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동작충효길
(2019년 1월 21일)
瓦也 정유순
촌놈이 서울에 올라와 수도권에서 생활한지 어언 50년이 훌쩍 지났다. 남들보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하고 길눈이 좀 밝아 구석까지 싸다녔지만 아직도 안 가본 곳이 많고 생소한 곳이 많이 있다. 정말 가까이 있으면서도 더 먼 곳처럼 찾아가지 않았고, 잘 알 것 같으면서도 더 모르는 곳이 더 많다. 그래서 오늘은 서울의 관악구 낙성대에서 출발하여 동작구 충효길로 길을 나선다.
<강감찬장군 동상>
관악구 인헌동의 낙성대(落星垈)는 고려의 명장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탄생지이다. 강감찬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우리역사상 3대첩의 하나인 구주대첩의 영웅이다. 낙성대는 1973년부터 이듬해에 걸친 성역화 사업으로 사당인 안국사(安國祠)가 들어서고 주위로 긴 담장을 두르는 등 공원으로 바뀌었다. 원래 이 지역은 봉천11동이었으나 2008년 9월 동명개명으로 인헌동(仁憲洞)이 되었다. 인헌동의 ‘인헌(仁憲)’은 강감찬장군의 시호(諡號)를 딴 것 같다.
<강감찬장군 사당(안국사) 입구>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해오자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귀주에서 적을 대파시킨 고려의 명장 강감찬이 태어나던 날 밤 별이 떨어져 생가 터의 이름이 된 낙성대(落星垈)는 1972년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 안국사(安國祠)에는 장군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다.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안국문(安國門) 앞마당에서 길을 출발한다.
<안국사 전경>
서울대학교를 경계하는 철조망을 따라 우거진 숲길에서는 산새들이 반가움인지 놀라움인지 주변을 맴돌며 노래한다. 몇 구비의 고개를 넘어 도착한 곳은 무당골이다. 무당골 바위굴에는 촛농 자국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은 우주의 만물과 그 운행에는 각각 존재와 질서에 상응하는 기운이 깃들어 있어 인간이 제 스스로를 낮추어 기운을 거스르지 않으며, 위하고 섬기면 소원을 성취하고, 모든 일이 질서를 찾아 편안해진다는 확고하면서도 광범위한 범 우주적, 자연적 신관과 나름대로의 신앙체계를 갖추고 있다.
<무당골>
무당골에서 능선을 경계로 서쪽은 인헌동이고 동쪽은 남현동이다. 남현동(南峴洞)은 남쪽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라는 뜻의 남태령(南泰嶺)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은 원래 사당1동이었으나 1980년 4월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분리될 때 관악구에 남으면서 남현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관음사 아래에는 승방평(僧房坪)이라는 마을이 있었으며, 전통 민속놀이인 무동답교(舞童踏橋) 놀이가 있었으나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하여 없어졌다.
<무당골에서 본 서울>
그리고 이 지역은 예술인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한국예술인총연합회와 서울시가 1972년 남현동 일대에 예술인아파트 3동을 지으면서 만들어졌다. 영화배우 최은희를 비롯해 ‘땅딸이’와 ‘뚱뚱이’란 예명으로 각각 유명했던 이기동과 양훈, 배우 황정순과 함께 현모양처 어머니상을 주로 연기한 주중녀, 조각가 이영일, 탱화전문가 김영진 등 90여 세대가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 세상을 떠난 친일시인 서정주 또한 31년 동안 남현동에 살았으며, 지금도 살았던 집은 봉산산방(蓬蒜山房)이란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봉산산방-뉴시스캡쳐>
동작충효길은 동작구에 충(忠)을 상징하는 국립서울현충원과 사육신공원, 효(孝)를 상징하는 정조대왕이 화성으로 능행(陵幸) 시 잠시 쉬어가던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등 충효를 기리는 문화재가 있어, 이 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충효정신과 선열들의 위대한 희생정신을 배울 수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일곱 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오늘은 7코스(까치산길)와 2코스(현충원길)를 경유하여 이수역까지 목표로 잡는다.
