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고창읍성과 고인돌 군 그리고 운곡습지

와야 정유순 2019. 1. 14. 23:11

고창읍성과 고인돌 군 그리고 운곡습지

(2019112)

瓦也 정유순

   전라북도 서남부 끝에 자리한 고창(高敞)! 그곳에는 선운산도립공원을 비롯하여 고창읍성,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 군(), 그리고 람사르협약에 의해 지정된 운곡습지,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의 첫 불을 든 무장읍성 등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지역으로 눈여겨 볼만한 곳이 많다. 오늘은 고창읍성과 질마재 길 첫 코스인 고인돌 군과 운곡습지 탐방을 위해 새벽 찬 공기를 가른다. 고창읍성 앞에 당도하면 고창군립도서관 벽면에는 성 안에서 판소리 한 마당이 펼쳐지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고창군립도서관 외벽>


   고창은 마한의 54국 가운데 하나였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이었으며, 백제 때는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라고 하였다. 보리고을을 상징하는 모량부리의 속명인 모양현(牟陽縣)이라고도 불렀다. 모로비리국은 전라도 지역의 다른 소국과 함께 4세기 무렵에 백제에 통합되었고, 백제가 신라에 통합된 후 경덕왕 때 모량부리현을 고창현(高敞縣)으로 고쳤다. 마한의 각 소국에는 신지(臣智읍차(邑借)라고 부르는 우두머리가 있었으며, 다수의 읍락(邑落)으로 이루어졌다.

<고창읍 전경>


   사적 제145(196541)로 지정된 고창읍성(高敞邑城)1450(조선 세종32)에 전라우도(全羅右道)인 고창(高敞), 무장(茂長), 흥덕(興德), 옥구(沃溝/군산), 용안(龍安/익산), 김제(金堤), 정읍(井邑), 태인(泰仁), 고부(古阜), 영광(靈光), 장성(長城), 진원(珍原/장성), 함평(咸平), 제주(濟州) 14개 군현(郡縣)과 전라좌도(全羅左道)인 용담(龍潭/진안), 임실(任實), 순창(淳昌), 담양(潭陽) 능성(陵城/화순) 5개 군현이 참여하여 3년만인 1453(단종원년)에 완공하였다.

<고창읍성 지도>


   축성 당시 각 고을에서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기가 쌓은 구간과 고을 이름을 성벽에 새겨두고 갔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일부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으므로 각종 문헌과 현장조사 자료를 참고하여 1997년에 19개 고을 표석을 만들어 축성구간을 찾아 성 외곽에 세워 놓았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불리는 고창읍성은 왜구(倭寇)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둘레 1,684, 높이 46, 면적 165,858로 동··북문과 3개소의 옹성(甕城), 6개소의 치성(稚城)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垓字) 등이 있다.

<고창읍성 입구>


   읍성 입구에서는 답성(踏城)놀이 하는 여인상이 먼저 반긴다. 모양성 성 밟기 놀이는 윤년(閏年) 윤달에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하며 극락왕생한다는 속신이 있으며, 부녀자들이 행렬을 지어 산성을 도는 보편화된 세시풍속이다. 윤달에서도 엿세 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초엿세날, 열엿셋날, 스무엿셋날을 답성일로 택한다고 한다. 실제 1678년에 현감 이항(李恒)은 고창 모양성(牟陽城)을 개축할 때에도 윤3월을 택하였으며, 순조 3(1803) 고창읍에 읍치풍수의 석조물을 조성할 때에도 윤3월을 택하였다.

<고창읍성 답성놀이 여인상>


   답성놀이 때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읍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공북루(拱北樓)로 들어가 높은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북문으로 돌아오는 방식은 북문을 저승길로 들어가는 극락 문이라 할 수 있으며,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양성을 현실속의 극락세계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부녀자들이 생전에 극락세계를 한번 다녀오고 싶어 답성놀이를 즐겼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 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도 맥을 같이 한다.

<고창읍성 북문-공북로>


   공북로를 지나 우측으로 조금 들어가면 척화비(斥和碑)가 있다. 이비는 조선 말엽인 병인년(丙寅年, 186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辛未年, 1871)에 세웠다. 당시 서양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개방을 압력으로 요구하자, 당시 섭정(攝政)하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이를 물리치고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의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和親)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라는 뜻이다.

<척화비>


   언덕으로 올라가 서문인 진서루(鎭西樓)를 바라보며 조금 더 올라가면 맹종죽(孟宗竹)이 숲을 이뤄 하늘을 찌른다. 이 대나무는 관상용으로 중국이 그 원산지이다. 1938년 청월(淸月)에 유영하선사(劉英河禪師)가 불전(佛典)의 대중포교를 위해 이곳에 보안사(普眼寺)를 세우고 그 운치를 돋우고자 조성한 것이다. 맹종죽은 중국 삼국시대에 효자 맹종(孟宗)이 눈 속에서 죽순(竹筍)을 얻어 어머니에게 드린 고사에서 연유한다. 죽순을 식용하고 크게 자라지만 재질이 무르기 때문에 세공용으로는 쓰지 못한다.

