다 피습 당하는데, 그 위치는 현 일본대사관 뒤 종로구 중학동 14번지(트윈트리타워) 일대라고 한다.
<종로구청사-옛 수송초교>
이렇게 숨진 정도전은 1865년(고종2년) 경복궁 중건과 더불어 복권이 되기까지 역적이 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건국이념은 조선 518년 역사 속에 살아 내려왔다. 정도전이 살던 집 안채는 제용감(濟用監)에서 사용하고 서당 자리는 중학(中學)에서, 마구간은 사복시(司僕寺)에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송국민학교가 들어서기도 하였으며 광복 후 경찰기마대가 사용하기도 하다가 종로구청과 종로소방서가 사용하고 있다.
<종로구청의 삼봉서랑>
사포서(司圃署)는 왕실 소유의 과수원과 채소밭 등을 관리하고 왕실에 소용 되는 채소재배 등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조선 초부터 있던 기관이다. 당초에는 북부 준수방(俊秀坊, 지금의 통인동) 지역에 있다가 수송동의 현 서울지방국세청 부근으로 이전하였으며 1882년(고종19)에 폐지되었다. 사포서의 관리로는 종2품 이상인 제조(提調) 1명, 정6품 사포(司圃) 1명, 종6품 별제(別提) 2명, 종7품 직장(直長) 등의 관리가 있었다.
<사포사 터>
사포서 터 옆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위치상으로는 종로구 수송동에 있으나 바로 길 건너에는 주한일본대사관이 있는 종로구 중학동이다. 중학동(中學洞)은 조선시대 4부학당의 하나인 중부학당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서울을 동·서·남·북·중의 5부로 나누어 여기에 학교를 각각 하나씩 설치하여 5부 학당(學堂)이라고 하였으나 북부학당은 설치하지 못하였고 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중학(中學) 등 4부 학당만이 존속하게 된다. 학당은 지방의 향교(鄕校)와 달리 문선왕묘(文宣王廟)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중심이 된 시민 모금으로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세운 동상으로, 부부 작가(김운성, 김서경)의 작품이다. 소녀상 높이는 130cm이며 치마저고리를 입고 짧은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의자에 앉은 채 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군에 끌려갔던 14∼16세 때를 재현한 것이다.
<공사중인 주한일본대사관>
아직도 아물지 못한 일제의 상처를 가슴에 안으며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영당(影堂)이 있는 수송공원으로 옮긴다. 목은은 본관이 한산(韓山)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야은 길재(冶隱 吉再)와 함께 삼은(三隱) 중의 한 분이다. 목은의 제자 중 정몽주와 정도전이 있는데, 포은은 고려 말에 이방원(조선 태종)에게 죽임을 당하고, 삼봉은 조선 개국 후에 죽임을 당한다. 이색의 학문은 하륜(河崙)·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통해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룬다.
<목은선생 영당>
수송공원에는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가 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904년 영국인 배설(裵說, 베델 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된 일간신문으로 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경술국치 다음날부터 ‘대한(大韓)’의 두 자를 떼어낸 채 ‘매일신보’가 되어 조선총독부기관지로 바뀌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그 밖에 신흥대학 터, 도화서 터, 숙명여학교 옛터 등이 조그만 공원 터를 장식한다. 신흥대학(新興大學)은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을 위해 1945년에 설립하였으나, 한국전쟁과 재정형편이 어려워지자, 재단을 조영식(趙永植, 1921∼2012)이 인수하여 현재의 경희대학교가 되었다. 1906년 고종의 귀비인 엄비의 지원으로 숙명여중고가 설립되었고 1909년에는 중동중학교가 터 일부를 사용하였다. 1980년에는 숙명여중고가, 1984년에는 중동중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뒤 이 자리에는 재보험빌딩이 들어섰다.
