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초안산길

와야 정유순 2019. 1. 26. 09:57

가깝고도 먼 길-초안산길

(2019123)

瓦也 정유순

   서울은 광화문을 중심으로 사방 백리 안에는 한양도성과 어떻게든 연()을 맺고 있다. 오늘 가고자 하는 초안산(超安山)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지하철 4호선 미아역에서 하차하여 오패산과 북서울꿈의숲을 도보로 경유하여 길을 나선다. 오패산 서쪽자락에는 성신여자대학교 운정그린캠퍼스와 서울사이버대학교, 신일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오패산>


   미아역 3번 출구로 나와 솔매로로 쭉 올라가서 강북실버종합복지센터 앞으로 하여 주택가를 지나면 오패산이다. 오패산(123m)은 북한산의 한 지맥이며 강북구 번동과 미아동의 경계를 이룬다. 바로 옆의 벽오산(135m)은 철종(哲宗)의 왕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가 복온공주의 손자 오천 김석진에게 벽오산(碧梧山)’ 석자를 친필로 써 주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천 김석진(梧泉 金奭鎭, 18431910)은 조선 후기의 문신, 의열사. 철종 때 청요직(淸要職)과 한성부(漢城府)의 좌윤·우윤을 지냈으며, 형조판서(刑曹判書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통어사(統禦使) 등을 지냈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일제의 회유를 치욕으로 여겨 아편을 복용하고 자살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강북실버종합복지센터>


  두 산 정상 부위만 숲이 우거져 시민들이 산책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오동근린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이 공원에는 조창원이라는 분이 돌탑을 고행을 벗 삼아 옛 선조의 뜻을 기리며 홍익인간의 참됨을 수행하고 밝은 태양처럼 만인에게 빛이 되고자 이 탑을 쌓았으며, 번뇌·망상·한이 물같이 바람같이 사라지다.”라고 기원하며 정성들여 2002(단기4335) 93일 쌓아 놓았다.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쉽게 접근이 가능하며, 침엽수와 활엽수가 어우러진 숲이고, 특히 오얏나무가 많다고 한다.

<오동근린공원 돌탑>


   오패산을 서쪽으로 올라가 북쪽과 동쪽으로 하여 남쪽 번동 연립주택 단지를 지나 북서울꿈의숲으로 향한다. 북서울꿈의숲은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둘째 딸인 복온공주(福溫公主)와 부마 김병주(金炳疇)의 묘가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어 궁말 또는 궁동이라 하였고, 속칭으로 공주릉(公主陵)’으로 불러왔던 곳으로 창영위궁(昌寧尉宮)이란 재사(齋舍)가 있다.

<연립주택 골목>


   속칭 공주릉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중 19874()일우공영이 서울시로부터 종합휴양업 인가를 받아 드림랜드라는 종합위락시설을 개장하게 되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던 115천 평의 부지에 수영장과 아이스링크 등의 운동시설과 놀이시설 27종과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어 영업하여 오다가 2008년에 운영을 중단하였으며, 이 일대는 200910월에 녹지공원인 북서울꿈의숲이 조성되었다.

<북서울꿈의숲>


   옛 드림랜드(90) 부지에 조성된 북서울꿈의숲은 월드컵공원(276), 올림픽공원(145), 서울숲(120)에 이어 서울에서 4번째로 큰 공원이다. 공원에는 벚꽃길과 단풍숲을 조성했으며, 종전의 전통 한옥인 창녕위궁재사(등록문화재 제40)는 원래 모습으로 복원됐고 주변에 연못과 정자(애련정) 등이 조성돼 운치를 더했다.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센터와 전망대 등을 갖추었다. 전망대에서는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고, 남쪽으로 남산과 한강까지도 조망이 가능하다고 한다.

<강북문화정보도서관>


  북서울꿈의숲에서 월계로를 따라 우이천을 건너 노원구 월계동에 있는 신창중학교 옆으로 하여 초안산에 접어든다. 초안산(超安山, 114)은 도봉구 창동과 노원구 월계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숲들이 우거져 있어 운치도 있다. 그리고 곳곳에 산재해 있는 조선시대 사대부내시들의 묘들이 시선을 끈다. 특히 최고 권력자 임금의 최측근 내시들이 모여 잠든 곳이라 내시네 산이라고도 불린다.

<초안산 지도>


   ‘편안한 안식처를 정한다.’는 의미의 초안산(楚安山)’은 이름만큼 부드럽고 조용하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신분을 초월한 공동묘지가 들어서게 된 것도 그 덕분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까지도 매년 가을 이곳에서 내시들의 혼을 달래주는 제사를 지냈고. 지난 2013년부터 서울 노원구에서 내시와 궁녀들의 혼을 달래는 초안산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다.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조선의 궁에는 왕을 중심으로 왕의 여자 내명부와 왕의 남자 내시부가 존재했다. 이들은 주로 왕실의 비공식업무를 관장하면서 왕의 명을 출납한다. 내명부의 최고관직은 상궁이고 내시부는 상선이다. 내명부는 왕의 눈에 들면 후궁은 물론 왕비까지 올라갈 수 있으나 내시부는 종2(상선)까지이며 구성원들은 남성을 거세당한 환관(宦官)들이다. 결혼도 하고 양자를 들여 가정을 꾸릴 수 있으나 부자(父子)간이나 손자하고 성()이 다를 수 있다.

<방치된 석물들>


   때로는 왕의 비호 아래 실질적인 최고의 권세를 누리기도 하지만 좋았던 시절도 잠깐. 내시들이 잠들어 있는 분묘군은 처참하다.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건만 언젠가 왕의 옆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흉측하다. ‘진짜 핏줄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돌봐줄 후손 없이 잠든 내시 분묘군은 전혀 관리되지 않은 모습이다. 버려진 무덤 곁으로 부러진 비석과 망주석, 목이 잘린 동자석과 문인석이 을씨년스럽게 한다.

<목이 없는 문인석>

<홀로 버려진 문인석>


   조선시대 내시와 궁녀, 그리고 사대부들의 무덤 1000여 기가 모여 있는 초안산 분묘군(사적440)은 대부분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초안산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죽어서도 궁궐을 바라보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다양한 계층의 분묘와 석물들이 산재해 있어 조선시대 묘제(墓制)와 석물의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명의 봉분>


   마을 동산 같은 높지 않은 산으로 숲이 제법 우거져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초안산은 그늘져 보인다. 정상 부근에는 상궁개성박씨 묘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 많은 분묘 중 비문이 남아 있는 3기 중의 하나라고 한다. 봉분과 상석이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문인석은 머리가 잘렸다. 정상에는 표지석 하나 없고 대신 헬기장과 좀 떨어진 곳에 정자가 대신한다. 이렇게라도 귀중한 문화유산을 보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도봉구 창동 주택가를 지나 쌍문역으로 향한다.

<상궁개성박씨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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