<고창읍성 서문-진서루>

<맹종죽>


   성황사(城隍祠)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성벽 위로 답성(踏城)을 하며 남벽 쪽으로 나아간다. 보수(補修)하는 과정에서 성벽 위에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 놓은 것은 원형(原形)을 보전하려는 노력과는 배치되며 ()의 티. 기왕에 성안의 솔밭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보존되어온 우리의 문화유산을 아무 생각 없이 행정의 편의를 위하여 자행(恣行)되어도 괜찮은 것인지 묻고 싶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을 텐데

<고창읍성 솔밭>

<고창읍성 성곽 위 시멘트>


   남벽에서 동벽 쪽으로 내려오는 경사진 성벽 위는 밤새 뿌린 눈으로 미끄럽다. 동문인 등양문(登陽門)이 지척인데 성벽 아래로 내려와 우회하여 동문 옹성에 오른다. 옹성(甕城)은 성문 앞에 설치되는 시설물로 모양이 마치 항아리와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옹성(甕城)은 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적이 통나무를 들고 가속을 붙여 성문을 공격하려 해도 공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에 성문보호를 위해 중요한 시설이다. 고창읍성의 북문과 서문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고창읍성>

<고창읍성 동문(등양문) 옹성>

<고창읍성 동문-등양루>


   동문 옹성에서 내려와 숲길을 지나 고창객사로 향한다.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객사(客舍)라고 하는 관아가 있었다. 객사 중앙의 몸체[正堂(정당)]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나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왼쪽과 오른쪽 방[익실(翼室)]은 조정(朝廷)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현판으로 걸린 牟陽之館(모양지관)의 모양은 고창의 옛 이름이며, 객사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발굴조사를 통해 1991년 원형으로 복원하였다.

<고창읍성 객사-모양지관>


   객사 아래에는 고창동헌과 내아(內衙)가 있다. 동헌(東軒)은 조정에서 임명된 수령(守令)이 정무(政務)를 보던 청사(廳舍)이며 이를 보통 외동헌이라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平近堂(평근당)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 뜻으로 악필(握筆)로 유명한 고창출신 석전 황욱(石田 黃旭, 18981993)92세에 썼다. 내아는 내동헌이라고도 하며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다. 이곳도 터만 남았던 것을 발굴조사를 통해 동헌은 1988년에, 내아는 1989년에 복원하였다.

<고창읍성 동헌>

<석전 황욱의 평근당-92세 악필 >

<고창읍성 내아>


   내아 아래에는 장청(將廳)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궁과 병영 및 진()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현(郡縣)을 지키는 속오군(束伍軍)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縣監)과 병방(兵房군교(軍校)들이 군무를 보던 청사(廳舍)이다. 이 자리도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 발굴조사를 하여 2000년도에 원형 복원하였다. 동쪽 마루에 있는 작청과 향청 등다른 전각들은 멀리서 눈인사만 건네고 북문으로 내려온다.

<고창읍성 장청>


   북문 앞에는 옥()이 있다.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감옥(監獄)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칸을 내고 남녀 옥을 구분하여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 쳤다하여 일명 원옥(圓獄)’이라고도 한다. 이 자리도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3년 발굴조사를 하여 유구(遺構)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읍성 옥>


  고창읍성 앞에는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18121884)의 고택과 동리국악당, 고창판소리박물관이 있다. 신재효 고택은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1850(철종1)에 건립하였다. 원래는 주변의 물을 끌어들여 마루 밑을 통해 서재 밖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운치 있는 집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파묻혔고 연못만 복원하였다. 신재효는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토끼타령, 박타령, 변강쇠타령 등 판소리 열두 마당 중 여섯 마당의 체계를 세웠으며, 판소리의 창극화와 함께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 하였다.

<신재효고택>

<동리국악당>

<고창판소리박물관>


    오후에는 질마재길의 시작점인 고인돌박물관 앞으로 이동한다. 고창 고인돌유적은 화순·강화 고인돌 유적과 함께 2000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도산리와 아산면 상갑리·봉덕리 일대에 수십수백 기가 밀집되어 있고, 10톤 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와 탁자식바둑판식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고창고인돌박물관은 이러한 유물들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도록 상설전시관을 만들어 놓았으며, 고인돌 만들기 등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고창고인돌박물관>


   고창고인돌 군()이 있는 뒷산이 성틀봉이다. 옛날 백제 때 남·여가 두 패로 나뉘어 성 쌓기 경쟁을 하였다. 모양성은 여자들이 쌓고 성틀봉의 서산고성은 남자들이 쌓았는데, 남자들은 여자들을 얕잡아보고 여유를 부렸으며, 여자들은 성틀봉이 마주보이는 북쪽 문은 쌓지 않고 보이지 않는 쪽을 부지런히 쌓아 놓고 마지막에 북쪽을 쌓았다. 남자들이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돌들을 실어 나르는데, 여자들은 이미 완공하여 함성을 지르자 남자들은 성 쌓기를 중단하고 버리고 간 돌들이 고인돌 군이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고창계산리 고인돌>