<신흥대학 터>
<숙명여학교 옛터>
그리고 수송공원 한쪽에는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沃坡 李鍾一, 1858∼1925)의 동상이 외로이 서있다. 충남 태안에서 신동으로 출생한 옥파는 교육자와 언론인으로 남다른 열의와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10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 3만5천장을 인쇄하여 전국에 뿌렸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 후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제의 온갖 회유에도 굴하지 않다가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초가(草家)에서 1925년 68세를 일기로 영양실조 끝에 서거하였다고 한다.
<옥파 이종일선생 상>
수송공원 바로 옆에는 한국불교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가 있다. 조계종(曹溪宗)은 한국불교 27개 종단 중 최대 종단으로 신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며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인 지눌(知訥)의 중천(重闡)을 거쳐, 보우국사(普愚國師) 태고(太古)가 구산(九山)을 통합하여 조계종이라 공개적으로 이름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창종(創宗)의 정신은 보조국사에 연유하는 선·교일치(禪敎一致)에 있다.
<조계사 대웅전>
이 종단은 총무원·포교원·교육원·중앙종회를 중앙조직으로 하고 전국에 25개 교구본사를 두어 2천개 이상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으며, 산하단체로는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대한불교청년회·대한불교조계종 등이 있으며, 유관단체로는 재단법인 선학원 등이 있다. 종단 소속 교육기관으로는 동국대학교를 비롯한 대학교 2개교, 중고등학교 18개교, 종단 소속 사회사업기관으로는 유치원 16개소, 유아원 4개소, 고아원 2개소, 양로원 1개소가 있다.
<조계사 10층석탑>
조계사(曹溪寺)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직할교구의 본사(本寺)이자 총본사로 중앙총무원 ·중앙종회(中央宗會) 등이 있는 한국 불교의 중심지이다. 1395년(태조 4) 창건된 사찰로 1910년 승려 한용운(韓龍雲) ·이회광(李晦光) 등이 각황사(覺皇寺)라 불렀던 유래가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태고사(太古寺)로 불리다가 54년 불교정화 이후 조계사로 개칭하였다. 이 절은 대웅전(大雄殿)의 규모가 웅장할 뿐 아니라 문살의 조각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불교조계종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조계사 대웅전은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127호, 2000년 9월 10일)로 지정되었다. 1935년 한용운·박한영·송종헌 등이 중심이 되어 불교 총본산 건립운동을 추진하던 중, 1936년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해체되는 민족종교인 전라북도 정읍의 보천교(普天敎) 법당으로 쓰이던 십일전(十一殿)을 경매를 통해 사들여 1937∼1938년 이건(移建)하였다.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서울 ‘수송동의 백송(白松)’이 있다.
<조계사 백송>
조계사 옆에 있는 우정총국(郵征總局)은 조선 말 우체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다. 1884년 4월 22일 고종의 왕명으로 개설하여 그해 11월 18일부터 근대 우정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으나,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폐지되고 17일 만에 우편업무가 중단된다. 이후 이곳은 한어학교, 중동학교 등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분류되어 철거될 위기에서 1956년 당시 체신부(遞信部)가 매입하였으며,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우정총국>
조계사 경내에는 충정공 계정 민영환(桂庭 閔泳煥, 1861∼1905)의 집터가 있다. 민영환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서울에서 호조 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의 총애로 여러 관직을 수행하였고,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인천을 떠나 상해·동경·뉴욕·런던·독일 등지를 거쳐 모스크바 행사에 참여하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같은 해 10월 하순 귀국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다 좌절되자 1905년 11월 30일 자신의 청지기 집(현 공평동)에서 자결한다.
<충정공 민영환 상>
그가 순국할 때 큰 별이 서쪽하늘에서 떨어지고 까치가 떼로 몰려와 울었다고 한다. 순국 후 피 묻은 옷과 칼을 상청(喪廳) 마루방에 걸어 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고 보니 대나무 4줄기가 마룻바닥과 피 묻은 옷을 뚫고 올라온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血竹)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민영환이 순국할 때 나이가 45살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솟아 난 대나무 잎 개수가 역시 45개였다. 유족이 보관해 오던 혈죽은 1962년 고려대박물관에 기증되어 보관 중이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고려대박물관에 보관 중인 혈죽-네이버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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