<용양봉저정-2016년11월 촬영>
남현동에서 동작충효길로 가려면 사당역에서 낙성대역으로 넘어가는 원당고개를 건너야 한다. ‘원당고개’는 조선시대 동래정씨 문중과 전주이씨 문중이 사당고을이 서로 자기 땅이라 하여 소송이 붙자 고을 원님이 이 고개턱에 앉아서 판결을 내렸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사당동 산44번지 일대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산44-12, 산32-4번지를 경계 지점으로 반씩 소유토록 했는데, 산44-1번지에서 남태령고개까지는 전주이씨가, 산32-4번지에서 동작동 배나무골까지는 동래정씨가 소유토록 했다고 한다.
<전망대>
동래정씨가 소유한 땅에는 ‘벌명당’이란 곳이 있다. 벌명당은 사당동 동래 정씨 문중의 묘가 있는 지역으로, 옛날 나라에서 묘자리를 정하려고 지관(地官)을 시켜 지형을 살피게 하였는데 이 지역이 명당임을 알았다. 지관이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려 할 때 당시 영의정 자리에 있던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알고 다른 곳을 찾도록 부탁하였다. 배나무골은 지금의 이수역(梨水驛) 부근으로 추정한다.
이에 지관은 영의정에게 자기가 동재기나루를 다 건널 무렵에 그곳을 파보라고 하였다. 지관이 동작진(銅雀津)을 다 건넜으리라고 생각되었을 때 땅을 파 보니 커다란 벌들이 수없이 나와 지관에게 날아가 지관을 쏘려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독을 뒤집어썼으나 벌들이 독에다 침을 놓아 독을 깨트리고 죽었다. 그 뒤 영의정이 죽어 그 자리에 묘를 쓴 뒤 9대를 두고 내리 정승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동작구 사당동(舍堂洞)은 옛 집이 많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어떤 종류의 옛 집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그렇지만 사적 247호로 지정된 백제 도요지, 신라 도요지 등이 있음을 감안할 때, 옛 집은 이들 도요지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옛날의 정취는 간 곳 없고, 아파트만으로 채워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정씨(東萊鄭氏) 세거지(世居地)였으며, 정씨 문중의 신도비가 남아 있다.
<동래정씨임당공파종친회>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까치산공원은 수목이 우거지고 까치가 많아 까치고개라 불렸던 곳으로부터 이름이 유래한다. 도로개설로 인해 끊어졌던 공원에 2005년 6월에 길이 22m, 폭 15m의 아치형 생태육교가 세워지면서 관악산까지 이어지는 통행이 가능해졌다. 이 생태로는 낮에는 사람이, 밤에는 동물들이 이동하는 길로, 주변에는 3천여 그루의 나무를 비롯해 8종의 생태시설물을 조성했다. 배드민턴장, 운동기구시설, 약수터, 산책로 등 시설도 있다.
<까치산 올라가는 길>
까치산공원을 지나면 사당동 총신대학교에서 상도동 숭실대학교로 넘어가는 사당이고개를 넘는데, 옛날 이 고개 부근에 큰 사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백운고개로도 불린다. 이 고개 위에는 7코스(까치산길)와 2코스(현충원길)를 연결해 주는 생태다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다리 건너 계단을 오르면 2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백운고개>
이 지점에는 ‘메모리얼 게이트’란 국적불명의 안내판이 서있다. 안내문에는 “국립현충원의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게이트로서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게이트의 지붕은 태극문양을 게이트의 기둥은 건, 곤, 감, 리로 표현하였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며 추모의 글을 남겨보세요”라고 적어 놓았다. 의도는 좋았으나 ‘추모의 문’이라고 하면 덧이라도 나는 걸까? 소태 씹은 맛으로 서달산에서 동작역 쪽으로 가지 못하고 관우(關羽, ?∼219)를 모신 사당 남묘(南廟)를 지나쳐 이수역으로 내려온다.
<메모리얼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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