  모양성은 고창읍의 동남쪽에 있으며 서고산성은 고창읍에서 서남쪽으로 3정도 떨어진 성틀봉에 있다. 서고산성은 전설처럼 남자들이 성 쌓기를 게을리 하여 패한 관계로 실제 성터 흔적만 남아 있다. 성터는 석성이 보이지 않고 산성의 틀만 보인다 하여 성틀봉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성 쌓기를 중단하고 버린 돌이 고인돌 무더기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입증하듯이 성틀봉 아래에는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성틀봉자락의 고인돌 군>


   고인돌 군() 옆으로 하여 성틀봉자락 고개를 넘으면 고창군 아산면 운곡리 일원으로 운곡습지가 나온다. 운곡습지(雲谷濕地)는 해발고도가 낮은 구릉지의 곡저부(谷底部)인 오베이골에 형성된 습지다. 2011314일에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같은 해 47일에 우리나라에서 16번째로 람사르습지에 등록되었으며, 2013528일에는 고창군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고창운곡람사르습지 표지석>


  람사르협약은 197122일에 이란의 람사르에서 체결한 협약으로 197512월에 발효되었다. 201558일 기준으로 168개국이 참여하고 있으며, 또한 2,000곳 이상의 습지가 람사르습지로 등록되어 있다. 19977월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습지보전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겨울철 조류 동시모니터링, 생물다양성 관리계약 운영, 생태공원 조성 등을 진행하고 있다. 또 국제협력의 일환으로 러시아, 호주, 중국 등과 철새보호협정을 체결하고 철새이동경로 공동조사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운곡습지의 겨울>


   운곡습지가 형성된 오베이골은 과거에 논으로 경작되던 지역이다. 1981년에 한빛원자력발전소(전 영광원자력발전소)의 냉각수로 쓰기 위한 저수지가 운곡마을에 들어서면서 운곡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고, 원자력발전소는 냉각수의 수질관리를 위해 오베이골을 포함한 운곡저수지 주변에 철조망을 쳤다. 이를 계기로 오베이골은 사람들의 접근이 제한되어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는 지역이 되었다. 그 후 이 지역에는 원시 밀림과 같은 비경의 습지가 형성되었다.

<운곡저수지>


   오베이골은 오방골의 전라도 사투리로 오방동이라고도 부른다. 오방은 동···북의 4방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뜻한다. 또한 이곳이 사실재, 행정재(송암), 직업재(매산), 굴치재(용계), 백운재(운곡) 등 다섯 갈래 길로 나뉘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 호비골, 호비동으로도 부르는데, 이곳 지형이 호랑이 콧등과 같다는 데서 유래한다. 운곡(雲谷)도 마을 주변이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덮고 있어서 운곡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운곡습지의 얼음>


   섬틀봉 계곡은 야자메트로 길을 정비하였고, 수생식물이 우거진 곡저부(谷底部)는 물길을 따라 데크가 일방통행으로 한사람만 통행할 수 있도록 좁게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생물들이 동면(冬眠)하는 관계로 식별이 잘 안되지만 꽃피고 새가 우는 계절이면 일일이 이름을 불러가며 자연 속에 묻히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 같다. 수면 위로는 가시연꽃이 금방 솟아오를 것 같고, 꽁꽁 언 얼음 밑으로는 각시붕어가 꼬리를 흔들며 유혹하는 것 같다. 그리고 오색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운곡습지 곡저부 통로>


   운곡저수지 호반에는 운곡서원이 자리한다. 운곡서원은 1797년에 도학의 사표인 충개공 백암 김제(白巖 金濟, 1362?), 농암 김주(籠巖金澍, 1365?)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13891456)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 네 분의 선산김씨를 모시기 위해 창건되었다. 그러다가 자영산과 운곡이라는 지명이 주자(朱子, 11301200)가 강학하던 곳과 비슷하다 하여 1766(영조 42)에 모양(牟陽) 당산에 세운 사원을 1843년에 자손들이 세거하는 운곡으로 이전하면서 주자의 위패를 모셨다.

<운곡서원 안내>


   또한 운곡서원은 본래 선산김씨 사우(祠宇)로 세워졌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고종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나 유림들과 후손들에 의하여 1905년 복설되었고, 1924년에 복원되었다. 1981년 운곡저수지가 축조되는 바람에 자손들은 떠나고 서원만 남아 있다. 그러나 서원의 양철지붕은 상투 틀고 양복 입은 것처럼 최악의 부조화를 연출하여 돌아서는 모습이 소태 씹은 맛이다.

<운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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