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동구릉
(2019년 1월 8일)
瓦也 정유순
동구릉(東九陵)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아홉 개의 능’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왕실 최대 규모의 왕릉 군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1408년에 승하하자 처음 터를 연 건원릉(健元陵)이 조성된 이후 조선왕조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후비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동구릉이 있는 경기도 구리시는 조선시대 양주목(楊洲牧)의 망우리면과 구지면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2개 면을 합하여 구리면이 되었고, 1973년 읍이 되었다가 1986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구리시 지도>
망우리(忘憂里)라는 지명은 조선 태조가 자신과 후손들의 유택(幽宅)을 한양 가까운 곳에 정하고자 고심했는데, 어느 날 무학대사와 함께 자신의 무덤 인 건원릉(健元陵) 터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뒤돌아보며 왕릉의 군락지로는 더없는 길지(吉地)라 생각을 굳히고 “오랜 근심을 잊게 됐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동구릉 매표소와 정문>
경의중앙선 전철을 타고 망우역과 양원역을 지나 구리역에서 내려 왕숙천을 따라 걸어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구리IC부근에서 동구릉이 있는 인창동 쪽으로 방향을 튼다. 왕숙천(王宿川)은 길이 37.34km로 포천시 내촌면(內村面) 신팔리(薪八里) 수원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남양주시를 지나 구리시에서 한강으로 흘러든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팔야리(八夜里)에서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왕산내’라고 부르는데 동구릉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구리역>
<왕숙천>
왕숙천에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구리IC부근에서 동구릉 쪽으로 올라가 매표소를 지나 동구릉역사문화회관에서 문화해설사의 간결한 설명을 듣는다. 조선 왕족의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한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2009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조선의 왕릉은 무덤이전에 자연으로 만나는 역사의 숨결이다. 유럽의 조경전문가들은 조선왕릉을 “신의 정원”이라 부른다고 한다.
<동구릉역사문화관>
동구릉에는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능이 조성되어 있는데, 왕이나 왕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된 단릉(單陵), 왕과 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雙陵), 한 능역의 서로 다른 봉분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왕과 왕후를 하나의 봉분에 조성한 합장릉(合葬陵), 왕과 두 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이 있어 한 자리에서 다양한 형태의 왕릉을 볼 수 있다.
<건원릉 석물배치도-네이버캡쳐>
능(陵)은 왕(王)과 왕비(王妃), 황제(皇帝)와 황후(皇后)의 무덤을 말하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후궁 등의 사친(私親)의 무덤이며,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조선왕릉 중 북한에 있는 재릉(齋陵, 태조 첫째 왕비 신의왕후)과 후릉(厚陵,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대한민국에 있다. 한양도성에서 제일 멀리 있는 능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 단종)이며, 그 다음은 경기도 여주의 영릉[英陵(세종), 寧陵(효종)]이다.
<조선왕릉분포도>
동구릉에 들어서서 바깥 홍살문을 지나 직선으로 큰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태조의 건원릉이 나온다.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고려의 뛰어난 무장으로 1392년에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재위 기간 동안에 도성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정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제1왕비인 신의왕후는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에 돌아가셔서 능이 개성의 재릉(齋陵)에 모셔져 있으며, 계비 신덕왕후는 조선 최초의 왕비로 서울 정릉(貞陵)에 모셔져 있어서 단릉이다.
<건원릉 정자각>
특이한 것은 3면의 곡장 안에 봉분을 안치했는데, 봉분에는 억새로 덮여 있다. 태조는 유독 고향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태종은 능역을 조성하면서 함흥 땅의 억새와 흙을 옮겨다가 봉분에 심어드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600년 동안 억새가 소멸되지 않도록 관리를 해오고 있다. 그러나 왕자들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이 일어나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인생의 회한(悔恨)도 많이 겪었으리라. 봉분으로 가까이 갈 수 없어 정자각 부근에서 멀리 보이는 억새풀 봉분은 장대(將臺)의 깃발처럼 다른 왕릉보다도 더 위엄 있어 보인다.
<건원릉>
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동구릉은 건원릉을 중심으로 좌우로 8능 16위가 15유택(幽宅)을 이루고 있다. 좌측에는 제5대 문종(文宗)과 현덕왕후를 모신 현릉(顯陵), 제14대 선조(宣祖)와 첫째 왕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를 모신 목릉(穆陵), 제23대 순조(純祖)의 아들로 22세에 절명한 효명세자(孝明世子)를 추존한 익종(翼宗)과 신정왕후를 모신 수릉(綏陵)이 있으며,
<동구릉 지도>
우측으로는 제16대 인조(仁祖)의 둘째 비인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제18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의 숭릉(崇陵), 제20대 경종(景宗)의 첫째 비인 단의왕후를 모신 혜릉(惠陵), 제21대 영조(英祖)의 계비 정순왕후를 모신 원릉(元陵), 제24대 헌종(憲宗)과 첫째 비인 효현왕후, 둘째 비인 효정왕후를 모신 경릉(景陵)이 도열한다. 이러한 형상은 건원릉이 나무의 본줄기라면 다른 능들은 본줄기에서 곁가지가 뻗어 나와 과일 또는 꽃이 열린 것 같다.
<동구릉 위치도-네이버캡쳐>
현릉(顯陵)은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으로 동원이강릉이다. 문종(文宗, 1414∼1452)은 8세에 세자가 되어 세종을 도와 실무를 익혔다. 왕위에 오른 후 <고려사(高麗史)> 등 역사서를 편찬하였고 병제(兵制)를 정비하였다. 현덛왕후(현덕왕후(賢德王后, 1418∼1441)는 문종의 세 번째 세자빈으로 1441년 단종(端宗)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종 즉위 후 왕후로 추존되었으며 중종(中宗) 대에 현덕왕후의 능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현릉-네이버캡쳐>
목릉(穆陵)은 제14대 선조와 첫째 왕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으로 동원이강릉이다. 선조(宣祖, 1552∼1608)는 조선 최초로 방계혈통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후 전후복구에 힘을 기울였다.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1600)는 1569년(선조2)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선조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다.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는 163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광해군 때에 서궁(西宮)에 유폐되기도 했다. 목릉은 같은 능역에 세 개의 능침을 각각 조성한 능이다.
<목릉 정자각>
휘릉(徽陵)은 제16대 인조(仁祖)의 두 번째 비인 장렬왕후의 능으로 단릉이다.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는 1638년(인조16)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른 후 26세의 젊은 나이에 대비가 되었다. 현종연간에 효종과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인 예송논쟁(禮訟論爭)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으며, 1688년(숙종14)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휘릉 정자각>
숭릉(崇陵)은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쌍릉이다. 현종(顯宗, 1641∼1674)은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청나라 심양에서 출생한 왕으로 1659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호남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군비를 강화하여 재정구조를 다시 정비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는 연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88년(숙종14)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숭릉>
혜릉(惠陵)은 제20대 경종(景宗)의 첫째 왕비 단의왕후의 능으로 단릉이다.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는 1696년(숙종22)에 세자빈으로 책봉이 되었으나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경종과의 사이에는 소생을 얻지 못하였으며,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후로 추존되었다.
<혜릉>
원릉(元陵)은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으로 쌍릉이다. 영조(英祖, 1694∼1776)는 왕위에 오른 후 법제도를 개편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탕평책을 실시하여 붕당(朋黨)의 해소를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 역대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재위(52년)한 왕이자 최장수(83세) 국왕이다.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는 15세의 나이로 66세 영조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였다.
<원릉>
수릉(綏陵)은 추존왕 익종과 신정 왕후의 능으로 합장릉이다. 익종(翼宗, 1809∼1830)은 제23대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인재를 등용하고 예(禮)와 악(樂)을 발전시켰으나 22세에 절명한다. 순조는 아들에게 효명세자(孝明世子)라는 시호를 내린다. 아들이 헌종(憲宗)이 되자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다.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는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제25대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을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올린 후 수렴청정을 하였다.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하였다.
<수릉>
경릉(景陵)은 제24대 헌종(憲宗)과 첫째 비인 효현왕후, 둘째 비인 효정왕후의 조선 유일의 삼연릉이다. 헌종(憲宗, 1827∼1849)은 순조의 손자로 8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세도정치로 인해 삼정(三政,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1843)는 1837년(헌종3)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3)는 1844년(헌종10)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최초의 태후(太后)가 되었다.
<삼연릉(경릉)-네이버캡쳐>
동구릉의 전체 능역(陵域)은 59만 여 평에 달하는 광활한 대지와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자연의 공간이다. 능에 들어가기 전에는 꼭 홍살문을 거쳐야 한다. 붉은 칠을 한 홍살문은 악귀의 범접을 못하게 하는 문이다.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의 길이 참도(參道)로 전석(塼石) 형식의 박석(薄石)이 길게 놓여 져 있으며, 왕이 참배할 때 걷는 길이다.
<홍살문>
<참도-네이버캡쳐>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丁’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다.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정자각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물론 본격적인 준비는 홍살문 밖에 있는 재실에서 이루어진다. 조선왕릉 정자각의 연원은 고려시대에서 찾을 수 있으나 그 이전의 정자각 형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고 한다.
<건원릉 정자각 내부>
동구릉을 대충 둘러보고 재실을 뒤로 하고 나온다. 재실(齋室)은 왕릉에는 필수적으로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며,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음복(飮福)도 하며 망제(望祭)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왕릉은 너무나도 자연을 자연스럽게 이용한 충(忠)과 효(孝)를 시나브로 배울 수 있는 곳이며 호연지기(浩然之氣)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나 우리 마음속에 아주 가깝게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가겠지 하면서 잘 안 가는 먼 길 같은 곳이다.
<동구릉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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